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업계 첫 여성 CEO 푸르덴셜생명 손병옥 사장 >> “유리천장 여성 스스로 만든다”
보험업계 첫 여성 CEO 푸르덴셜생명 손병옥 사장 >> “유리천장 여성 스스로 만든다”
검정 스커트에 엉덩이 위로 떨어지는 흰색 재킷, 우아한 분위기의 진주 목걸이와 귀걸이. 서울 강남 푸르덴셜생명 본사에서 10월 19일 만난 손병옥(59) 사장은 자그마한 체구에 단아한 외모로 실제 나이보다 10년은 젊어 보였다. 외모와 다르게 목소리는 낭랑하고 경쾌했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는 인사에 “그런 말을 많이 듣는다”며 소녀처럼 활짝 웃었다. 1974년부터 30년 넘게 금융업계에 몸담고 있는 손 사장의 직함 앞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여럿 붙어 있다. 그는 2002년 생명보험업계 첫 여성 부사장 자리에 올랐다. 지난 4월에는 8년 만에 사장으로 승진했다. 보험업계 첫 여성 CEO의 탄생이다.
팀·부장 됐다고 만족해선 안 돼
보수적인 보험업계에서 ‘유리천장(여성의 고위직 승진을 가로막는 차별과 편견)’을 깨고 CEO까지 올라선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일처리가 꼼꼼한 데다 계획적으로 진행하는 편”이라며 “능력을 발휘해 상사와 부하직원에게 믿음을 줬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좋은 상사와 동료, 부하직원을 만났고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아직까지 남성 중심의 조직문화와 제도로 여성이 버티기 어렵다는 시각에 대해 “유리천장은 여성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며 “팀장·부장으로 승진하면 그만하면 됐다는 ‘그만병’에 쉽게 걸리는 마음가짐부터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도전정신이 없으면 현재 자리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며 “부단히 자기계발을 하고 욕심도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 사장은 1974년 외국계 은행에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30여 년 전만 해도 대졸 여사원을 뽑는 회사는 외국계 회사뿐이었다. 처음 합격한 곳은 일본 항공사 JAL이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아버지의 반대로 뜻을 접어야 했다. 직장생활을 원한다면 보수적인 조직문화가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해서 선택한 게 미국 체이스맨해튼은행이었다.
그는 모든 일에 대해 스스로 깨치고 배워나가는 스타일이다. 이런 성격 때문에 손 사장은 처음 맡는 업무라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기보다 부닥쳐 결국 해낼 때가 많았다. 모자란 부분이 있으면 배우고 실력을 키워나갔다. 그는 이런 노력으로 재취업 관문을 두 번이나 뚫었다. 공무원이었던 남편이 1979년 1년간 미국 연수를 가면서 4년간 다닌 직장을 그만뒀다[남편은 중소기업청장을 지낸 고(故) 이석영씨다]. 하지만 귀국 후 예전 직장 상사 제의로 크로커내셔널은행에 입사했다.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보스턴에 있는 은행에서 고객서비스 업무를 맡았던 덕분이었다.
1993년 주미대사관 상무관으로 발령받은 남편을 따라 미국에 가면서 직장을 또 그만두게 됐다. 미국 생활 중에도 조지메이슨대에서 영어교수법(TESL)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3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는 “불혹을 넘긴 나이에 이제 누가 날 써주겠느냐”며 재취업을 포기하고 있을 때였다.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최 스팩만 전 푸르덴셜생명 사장이었다. 최 전 사장은 “인사부장 자리가 비어 있다”며 그를 스카우트했다. 최 전 사장은 손 사장이 체이스맨해튼은행 재직 때 부지점장, 상하이은행에서 인사 회계담당으로 일했을 때 한국본부장으로 함께 일했다. 그의 능력을 믿은 것이다.
손 사장은 1996년 인사부장으로 영입된 뒤 1년 만에 임원으로 승진했다. 보험사 업무는 처음이었지만 금세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인재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신입사원과 경력사원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과 임원을 위한 리더십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매년 연말에 상사가 부하직원과 1년 동안 공부할 내용을 정하는 맞춤형 교육과정도 개발했다.
손 사장은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 확대를 위해 2007년 11월 사단법인 ‘위민인이노베이션(WIN·Women in Innovation)’을 결성해 4년째 대표직을 맡고 있다. WIN은 여성임원들의 자발적인 모임이다. 국내외 70여 개 기업과 120여 명의 여성 임원이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1년에 두 번씩 콘퍼런스를 연다. 차세대 여성리더를 꿈꾸는 여성 간부라면 누구든 참석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 놨다. 그는 “여성 인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는 고민을 들어주고 이끌어줄 수 있는 모임”이라고 말했다.
푸르덴셜생명은 삼성·교보·대한 등 국내 대형사를 빼고 외국계 보험사로는 1위다. 푸르덴셜생명과 더불어 ING생명, 알리안츠생명 등이 외국계 ‘빅3’로 꼽힌다. 생보협회에 따르면 2010년 회계기준 외국계 9개 생보사 당기순이익은 7362억원. 이 가운데 푸르덴셜생명 순익은 2135억원으로 전체 29%를 차지하며 단연 1위다. 이어 ING생명이 1706억원으로 24%를 차지했다. 푸르덴셜생명의 2011년 1분기(6월 말) 순익은 589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460억원)보다 늘었다.
국내 진출 외국계 보험사 1위손 사장은 은퇴·노후·건강 부문에 투자를 강화해 종합 생명보험사로 회사를 키워 나갈 계획이다. 푸르덴셜생명은 지금까지 종신보험 판매에 치중했지만 앞으로는 연금보험·건강보험 등의 판매에도 힘을 쏟아 이 부문 비중을 전체의 50%로 끌어올릴 방침이다. 최근 노후 건강 보장을 강화한 더블업 헬스케어 특약을 출시했다. 9월에는 100세까지 연금을 지급하는 100세 플러스 변액연금보험도 내놨다. 손 사장은 “노후 준비와 건강 부문 강화를 위해 사내 TF를 조직해 다양한 검토와 준비작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푸르덴셜생명은 사회공헌활동에도 적극적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손 사장의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2006년 12월 설립한 사회공헌재단의 창립 멤버다. 현재 이사를 맡고 있다. 대표적인 사회공헌활동은 전국중고생자원봉사대회다. 재단 설립보다 훨씬 앞선 1999년부터 개최해 13년간 10만여 명의 중고생이 참여했다. 그는 “봉사활동을 모범적으로 하는 학생을 선발해 수상하고 수상자의 봉사 사례를 해마다 책으로 제작해 전국의 학교에 배포하고 있다”고 말했다. 난치병 아이들을 돕기 위해 2002년 ‘한국 메이크 어 위시(Make-A-Wish) 재단’도 세웠다. 이 재단을 통해 난치병 어린이 지원을 위한 후원금을 지원하고 자사 사옥에 재단 사무실도 마련했다.
손 사장은 그룹 차원의 사회공헌활동은 물론 개인적인 봉사활동이 평생의 숙제라고 말했다. 그가 미국에서 지낼 때였다. 한인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여성 모임 등을 접하면서 인종 문제가 사라지기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러나 인종 편견을 없애기 위해 봉사하는 많은 사람을 보며 다시 생각했다. 그는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사람들도 서로 도와가며 사는데 한국에 돌아가면 같은 민족을 위해 열심히 봉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현직에서는 물론 은퇴 후에도 봉사활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희 이코노미스트 기자 bob28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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