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조원 SPA 시장 춘추전국 시대
5조원 SPA 시장 춘추전국 시대
“유니클로보다 품질은 좋게, 자라보다 감도는 높게 만드세요.”
날로 커지는 패스트 패션 시장을 주목하던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의 3년 전 지시 내용이다. 당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들여온 SPA 브랜드 유니클로와 자라는 예상 밖 실적으로 국내 패션업계에 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제일모직은 철저한 시장조사와 제품개발에 착수했다. 이후 H&M, 망고, 포에버21 등 해외 브랜드들이 한국시장에 안착하며 SPA 패션 시장을 급속히 키웠다. 매출 규모는 3~4배 늘어났다.
최근 제일모직이 야심차게 준비해 온 신규 SPA 브랜드가 윤곽을 드러냈다. 브랜드 이름은 에잇세컨즈(8seconds).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호감을 느끼는 시간이 8초라는 점에 착안했다. 글로벌 시장을 겨냥해 영문으로 지었다. 유난히 숫자 8을 선호하는 중국인들을 염두에 두고 이름을 지었다는 얘기도 있다. 내년 봄 론칭을 목표로 명동, 강남 등 핵심 상권에 대형 스토어를 연다는 계획이다.
1호점을 위해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카페네스카페 건물(990㎡)을 임차 계약했다. 이곳은 스페인 인디텍스의 SPA 브랜드 마시모두띠를 마주 보는 곳으로, 인근엔 미국 브랜드 포에버21까지 있어 ‘가로수길 SPA 전쟁’이 치열해질 것임을 예고한다. 론칭 담당 실무자인 제일모직 양희준 과장은 “남성복은 물론 여성복도 고려하고 있으며, 진(Jean)류 캐주얼 상품 개발도 계획 중이다. 20, 30대를 메인 타깃으로 하되 40대 이상도 입을 수 있는 SPA 브랜드를 선보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에잇세컨즈 사업은 제일모직의 자회사 개미플러스유통이 맡았다. SPA 브랜드의 속성상 의사결정 속도가 상대적으로 더딘 대기업이 직접 사업을 벌이기보다는 작은 조직을 통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서다. 개미플러스유통은 이미 중국과 동남아 등지에 생산공장과 국내 유통망을 확보하고 있다. 디자인 책임자로는 신세계인터내셔널에서 여성복 보브를 담당해 온 권오향 상무가 스카우트됐다. 권 상무 진두지휘 아래 디자이너만 30~40명을 채용했다. 브랜드 하나에 딸린 디자이너 숫자치곤 많은 인력이다. 그럼에도 여성복뿐 아니라 남성, 아동, 스포츠 등 부문별로 디자이너를 비롯한 인력을 계속 늘려간다는 방침이다.
LG패션도 계열사 LF네트웍스를 통해 제덴(ZEDEN)을 선보이며 맞불을 놨다. 과거 잡화 브랜드로 내놨다 중단했던 브랜드를 SPA 브랜드로 새롭게 변신시켜 재론칭했다. 이탈리아 감성을 기반으로 남·여성복을 비롯해 스포츠와 아웃도어까지 갖춘 토털 브랜드를 지향한다. LF네트웍스 김찬동 팀장의 설명이다. “8월 론칭해 올해 말까지 20개 매장, 내년에는 100개까지 매장을 확대할 계획이다. 향후 중국 시장 진출을 통한 글로벌 SPA 브랜드로 키울 방침이다.”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유통업체들의 SPA 시장이 급속히 커지자 기존 대기업 패션 업체들도 자회사를 통해 잇따라 뛰어들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유니클로와 자라를 들여와 시장을 리드해 온 롯데에서도 토종 SPA 브랜드를 기획 중이다. 신영자 사장의 지시로 롯데는 최근 국내 의류업체와 손잡고 패스트 패션 브랜드 ‘컬처콜(가제)’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내년 봄 전국 롯데백화점에 매장을 열 계획이다. 평소 패션 사업에 큰 뜻이 없는 것으로 비쳤던 롯데에서 신영자 사장이 반전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면세점과 호텔사업을 담당하던 신영자 사장은 명품 수입과 뷰티에 관심이 있을 뿐 패션 사업에는 큰 욕심을 내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말 명품 패션거리인 서울 청담동 인근 건물을 매입해 주목을 받았지만, 이 역시 뷰티 사업을 위한 것으로 전해졌었다. 이로써 신영자 사장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의 면세점 전쟁에 이어,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과의 패스트 패션 경쟁에 나서는 셈이 됐다. 이들의 승부에 패션계는 물론 재계의 관심도 크다.
글로벌 SPA 맹공 vs 토종 SPA 반격글로벌 브랜드들도 한국 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이들 브랜드 CEO들은 한결같이 “한국은 기회의 땅”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유는 세 가지다. 4800만 인구가 좁은 지역에 밀집해 있고, 성인 대부분이 트렌드에 매우 민감하다. 또 포르투갈, 폴란드 등 유럽 국가에 비해 4배 넘는 소비파워를 가졌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뚜렷한 사계절이 있어 사시사철 옷 소비가 일어난다는 점도 장점이다.
자라의 성공에 힘입은 스페인의 인디텍스는 버쉬카, 풀앤베어, 스트라디바리우스 등의 브랜드를 국내에 추가로 론칭했다. JSK트레이딩은 올 하반기 미국 여성 토털 브랜드 ‘비비’를 선보인다. 전 세계 21개국에 진출한 브랜드의 글로벌 파워가 한국에서도 통할지 주목된다. 한국에서의 SPA 빅뱅은 세계적인 브랜드가 대거 몰려오는 내년에 절정에 달할 전망이다. 미국 아베크롬비&피치의 홀리스터, 영국 아르카디아의 톱숍, 스프링필드 브랜드로 잘 알려진 스페인의 코르테피엘이 상륙을 준비 중이다.
중소기업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패션 트렌드 분석 연구소를 운영해 온 에이다임에서는 토종 SPA 스파이시 칼라를 론칭했다. 벌써 싱가포르에 진출해 좋은 반응을 끌어내고 있다. 유니클로·망고·자라 등에 의류를 공급하는 의류 제조·수출 전문기업 세아상역도 자사 SPA를 선보인다. 자회사 인디에프(옛 나산)에서 운영하는 중저가 브랜드 메이폴을 오는 10월 인수하기로 했다. 별도의 패션 사업부를 만들어 동남아 등 해외시장을 공략하는 글로벌 SPA 브랜드로 키운다는 전략이다. 세아상역은 2007년 유럽풍 SPA 브랜드 테이트(TATE)를 직접 선보여 패션 브랜드 운영능력을 입증했다.
한국 SPA 시장 규모는 올해 기준으로 5조원에 달할 전망이다. 전 세계적으로는 럭셔리 브랜드 매출과 SPA 브랜드의 매출이 비슷해졌다. 역사가 20여 년에 불과한 SPA가 100년 이상 지속된 럭셔리 브랜드들의 아성에 강력히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일본인들은 루이뷔통 대신 유니클로로 향한다. 한국의 패션 시장 역시 재편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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