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 이승한 홈플러스 회장 부부의 ‘청춘 멘토링’
[FEATURE] 이승한 홈플러스 회장 부부의 ‘청춘 멘토링’
“대기업 회장님을 만난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요. 부장님, 사장님도 아니고 회장님이니까요. 하지만 권위적인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어요. 이제는 마음으로 교류하는 멘토입니다.”
카이스트(KAIST) 산업디자인학과에 다니는 박선하(23) 멘티가 이승한 회장과 첫 만남을 떠올리며 말했다. 올해 삼성물산에 입사해 까마득한 후배가 된 이재명(25) 멘티는 이 회장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속내를 터놓는다. 박선영(20) 멘티는 “자수성가하셔서 일만 아실 줄 알았는데 교수님과 항상 손을 잡고 감정 표현을 하시는 게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다른 멘티들 역시 “맞다” “닭살 부부다” “오리, 오리”라며 거든다. ‘오리’는 이 회장이 아내인 엄 교수를 부르는 애칭이다. 불만이 있을 때 입을 내밀어서 그렇단다. 멘티들은 ‘다 안다’는 듯 웃었다.
이날 참석한 멘티 5명과 군 복무, 직장, 대학원 수업 때문에 빠진 3명까지 총 8명의 멘티가 지난해 4월부터 한 달에 한 번 이 회장 부부에게 멘토링을 받았다. 월례행사지만 만나면 5시간을 훌쩍 넘기는 ‘찐한’ 모임이다. 이 회장의 자택 방문은 물론 1박 2일 여행도 다녀왔다.
‘젊은 생각’ 알고 싶어 멘토링 시작
이 회장은 멘토링을 하기 전부터 젊은이들과 소통에 관심이 많았다.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것은 이경숙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의 제안 때문이었다.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어요. 대학생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젊은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고, 직원들과 소통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봤어요. 젊은 사람들과 청춘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성공 아닌가요?” 이 회장은 멘토링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 이사장에게 의견을 내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010~11년에 1기 멘티 6명, 11~12년에 2기 멘티 8명을 맞았다.
1기 멘토링을 시작할 때만 해도 멘토는 둘이 아닌 혼자였다. 하지만 잦은 출장과 회의로 시간을 내기 쉽지 않았다. “모임 날짜를 자꾸 미루니 멘티들에게 미안하더군요. 어떻게 하나 생각하다 아내가 떠올랐습니다. 상담학 박사 학위를 받은 아내가 교육에선 저보다 전문가인데 등잔 밑이 어두웠던 거죠(웃음).”
엄정희 교수가 “함께 멘토링을 하게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며 말을 받았다. “아들이 있었는데 먼저 하늘나라에 갔어요. 낳은 아들은 아니지만 멘티들 역시 다 내 자식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습니다.” 엄 교수는 담담하게 아픈 사연을 이야기했다.
이 회장 부부는 25년 전 사고로 아들 성주씨를 잃었다. 당시 아들의 나이는 아홉 살이었다. 멘티들에게 ‘아는 얘기냐’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인다. 이 회장은 어두운 가정사가 언론에 알려진 것에 부담을 느낀다고 했지만 엄 교수는 “내 가정의 역경이 젊은이들이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면 괜찮다”고 말했다.
부부는 멘토링에서 아버지, 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다. 멘토링에서 의견 충돌이 없었는지 묻자 엄 교수는 “오히려 부성과 모성이 균형을 이뤄 서로 보완해준다”고 말했다. “아픔을 들어주고 이해하면서도 충고할 것은 해야합니다. 주로 제가 이해하는 역할을 맡고 이 회장(그는 남편을 이렇게 불렀다)이 충고하는 역할을 하죠.”
박선영 멘티가 “교수님은 연애 코칭을 해주고 회장님은 한국의 경제사를 가르쳐주거나 기업관, 사회공헌 활동과 관련한 얘기를 해준다”고 덧붙였다. 부부의 다른 성격도 상호보완 작용을 한다. 엄 교수는 사근사근 부드럽게 말하는 편이지만 이 회장은 직언을 서슴지 않는다. 이 회장은 “너무 직설적이다 싶을 때는 아내가 슬쩍 끼어든다”고 말했다.
멘티들에게 다양성과 포용성 배워
이들이 1년 동안 함께 고민한 주제는 ‘디자인 유어 라이프(Design your life)’ 즉, ‘나의 인생’이다. ‘나는 누구인가’ ‘진로 방향 찾기’ ‘행복한 가족과 나의 역할’ ‘행복한 대인관계와 대화법’ 등 소주제를 나눠 토론·발표를 했다. 멘토링 모임 이름도 ‘멘토링에 와서, 새롭게 되어, 세상에 나간다’는 뜻으로 ‘캄(come)비(be)고(go)’라 지었다. 이 회장 부부는 올해 2월 캄비고 멘티들과 나눈 생생한 이야기를 『청춘을 디자인하다』는 책으로 펴냈다.
이 회장은 “인생을 농구경기에 비유한다면 멘티들은 1쿼터가 끝나고 2쿼터를 시작하기 직전 단계”라며 “이때 인생에 대해 얼마나 더 고민하느냐,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청춘들이 할 일은 ‘검색’이 아닌 ‘사색’”이라고 덧붙였다. 엄 교수는 “인생의 주기마다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며 “청년기는 자아 정체성, 삶의 가치, 진로상담, 나의 꿈, 리더십을 고민할 시기”라고 말했다. 여기서 잠시 멘티들의 멘토링 후기를 들어봤다.
“선생님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전공 공부에만 매달렸어요. 왜 교사가 되고 싶은지는 고민해 본 적이 없었죠. 멘토링으로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가치를 발견했고, 든든한 나침반이 하나 생긴 기분입니다.”(조윤경)
“악기를 시작한지 8년 만에 손목에 염증이 생겨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 멘토링을 시작했어요. 새로운 마음가짐을 불어 넣어 주었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생겼어요.”(이슬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할지 답을 찾기 힘들었어요. 멘토링에서 인생의 시야를 넓혔고 다양한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폭넓은 분야를 이해하게 됐습니다.”(우영찬)
멘티들만 배운 게 아니다. 엄 교수는 “다양성과 포용성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기성세대는 틈만 나면 지역, 출신학교, 배경, 경제력에 따라 편을 나누려 들지만 젊은 세대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포용력이 강하다”고 말했다. 이 회장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국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좌우가 아니라 국민이라는 사실이 중요한데 기성세대는 모든 문제를 적군과 아군으로 나눠 생각하려는 면이 있어요. 젊은 세대가 인내심이나 끈기는 약할지 몰라도 이들을 이기적이고 철없는 아이들로 바라보는 것은 잘못된 시각입니다.”
무엇보다 멘토링으로 진짜 아들, 딸을 얻은 듯한 기쁨을 느꼈다. 결혼 후 5년 동안 불임, 아들의 죽음, 엄 교수의 위암 투병 등 이 회장 부부는 숱한 역경을 겪었다. “책부터 경주 황남빵, 졸업 연주회 CD, 인도 봉사활동·베트남 연수 때 사 온 기념품까지 선물을 참 많이 받았지만 올해 2월 무의도로 1박2일 워크숍을 갔을 때 선물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엄 교수의 말이다. 멘티들은 워크숍에서 부부를 위한 작은 공연을 마련하고, 직접 제작한 감사 동영상으로 감동을 줬다.
“내 20대 때 고민은 결혼 문제”
이 회장은 멘토링을 하면서 인생을 되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20대의 이 회장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뭐든지 맡겨만 주면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자신감은 어린 시절 부모님이 운영하는 정미소와 솜틀공장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며 길렀다. 경북 칠곡에서 7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이 회장은 어릴 때부터 기계를 돌리고 배달을 하며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시골에서 창의성, 모험심, 열정을 배웠다”고 말했다.
1970년 삼성그룹에 공채로 입사했을 때가 스물넷, 멘티들과 비슷한 나이였다. 이 회장은 제일모직에 발령 받았고 6개월 동안 복사만 했다. 복사하러 입사했나 회의가 들었지만 한 부 한 부 최선을 다한 결과 그는 ‘복사의 달인’이란 별명을 얻었고, 1년 후 주요 사업부인 기성복 사업 기획팀에 배치됐다. 일에 관한 한 이 회장은 항상 자신이 있었다.
20대의 이 회장을 고민에 빠뜨린 문제는 다름 아닌 배우자 선택과 결혼이었다. 젊고 잘나간다고 소문이 나 중매가 많이 들어왔지만 이 회장은 당시 비서실 선배였던 손병두 KBS 이사장이 소개해 준 엄 교수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 엄 교수 역시 이 회장이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가 국세청장과 삼미그룹 부회장을 지낸 엄 교수 집안의 반대가 문제였다. 이 회장은 자신감과 정직함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엄 교수의 어머니는 이 회장의 ‘설득’에 결국 결혼을 승낙했다.
항상 어려움을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로 만들어 온 이 회장의 멘토는 누굴까. 그는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배우기보다 여러 사람의 장점을 하나씩 배웠다”며 인생 주기별 멘토를 소개했다. “어릴 때는 ‘걸리버 여행기’의 걸리버가 멘토였습니다.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게 대단하잖아요. 죽는 날까지 이웃에게 헌신한 슈바이처 박사도 멘토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99년에 홈플러스를 창립하면서 사회공헌 부서를 개설하고 ‘e파란’이라는 환경 캐릭터를 만든 것이 슈바이처 박사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회사에 입사한 후에는 어떤 일에든 최선을 다하는 철강왕 카네기를 멘토로 삼았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게서 비전과 집요함을,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에게는 늘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배웠다.
어린 시절 멘토는 여섯 형
진정한 멘토는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 이 회장의 여섯 형이다. “원칙주의자인 큰 형님,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둘째 형님, 신뢰를 가르쳐 준 셋째 형님, 희생 정신의 표본인 넷째 형님, 신념과 배짱을 알려준 다섯째 형님 모두 제 성장기에 많은 영향을 줬어요. 특히 세 살 위의 여섯째 형님은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입니다. 굉장한 집념의 소유자였죠.”
멘티 이승한이 자라서 멘토가 되었듯 캄비고 멘티들 역시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박선하 멘티는 초등학생들에게, 대학원에 진학한 이진욱(25) 멘티는 대학 후배들에게 경험을 담은 조언을 해주고 있다. 또 멘티들은 서로의 멘토이기도 하다. 엄 교수는 “형, 누나들이 지금은 군대에 있는 정준교(21) 멘티를 챙겨주는 것을 보면 참 뿌듯하다”며 웃었다.
얼마 전, 이 회장 부부의 3기 멘티가 선발됐다. 이 회장은 “3기를 받으면 1, 2기 멘티와 멀어질까 고민했지만 멘토링이 끝나도 정기적으로 만나기로 했다”고 말했다. 엄 교수는 “1~3기 멘티들과 한국컴페션에서 함께 봉사활동을 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부부는 “바쁘고 신경 쓸 일이 많지만 멘티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아들, 딸을 얻은 것 같이 좋다”며 “다른 CEO들에게 멘토링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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