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 1조 달러 시대의 과제 - 중국 의존도 줄이고 신성장 산업 키워라
무역 1조 달러 시대의 과제 - 중국 의존도 줄이고 신성장 산업 키워라
‘한국의 연간 무역액이 2011년에 사상 최초로 1조 달러를 돌파했다. 지식경제부에서 발표한 잠정치에 따르면 수출 5578억 달러, 수입 5245억 달러다. 무역 규모가 1988년 1000억 달러를 돌파한 뒤 23년 만에 열 배로 불어난 것이다. 2010년까지 연간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한 국가는 미국·일본·독일·프랑스·이탈리아·영국, 2001년 WTO에 가입한 후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한 중국, 그리고 유럽의 관문으로 중계무역이 발달한 네덜란드 등 세계에서 8개국 뿐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보다 교역규모가 크던 벨기에·캐나다 등은 아직까지 1조 달러를 넘긴 적이 없다. 그러니 무역 1조 달러는 일단 숫자만으로도 대단한 성과라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금융위기 이후 더욱 선전주변 상황이나 내용을 들여다 보면 의미가 더욱 크다.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교역순위는 11~12위를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 2008년 금융위기를 겪고 나서 순위가 2009년 10위, 2010년 9위로 올랐다. 그것도 수입보다 수출에서 순위 상승이 더 뚜렷했다. 경제위기에 수출을 어떻게 늘릴 수 있었을까. 글로벌 경쟁기업들이 휘청거리는 동안 시장 점유율을 착실히 높이고, 투자심리가 잔뜩 얼어붙어 있을 때 오히려 과감한 투자로 생산원가를 더 낮추고, 선진국 경기가 나빠지면 남미와 동유럽으로 치고 나가는 등의 노력으로 거둔 성과다. ‘위기를 기회로’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한국 수출 선전의 이면에 몇 가지 우려스러운 점도 눈에 띈다. 우선 2012년에는 지난해와 같은 수출 호조를 기대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유럽 재정위기에서 비롯된 선진국 경기 둔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선진국 경기가 둔화되면 신흥국의 수출경기도 동반 둔화되며, 한국 수출증가율도 하락이 불가피하다. 유럽에 대한 선박·가전·휴대전화 등의 수출이 가장 불안하다. 또한 글로벌 수요가 위축되고 (이란 변수를 제외하면) 중동지역의 정세 불안이 완화되면서 원유 등 원자재 가격도 하락할 것이 예상된다. 이는 한국 수출품, 특히 석유제품이나 화공제품의 단가 하락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올해는 지난해에 한국의 수출 증대에 도움이 된 동일본 대지진 같은 반사이익도 기대하기 어렵다. 지난해에는 일본 기업들이 정상조업을 하지 못하면서 글로벌 공급사슬 전반에 충격이 가해졌으며, 이는 한국 상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 중요한 원인이 됐다.
2011년 5월 미국 시장에서 처음으로 점유율 10%를 돌파한 자동차가 대표적인 수혜 산업이다. 그리고 일본 열도가 방사능 누출의 공포에 시달리면서 한국의 생수 등 생필품이나 농수산물 수출도 예상밖으로 호황을 맞았다. 반면 올해는 글로벌 공급사슬이 복구되면서 수출시장의 경쟁이 지난해보다 한층 격화할 전망이다.
단기 전망을 벗어나 좀더 중장기적인 문제점을 살펴볼 때 가장 두드러지는 건 무역 의존도다. 수출이 잘 되는 동안 내수는 상대적으로 위축돼 한국 경제에서 무역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50~60%대에 머물던 무역 의존도((통관수출+수입)/명목GDP)가, 금융위기가 발발한 2008년에 92.1%로 치솟더니, 2011년 1~3분기에는 97.1%를 기록했다. 무역 의존도가 높아지면 한국 경제가 글로벌 경기에 민감해지면서, 선진국 재정위기 등에 휘둘릴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그리고 내수산업과 수출산업의 격차가 커지면서 부문간 사회 갈등을 유발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무역에 대한 전반적인 의존도가 높아짐과 동시에, 교역대상국 중에서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특히 높아지고 있는 것도 문제다.
금융위기 이후 중국은 세계 경제의 구원투수라 할 만큼 높은 성장률을 유지하며 글로벌 경기 회복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이웃나라인 한국도 상당히 도움을 받았다. 2010년 중국에 대한 우리 수출은 전년보다 무려 34.8%나 증가하며 경기 회복에 일조했다. 그러다 보니 한국 수출의 4분의 1이 중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중국 경기가 나빠지면 한국 경제에도 직접적인 타격이 올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다.
현재 시점에서 중국 경제가 경착륙할 가능성은 그리 크진 않다. 선진국에 대한 수출증가율이 빠르게 낮아지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내수 중심의 대규모 부양책을 집행하고 있다. 유럽 재정위기의 파도에 중국이 크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도 조심스럽게나마 가져볼 만하다. 그렇다고 중국의 경기 하강에 대비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다. 소위 ‘넥스트 차이나(Next China)’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지도 몇 년 됐다. 중국을 대체할 신흥 경제대국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거대 인구를 기반으로 높은 성장률을 유지해 온 인도·브라질·인도네시아 등이 선두 주자로 꼽힌다. 이들 나라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시장 확대와 투자가 필요하다.
수출 대상국 면에서 중국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졌다면, 수출 품목 면에서도 소수 주력 품목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지고 있다. 2011년(1~11월)에 한국의 10대 수출품목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0.4%에 달했다. 특히 선박·자동차·반도체는 1993년 이후 한국의 5대 수출품목에서 한 번도 빠진 일이 없고, 이들에 대한 의존도도 차츰 높아지는 추세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원유 가격이 급등하면서 석유제품의 수출 비중도 2위로 뛰어올랐다. 그런데 올해는 이런 주력 품목들 중에서 ‘호조’라고 붙일 만한 산업을 딱히 찾기가 어렵다. 자동차나 반도체 수출은 완만한 증대가 예상되지만, 선박과 석유제품은 감소가 예상된다. 새로운 수출산업의 육성이 절실하다는 얘기다.
이와 연관된 것으로, 2000년대 들어 대기업에 의한 수출 비중이 커지고 있다. IT 버블의 절정기였던 2001년에는 중소기업 수출 비중이 42.9%까지 올라갔다. 이게 2007년에는 30.6%까지 떨어지고 그 뒤에도 뚜렷하게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조선·자동차·반도체 등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산업이 수출 호황을 이끌어 왔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이들 주력산업의 선전에 박수를 보냄과 동시에, 좀 더 안정된 수출기업 생태계 형성을 위해 중소기업, 서비스산업 등 수출에 애로를 겪고 있는 곳에 수출 촉진 노력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FTA 활용도 높여야중소기업의 수출 확대를 돕기 위해서는 FTA의 활용도를 높이는 게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지난해에 한-EU FTA가 잠정발효되고 한-미 FTA도 양국에서 비준이 되면서 한국의 경제영토, 즉 FTA를 맺은 나라들의 GDP 총합은 전세계의 58%로 높아졌다.
그런데 FTA의 체결과 활용은 좀 다른 문제다. 수출기업이 FTA로 낮아진 양허관세를 적용받기 위해서는 원산지가 한국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이를 통과하지 못하면 예전 관세가 그대로 적용이 된다. 이 원산지 인증 방식이 FTA 대상국마다 달라서, 인력이나 정보력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은 FTA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2007년에 발효된 한-ASEAN FTA의 경우 첫 해에는 특혜관세의 수출활용률이 14%로 저조했으며, 2010년에도 29%에 그쳤다. 2010년 수출활용률이 85%였던 한-칠레 FTA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이런 부분에서 중소기업에 실질적인 지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해 무역 1조 달러 달성은 분명 대단한 성과다. 그 의미를 폄하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뒤에 숨은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한국 경제의 성장이나 안정을 해치게 된다. 신흥시장과 신성장 산업을 모색하고, FTA 활용도를 높이며, 위축돼 있는 소비와 투자심리를 살려 수출과 내수의 간극을 줄이는 게 올해 2012년 한국 경제의 중요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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