- 전략적 변곡점에 선 세계경제

앤드루 그로브(75)는 세계 반도체 산업의 개척자로 꼽힌다. 그는 고(故) 로버트 노이스, 고든 무어(82)와 함께 인텔을 창업했다. 인텔 회장 겸 CEO를 맡기도 했다. 그는 그저 그런 경영자가 아니었다. “경영자가 일정한 경지에 오르면 치밀한 이론가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 인물이다.” 예일대 경영대학원 제프리 가튼 교수의 평이다.
그는 국내 경영자들이 곧잘 쓰는 경영 잠언(箴言)의 주인공이다. 바로 ‘전략적 변곡점(Strategic Inflection Points)’이란 말이다. 그는 1998년 8월 경영자 모임에서 이 개념을 처음 소개했다. 그때 그로브는 “경영자인 당신이 기존 상식과 통념까지 다시 생각하면서 경영 전략을 근본적으로 바꾸도록 하는 것”이라고 의미를 설명했다.
미국 경영자들은 2001~2008년 유동성과 자산 거품에 취해 그로브의 전략적 변곡점이란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금융위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유럽·중국 등 주요 국가가 공격적으로 돈을 풀어 경기가 빠르게 회복하는 듯해서였다.
그런데 요즘 전략적 변곡점이란 말이 되살아나고 있다. 이번 ‘8월 패닉’이 계기였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글로벌 기업 경영자들이 8월 패닉을 계기로 경영 전략을 근본적으로 다시 짜고 있다”며 “경영자들은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상식 또는 통념까지 회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만큼 8월 패닉의 충격은 컸다. 누군가 음모를 꾸며 의도적으로 8월 휴가철을 겨냥한 듯했다. 겉으로 드러난 방아쇠는 8월 5일 신용평가회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의 미국 신용등급 강등이었다. 절대 안전을 의미하는 트리플A(AAA)에서 더블A플러스(AA+)로 낮췄다.
미국 신용등급 강등은 예견된 일이었다. 국내외 이코노미스트들은 강등 직전까지 “(미 신용등급 강등은) 이미 주식과 채권 가격에 반영돼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충격은 크지 않을 것”이란 말을 서슴지 않았다.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미국·유럽·아시아 시장에서 자산가격이 줄줄이 미끄러졌다. 1971년 미국이 달러-금 태환(바꿔주기)을 중단했을 때보다 자산가격은 더 가파르게 추락했다. 2008년 금융위기 때만큼이나 빠르게 자산가격이 붕괴했다는 분석도 있다.
위기 원인은 주요국의 디레버리징 사태미국 신용등급 강등이 그토록 큰 충격이었을까. “미스터 시장(Mr. Market)은 늘 그렇지는 않지만 자주 영악하게 판단한다. 물 위 작은 얼음을 보고도 물밑 빙산 크기를 가늠한다.” ‘증권 분석의 아버지’ 벤저민 그레이엄이 생전에 제자들에게 자주 했던 말이다. 이 말대로라면 시장은 미국 신용등급 강등으로 글로벌 경제의 위기 요인들에 반응한 셈이다.
위기의 출발점은 부채다. 미국·유럽·일본이 시달리고 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경제를 이끌어온 트로이카다. 올 6월 말 기준 세 지역의 빚더미는 30조 달러(약 3경2700조원)에 달한다. 중앙·지방·정부투자기관 등의 부채를 모두 더한 금액이다. 가계 부채까지 합하면 천문학적 규모다.
세계 경제는 빚더미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형국이다. 구축효과(정부의 재정지출 확대가 기업의 투자 위축을 발생시키는 것) 탓이 아니다. 정부가 채권을 많이 발행해 자금을 쓸어가 버리는 바람에 기업이 자금을 조달하지 못해 투자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는 얘기다. 요즘만큼 자금이 풍족했던 시절을 역사적으로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미국·유럽·일본의 디레버리징(부채축소) 사태 탓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경제학) 교수의 진단이다. 마치 눈사태처럼 디레버리징이 일어나고 있다. 제일 먼저 시작한 쪽은 미국 가계다. 주택 거품이 붕괴한 뒤 미국 소비자들은 소비를 줄여 빚을 갚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은 유로존의 변방으로 번졌다. 그리스·아일랜드·포르투갈이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했다.
미국 가계나 남유럽 부채위기는 성격이 좀 다르지만 대책은 똑같다. 씀씀이를 줄여 디레버리징하는 방식이다. 미국 가계는 자발적 판단이나 채권 금융회사의 채무 구조조정(워크아웃), 법원 판결에 따라 빚 줄이기를 하고 있다. 남유럽 세 나라는 EU(유럽연합)와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긴축을 처방 받았다.
‘허리띠 졸라매 빚 갚기’는 국내 경영자들에게 너무나 상식적인 처방인 듯했다. 국내 경영자들의 잊지 못할 경험과도 일치했다. 한국은 1998년 IMF 구제금융을 받고 긴축처방을 충실히 이행해 위기를 탈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긴축은 방탕한 채무자에 대한 징계로 비치기도 했다. 국내외 일반인뿐 아니라 전문가들 역시 ‘(그리스와 포르투갈 등이) 능력도 안 되면서 빚을 끌어다 잘 먹고 잘 살았다’ ‘과도한 복지를 만끽한 결과’ 등 남유럽 재정위기국들을 비난했다. 이어 ‘당연히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결론을 쉽게 내렸다. 이들 나라 이름의 머리글자를 묶어 ‘피그스(PIIGS)’라고 부르는 이면엔 그런 인식이 똬리를 틀고 있다.
일부 전문가는 ‘긴축 패러다임’을 비판했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와 조셉 스티글리츠 등이다. 그들의 비판은 소수설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상 무시됐다. 몇몇 경제학자는 그들의 의견을 “너무나 좌파적”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EU가 그리스에 2차 구제금융을 투입하고 받을 돈 21% 정도를 탕감해 주기로 하자 긴축 패러다임에 대한 의구심이 싹텄다. ‘긴축으론 재정위기가 해소되지 않는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시장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경제학자들보다 시장이 한발 앞서 눈치 챈 셈이다.
시장의 의구심은 이후 몇 가지 이벤트로 강화됐다. 미국이 또 다른 형태의 부채위기를 겪기 시작한 것. 미국은 연방정부 부채한도 협상으로 난항을 겪었다. 마이너스 통장 한도(기존 14조3000억 달러)를 늘리는 문제를 놓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 진영과 공화당이 정면 충돌했다. 부도 시한인 8월 2일이 다 돼서야 가까스로 타결됐지만, 비슷한 시기에 미국 더블딥(경기회복 뒤 재침체) 우려가 불거졌다.
“미 부채한도 협상 난항과 더블딥 우려는 언뜻 보면 성격이 다른 위기 요인들로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미국 자산운용사 노던트러스트의 폴 캐스리얼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이렇게 분석했다. 그는 미국 최고 경제 분석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부채한도 협상에서 두 패러다임이 충돌했다. 정부 부채가 경제 활력을 떨어뜨린다는 쪽(공화당 티파티 세력)과 정부 부채를 늘려서라도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는 쪽(오바마 대통령)이 벼랑 끝 승부를 벌였다.
두 세력 또는 패러다임의 충돌은 곧 경제정책의 방향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어느 한쪽이 주도권을 쥐지 못하면 위기 대응능력이 떨어지기 십상이다. 그 결과가 바로 미국 정부의 강제적 디레버리징으로 나타났다. 10년 동안 2조 달러가 넘는 재정 지출을 줄여 나가기로 한 것이다.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 미국 정부가 2009년 이후 연간 3000억 달러를 경기부양에 투입했는데, 앞으로 10년 동안 해마다 2000억 달러가 넘는 돈을 긴축해 빚을 갚아야 한다.
캐스리얼은 “미 정부의 긴축은 2차 양적완화의 종료(6월 말)와 맞물려 더블딥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했다. 마침 S&P가 미국 신용등급을 강등시켰다. 울고 싶을 때 뺨 때려준 격이다.
글로벌 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여기저기를 둘러봐도 탈출구가 없었다. 미국 가계뿐 아니라 정부도 긴축, 유럽도 긴축 중이다. 세계 경제의 신형 엔진인 중국과 브라질은 또 다른 긴축에 여념이 없다. 인플레이션과 자산거품을 진정시키기 위한 돈줄 죄기(통화긴축)다. 글로벌 경제의 한계상황이다.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이런 상황을 빗대 ‘저축의 역설(Paradox of Thrift)’이라고 했다. 개인 차원에서 저축이 좋은 일이지만 모두가 저축하면 경기가 악화한다는 말이다. 이를 요즘 상황에 대입해 개인이나 개별 국가 차원에서 보면 지출을 줄여 빚을 갚는 게 옳은 일일 수 있지만 글로벌 차원에서는 재앙일 수 있다.

한계에 부닥친 글로벌 경제세계적 금융이론가 로버트 실러 예일대(경제학과) 교수는 세계적 긴축-디레버리징 움직임을 대공황 시기 보호무역주의에 비유했다. 그는 “1929년 주요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자국 산업을 지키기 위해 장벽을 쌓았다. 경제학자들이 반대했지만 그 시절 시각에선 당연한 대응이었다. 마치 요즘 긴축이 당연한 대응인 것처럼. 긴축과 보호무역은 관련이 없지만 결과는 비슷할 듯하다. 글로벌 경제 침체다”라고 말했다.
긴축-디레버리징 사슬은 쉽게 끊을 수 없을 듯하다. 긴축을 지지하는 기존 패러다임(신자유주의)이 여전히 우세하다. IMF와 유럽·미국 중앙은행의 기본 이론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부채 탕감 같은 조치는 반시장주의적인 것을 넘어 반자연적인 것이다.
글로벌 공조도 쉽지 않다. G7(주요 7개국)과 G20(주요 20개국) 틀이 마련돼 있기는 하지만 2008년 위기 때처럼 한목소리를 내기 힘들어 보인다. 각국 상황이 다를 뿐만 아니라 보는 시각도 제각각이다. 메시아를 찾는 갈망은 크지만 글로벌 리더십의 위기마저 엿보인다. 미국·유럽·중국 정상 가운데 자국의 단기적 이익을 포기하고 글로벌 공동의 선을 내세우고 나설 사람이 없다.
시장은 ‘기존 패러다임의 그늘’과 ‘공조 위기’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주요 국가 리더들이 기존 패러다임에 갇혀 획기적 대책을 내놓기 힘들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래서 빌미만 있으면 주식과 상품 가격이 급락할 기세다. 심지어 재정위기가 금융위기로 바뀔 조짐마저 나타났다. 최근 자주 미국·프랑스·독일·영국의 은행 주가가 폭락했다. 시장이 유럽 재정위기국 국채를 보유한 은행들의 주식을 싼값에 팔았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 소시에테제네랄과 자금 거래를 회피하는 아시아 은행들이 나타날 정도다.
이 모든 현상은 글로벌 리더들에 대한 시장의 압력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국 정상과 경제정책 담당자들이 기존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장이 먼저 반응하면서 기존 정책의 한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사회적 압력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증폭될 가능성도 엿보인다. 긴축 결과 그리스 실물경제가 침체에 빠지면서 실직자들의 반발이 거세다. 이런 식의 사회 불안이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다. 앞서 소개한 앤드루 그로브가 말한 대로 “기존 통념과 상식까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경영전략 전면 재검토할 때미국 경영자들은 일단 현금을 대량으로 확보하고 있다. 최근 WSJ와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은 “GE와 마이크로소프트의 금고엔 어느 때보다 현금이 많이 쌓여 있다”며 “2008년 위기 때 돈 가뭄이 발생한 것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고 보도했다. 세계 경제 수요가 되살아날 가능성이 작은 때 현금이 가장 믿을 만한 방패이기 때문이다.
현금 확보는 단기 대응책이다. 제프리 가튼 예일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거시경제 상황이 요동해 기존 경제 패러다임이 효력을 상실하고 있지만 대안 패러다임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비즈니스 리더들은 자신의 상식뿐 아니라 기존 경영 전략의 전제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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