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성원 칼럼] 한여름 밤의 개꿈
[권성원 칼럼] 한여름 밤의 개꿈
주책없이 이 나이에 애들처럼 개꿈을 꾸었습니다.
장면 1 북쪽 사람들이 들으면 오금을 못 펴는 내각청사 OO호실. 위대한 두목과 위대하면 안 되는 우두머리급 천리마 일꾼들이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드디어 두목이 일갈합니다.
“가뎌 온 영화 틀라우!”
“제목이 뭐랬디?”
“위대한 수령동지 ‘울지마 톤즈’입네다!”
모두들 주눅이 들어 앞만 바라보고 슬쩍슬쩍 두목의 표정만 살핍니다. 이런 분위기에 이골이 나고 눈치로 살아남은 일꾼들이라 영화를 보면서도 어떤 말로 두목의 비위를 맞추어야 할지 온통 그 생각뿐입니다. 아예 입 닫고 중치나 될까? 뭐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두목은 왜 돼먹지도 않은 남반부 영화를 보여주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오지로 보낼 동무들을 골라내는 거 아냐? 등에 식은땀이 흐릅니다. 영화가 끝날 무렵 감시, 모함, 밀고, 아부로 살아남은 모질고 모진 일꾼들의 가슴속에 아주 눈곱만큼이지만 사랑, 베풂, 봉사, 희생…같은 단어들이 살짝살짝 지나갑니다.
장면 2 영화를 보고 두목이 일꾼들과 함께 둘러앉아 차를 마십니다. 심사가 뒤틀린 두목이 심통 맞게 한마디 합니다.
“남반부 간나들은 알다가도 모르겠어야! 자기네 인민들이나 봐주지 왜 아프리카까지 가서 저 야단들이야? 저도 죽어가면서 말야!”
두목이 자리를 뜨면서 딱 한마디 합니다. “우리 인민들 말야! 이젠 좀 살살 다루라우!”
일꾼들에게는 상상도 못할 말입니다. 두목의 칠흑 같은 가슴속에 실낱 같은 햇볕이 비춘 걸까? 기가 찰 일입니다. 아마도 쫄리 선생의 영혼이 보이지 않는 역사(役事)를 한 것일까? 쫄리! 남수단인들이 이태석 선생의 세례명인 ‘존리(John Lee)’를 그들의 발음대로 별명이자 애칭으로 부르는 이름입니다.
작년 1월 이태석 신부가 선종했을 때 너무나 가슴이 아파 그의 이야기를 이 칼럼에 썼습니다. 우리나라 현대사를 아무리 뒤져봐도 이런 의사는 없었습니다. 그 어렵게 딴 의사 면허는 나중에 쓰기로 하고 더 어려운 사제의 길을 걸어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치료하는 천사급 명의가 됩니다.
누구나 손사래를 치는 아프리카의 오지, 내전으로 황폐화 된 남수단으로 가 희망 제로인 톤즈 마을의 희망 전도사가 됩니다. 의사, 교사, 벽돌공, 설계사, 공사장 십장, 브라스밴드 지휘자, 작곡가, 성직자…자신의 재능과 육신과 영혼을 몽땅 쏟아붓습니다. 나중에는 너무나 지쳐 목숨까지 던져버리고 훌훌 하늘로 갑니다. 소천한 지 1년 6개월, 당신의 보석 같은 삶이 날이 갈수록 더 큰 빛을 발합니다.
당신의 염원이 기적으로 나타납니다. 생전에 그토록 소원했던 수단 전쟁이 끝나고 남수단이 독립합니다. 톤즈 마을에 평화가 온 것이지요. 아프리카에서 평화적으로 내전이 종식되고 새로운 정부가 탄생한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랍니다. 놀랍게도 당신은 온 백성의 추천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은 최초의 의사가 되었습니다.
온 국민은 당신을 잊지 못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당신의 삶, 희생, 봉사…. 그 큰 울림들이 북쪽으로까지 날아갔다 이겁니다. 지난 3월 런던을 방문했던 북쪽의 최고위층 인사에게 영국 상원의원이 당신의 마지막 삶을 그린 ‘울지마 톤즈’ DVD를 전달했다는 기사를 보고 아주 묘한 기분이 듭니다. 저들이 과연 그 동영상을 볼까? 보고 나면 무슨 생각들을 할까? 그래서 한여름 밤의 개꿈을 꾼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쫄리 선생님! 그 기적의 손길로 굶주림과 병고와 억압에 눈물짓는 북녘 동포들에게도 다시 한번 희망의 전도사가 되어 줄 수는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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