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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의 ‘경제민주화’ 과열 경쟁 - ‘재벌 응징’이 경제민주화로 둔갑

정치권의 ‘경제민주화’ 과열 경쟁 - ‘재벌 응징’이 경제민주화로 둔갑

4·11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이 경쟁적으로 ‘경제민주화’를 외치고 있다. 새누리당은 2월 13일 전국위원회를 열고 경제민주화를 명문화한 새 정강·정책 결의안을 의결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이틀 뒤 라디오 정당대표 연설에서 “공정한 시장경제질서 확립을 통해 경제민주화를 실현하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 경제민주화특별위원회를 발족한 민주통합당 역시 최근 새 강령 1조에 경제민주화를 명시했다.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는 15일 대국민 기자회견에서 “MB정부의 총체적인 실정 속에서 제1의 핵심과제는 경제민주화”라고 밝혔다. 경제민주화가 정치권 최대 화두이자, 선거 슬로건으로 등장한 것이다.

경제민주화란 무엇일까. 이 말은 우리나라 헌법 119조 2항에 나온다.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한명숙 대표가 “헌법이 명령하는 경제민주화를 실현할 것”이라고 말한 근거가 119조 2항이다.

문제는 경제민주화라는 것이 명확한 개념 정립이 어렵다는 데 있다. 대다수 헌법학자, 경제학자들은 경제민주화가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이라는 데 동의한다. 1987년 9차 헌법 개정 때 삽입된 119조 2항은 그동안 이데올로기적일 뿐 아니라, 정부 규제의 오·남용 소지가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전남대 정기화 경제학과 교수는 “무엇이 적정한 소득분배인가 또는 어떻게 하는 것이 경제적 민주화인가에 대해 경제학계 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정치권은 이 말을 어떻게 규정하고 쓰는 것일까. 민주통합당 헌법제119조 경제민주화특위는 이렇게 정의한다. ‘경제민주화란 개인의 경제적 자유에 기초한 시장경제의 효율성과 역동성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경제적 평등을 최대한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이렇게 해석한다. ‘시장경제의 효율을 극대화하고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경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과 기능을 강화해 경제민주화를 실현한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양당이 내놓은 경제민주화 개념 역시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119조 2항만 강조하는 정치권한가지 공통점은 여야 모두 경제민주화 실현을 위해 대기업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민주통합당은 ‘재벌개혁’, 새누리당은 ‘대기업 관행 철폐’라고 표현한다. 통합진보당은 ‘재벌 해체’를 선언했다. 연일 경제민주화를 강조하고 있는 한명숙 대표는 “경제 민주화와 양극화 해소를 위해 본격적인 재벌 개혁 행보를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출자총액제한제 부활과 일감 몰아주기 근절, 중소기업 적합업종제도 보완이 첫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역시 “대기업의 일감몰아주기를 통한 사익추구 행위, 무분별한 중소기업 영역침해, 불공정한 하도급 관행 등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을 어렵게 하는 일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정치권의 주장대로 헌법은 경제민주화를 명령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헌법은 제9장 ‘경제’라는 표제 아래 119조부터 127조까지 경제 관련 규정을 두고 있다. 헌법학자들은 이를 ‘경제헌법’이라고 부른다. 119조 1항은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기본으로 한다’는 표현으로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의 대원칙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9차 헌법 개정 이후 119조 1항과 2항의 관계는 늘 논쟁거리였다. 한마디로 무게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헌법 해석이 확 달라진다. 법학자들 사이에서는 1항과 2항을 ‘원칙과 예외’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시장경제와 자유주의적 경제질서을 토대로 하는 1항을 원칙으로 하고, 이러한 경제체제가 안고 있는 폐해를 막고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시장에 개입 또는 간섭할 수 있도록 허용한 2항은 예외 규정으로 보는 것이다.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김성수 교수는 “우리 헌법상 경제질서의 원칙은 시장과 자유며 국가의 조정과 개입 행위는 시장 실패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 보충적, 예외적으로만 허용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요즘 정치권은 온통 2항만 강조한다. 자신들이 나서 시장을 뜯어 고치겠다는 투다. 물론 우리 경제헌법은 매우 포괄적인 해석과 운용이 가능하다. 흔히 한국을 자유시장경제 국가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수정자본주의 원리를 채용한 ‘사회적 시장경제’ 국가에 가깝다. 헌법학자, 경제학자들의 다수 의견이 그렇다. 헌법재판소 입장 역시 마찬가지다. 헌법재판소는 여러 판례에서 “국가적인 규제와 통제를 가하는 것은 보충의 원칙에 입각해 자본주의 내지 시장경제질서가 존중되는 범위 내에서 허용된다”고 밝혀 왔다. 하지만 국가가 시장을 규제하고 간섭하려면, 어떤 의도에서 시장과 기업의 자유를 제한하는 정책을 내놓은 것인지, 그 효과는 어떻게 판단하는지, 궁극적으로 개입의 목적은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 여야 모두 이 점을 간과하는 게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최근 정치권이 내놓은 경제민주화 관련 정책을 보자. 민주통합당은 지난해 11월 ‘경제민주화 10대 핵심정책’을 내놨다. 기회균등 선발제(부모 교육수준과 소득수준에 따라 가산점을 부여하는 제도), 출자총액제한제 부활, 순환출자 금지, 지주회사 규제 강화, 일감 몰아주기 근절, 중소기업단체의 하도급분쟁 조정협의권 인정, 비정규직 해결, 정리해고 개선, 금산분리 강화와 계열분리 청구권 도입, 금융감독 개혁, 종업원 대표의 이사 추천권 보장, 법인세·소득세 최고세율 구간 신설(부자증세) 등이다. 재계에서 “재벌응징이라고 쓰고 경제민주화로 읽는다”는 푸념이 나오는 이유다. 민주당은 지난 1월 30일에는 출총제 부활, 일감 몰아주기 근절, 중소기업 적합업종제도 보완을 골자로 한 재벌개혁 정책을 발표했다.

여당도 다를 게 없다.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는 2월 9일 “경제민주화를 위해 대기업의 고질적 관행을 확실히 잡겠다”며 대기업정책을 발표했다. “무조건 대기업을 옥죄는 방안이 아니다”는 전제를 달았지만, 정책 내용은 민주통합당과 거의 비슷하다. 친족이 지배하는 회사와의 내부거래에 대해 정기적인 직권조사 실시, 대기업의 무분별한 중소기업 사업영역 진출 방지, 하도급 부당 단가인하에 대한 징벌적(3배) 손해배상제도 도입 등이 포함됐다. 통합진보당은 2월 2일 10대 재벌의 소유지배구조 개선에 초점을 맞춘 ‘맞춤형 재벌개혁 로드맵’을 발표했다. 대기업의 금융 계열사 분리, 환상형 순환출자 금지, 지주회사 요건 강화, 출총제 한도 25%로 강화, 사업 연관성 없는 계열사 출자금 과세 등이 포함됐다. 이 밖에도 민주통합당은 대기업에 의무적으로 청년층 고용을 강제하는 청년의무고용할당제를 총선 공약으로 제시했고, 새누리당은 민간기업의 비정규직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의 기업 임금체계나 고용 구조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정책들이 경제민주화라는 명분 아래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경제민주화를 주창하는 정치권은 헌법을 근거로 내세우지만, 오랜 기간 헌법을 연구한 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이덕연 교수는 ‘한국헌법의 경제적 좌표’라는 논문에서 “경제민주화의 목표는 정부의 중립성과 조정자 또는 중재자로서 공정한 역할을 주문하는 것이지, 기업의 대형화와 성장 자체를 억제한다든지, 기업의 본원적인 경영전략적 판단 영역에 해당되는 인력정책과 노동시장에 대한 정부의 획일적이고 전면적인 개입을 헌법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논거가 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김성수 교수는 한 논문에서 “국가 개입시에는 국가 스스로의 정책목표를 실현한다는 흑심을 갖지 말고 시장복원의 목표를 가지고 시장친화적 개입, 경쟁촉진적 개입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헌법이 필요한가(대화문화아카데미, 2008)』에서 한동대 법학과 이국운 교수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정치인들이 정권을 잡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늘 하는 일이 있다. 장사꾼들을 떼려 잡는 것이다. … 119조 2항에는 장사꾼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귀족주의적 정신이 담겨 있다는 것을 우리 헌정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읽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대기업 때리기’는 선거철 연례행사다. 정치권이 득표에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재계 주변에서는 “이번이 특히 심하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이런 분위기는 대기업이 자초한 측면이 있다. 상생을 외치면서 골목 상권에 침투하고, 하도급 업체에 단가를 후려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국민적 반감이 커진 것은 재계 스스로 인정한다. 이와 관련 전국경제인연합회는 2월 8일 대·중소기업 상생방안과 사회공헌 확대를 내용으로 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전경련이 결의문을 낸 것은 9년 만이다. 상황을 그만큼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얘기다.



정부실패 대기업에만 떠넘겨서야올해 내내 정치권의 대기업을 향한 포화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다. 투자부진과 경기침체, 잠재성장률 저하, 가계저축 붕괴와 부채 증가, 고물가와 높은 실업률, 사회 양극화는 시장 실패인가, 정부 실패인가. 이 모든 것은 대기업 잘못인가. 이런 문제부터 논의해야 한다. 삼성경제연구소가 2006년 발간한 『한국경제 20년의 재조명』에는 “한국경제의 진단과 처방에 관한 논의들이 실용적인 고민과 미래 대안이 아니라 이념적 대립과 정체성의 혼란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최근 정치권 움직임이 딱 그렇다.

익명을 원한 민주통합당의 한 재선의원은 “우리나라의 양극화 문제는 MB정부나 재벌에만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 역대 정부로부터 이어져 온 정부 실패의 퇴적물”이라고 말했다. 민주통합당 김부겸 의원은 한 인터넷 언론 기고에 이렇게 썼다. “우리(민주당)가 집권했던 10년 동안 20~30세대들은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몇 년 후 대다수의 평범한 집안 청년들은 취업전쟁에서 88만원세대,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것은 이명박 정권 4년 동안 더욱 심화됐지만 사실 우리가 집권했던 10년 동안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그 구조가 정착된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태에 대해 우리 민주당에 80%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찰이 공론화될 때 진정한 경제민주화 정책이 나올 수 있다. 대기업 배싱(때리기)이 능사가 아니다.



김태윤 이코노미스트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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