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rope BOSNIA] 폐허 속의 사랑
[Europe BOSNIA] 폐허 속의 사랑
종군기자들은 자신이 처음으로 참전한 전쟁과 사랑에 빠진다는 말이 있다. 내가 그랬다. 1992년 젊은 기자였던 나는 보스니아 내전 초기에 그곳에 도착했다. 숲과 산, 굽이치는 시냇물이 아름다운 나라였지만 포격으로 허물어진 회교사원의 잔해 속에 시꺼멓게 그을린 첨탑(minaret)들이 나뒹굴었다.
사라예보는 이번주로 포위 20주년을 맞는다. 1992년 4월 5일 홀리데이 인 호텔 안에 있던 세르비아계 저격병들이 거리에서 평화시위를 벌이던 여성 두 명을 살해하면서 사라예보의 포위(the siege of Sarajevo)가 시작됐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면서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가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대세르비아(a greater Serbia)’의 꿈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던 세르비아군이 사라예보를 포위하고 도시를 굽어보는 산속 평원에 수천 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그들은 3년이 넘도록 사라예보에 대포와 박격포, 로케트 공격을 퍼부었다. 그뿐 아니라 도시 내부로 저격병(sniper)을 침투시켜 주민들을 살해했다.
1995년 내전이 끝날 때까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난 사라예보에 머물렀다. 시대에 뒤진 포위 공격이 현대 도시를 어떻게 황폐화시켰는지(how a medieval siege laid waste to a modern city)를 기록하면서 깊은 사랑에 빠졌다. 사람이 아니라 사라예보라는 도시와 말이다.
사라예보는 산 계곡을 따라 자리잡고 있다. 공산주의 시절의 콘크리트 빌딩부터 꽃 문양의 치장벽토(stucco garlands) 부조가 새겨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풍의 건물들, 오스만 왕국의 500년 통치를 상징하는 회교사원의 첨탑과 아랍식 재래시장(souk)들까지 다양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낭만적인 풍경 못지 않게 내게 감동을 준 건 사라예보 주민들의 용기였다. 전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 라도반 카라지치가 이끄는 광포한 군인들에게 포위된 그들은 포격과 저격병의 공격에 용감하게 맞섰다.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소속 신문사로부터 귀국 명령이 떨어졌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전쟁 동안 사랑에 빠진 사람은 나뿐이 아니었다. 유혈참극 속에서도 사랑이 피어났다. 인디라 소르구츠와 그녀의 남편 파로 쿠추크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면서 만났다. 두 사람은 각자가 겪은 가족의 비극으로 유대감을 갖게 됐다. 당시 18세 학생이었던 인디라는 하나밖에 없는 자매를 자동차 사고로 잃었다. 제빵사(a pastry chef)였던 파로는 5년 전 부인이 딸 아이다를 출산한 뒤 세상을 떠난 데다 아이다마저 포격으로 사망했다. 아이다는 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첫 번째 어린이였다. “살아갈 의미가 없었다(I couldn’t see the point of living)”고 파로는 당시를 회상했다.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때 인디라를 만났다.”
인디라의 부모는 그녀가 사라예보를 떠나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그곳에 남았다.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인디라는 말했다. 인디라는 군 인사처(military personnel)에서 일했고, 파로는 제10 산악사단의 장교였다. 치열한 전투로 두 사람이 한 막사에서 잠을 자야할 때도 있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플라토닉했다. 적어도 처음엔 그랬다. “처음 두 달 동안은 키스도 하지 않았다”고 파로는 말했다. “하지만 그녀와 마침내 키스를 했을 때 생애 첫 키스 같은 느낌이었다.”
인디라 가족이 살던 집이 포격으로 파괴되자 그녀는 구시가지에 있던 파로 부모님의 집으로 이사했다. 그곳 역시 폐허나 다름없었다. 깨진 창문은 유엔군이 나눠준 비닐시트로 막아놨다. 하지만 전쟁 속에서도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인디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린 어차피 포위 속에서 살았지만 가족의 반대에 부닥쳐 또 한번 포위됐다(we had our own siege within the siege).”
파로가 인디라에게 프로포즈했을 때 그녀의 가족과 친구들은 반대했다. 식량은 배급에 의존해야 했고 물과 전기 사정도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전쟁 때문에 당장 결혼해선 안 된다고 했다”고 인디라는 말했다. “아버지도 우리에게 기다리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전쟁이 우리의 삶을 중지시키도록 놔둬선 안 된다(we shouldn’t allow the war to stop our life)고 생각했다.”
레지스탕스 대원이었던 그들은 담배로 봉급을 받았다. 담배는 전시의 실질적인 통화(the defacto currency)였다(담배 한갑은 약 50달러, 또는 밀가루 1㎏의 가치가 있었다). 파로는 담배를 팔아 결혼식 때 쓸 송아지 고기를 구했다. 인디라는 결혼식 때 초록색 코트를 입고 빌린 모자를 썼다. 그들은 1993년 7월 결혼했다. 제10 산악사단은 신혼여행을 대신해 그들에게 1주일 간 휴가(a week’s leave)를 주고 페타 치즈와 정어리 통조림(전시에 이 정도면 훌륭한 잔치 음식이었다)을 선물했다.
인디라와 파로는 폐허 속에서 사랑을 찾았다.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포위된 사라예보의 생활은 외롭고 쓸쓸했다. 물과 연료, 식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저격병의 눈에 띌까 두려워 밖으로 구하러 나갈 수도 없었다. 저격병의 습격 위험이 있는 도시 곳곳의 길목에는 작은 판지로 만든 경고판(‘저격병 조심’)이 붙어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다. 주민들은 도시 안에 갇혀버렸다. 한 친구는 “우린 동물원의 동물 같은 신세가 됐다(We’ve become a zoo)”고 말했다.
사람들은 매일 배수탑(the water standpipes) 앞에 줄을 섰다. 할머니들이 플라스틱 용기에 물을 받아 손수레에 싣고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이 물을 아껴서 몸을 씻고, 음식을 만들고, 목을 축이고, 변기 물을 내리는(flushing the loo) 데 이용했다. 땔감을 구할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먼저 가구를 태웠고, 그 다음엔 책을 태웠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산속의 겨울 추위로 죽어갔다. 공동묘지의 비석들을 보면 1993년이 특히 심했다. 노인과 젊은이 할 것 없이 많은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포격과 추위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음으로 내몰았다(were indiscriminate in meting out death).
사라예보 포위 상황을 보도하면서 알리야 호지츠라는 사람을 알게 됐다. 기자들은 그를 ‘포위 사망자 통계원(the tallyman of the siege)’이라고 불렀다. 어느 야구팀의 운전기사로 일하던 호지츠는 마지못해 시체공시소(morgue)의 감독 일을 맡게 됐다. 어느 날 그는 그곳에서 차가운 대리석 판 위에 놓인 자기 아들(이브라힘)의 시체를 발견했다. 당시 23세였던 이브라힘은 포격으로 사망했고 그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하지만 파괴 속에서 창조성이 꽃을 피우기도 했다. 사람들은 동물 기름을 끓여 비누를 만들었다. 한 임학(forestry) 교수는 전선에서 딴 과일로 담근 술을 팔아 가족을 먹여살렸다. 그는 과일을 발효시킨 다음 포격으로 부서진 대학교 실험실 잔해 속에서 찾아낸 증류기(a still)로 증류해 술을 만들었다. 언젠가 포격을 피할 곳을 찾다가 그 교수의 아들 보보 크르스티츠를 만났다. 그는 아파트 1층에 살았는데 나를 집안으로 데려갔다. 식품저장실(larder) 안에는 상처 입은 비둘기 한 마리가 죽어가고 있었다. 보보는 창밖에 앉아있던 그 비둘기를 공기총으로 쏴서 잡았다. 그는 스토브에 장작불을 지피고 폐허가 된 이웃집에서 가져온 파이프를 녹이고 있었다. 총에 쓸 총알(pellet)을 만드는 중이었다. 그는 녹인 납을 진흙으로 만든 틀에 부어 총알을 만들었다. 그날 밤 우리는 비둘기 고기를 먹었다. 맛이 괜찮았다. 고기가 귀하던 시절 훌륭한 접대였다.
나는 사라예보를 여러 번 들락거렸다. 1994년 가을에는 런던에 살던 한 보스니아 출신 의사가 사라예보의 두 할머니에게 약과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할머니들은 공동묘지 건너편 아파트에서 단둘이 살았다. 덥고 끈적끈적한 여름(a hot and sticky summer)이 막 지났을 때였는데 할머니들은 다가올 겨울을 몹시 걱정했다. “겨울이 다가오는데 어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할머니들은 공손하면서도 끈질기게 이 말을 반복했다.
내가 할머니들을 한참 후에야 다시 찾아갔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생각된다. 이듬해 1월 다시 그곳에 갔을 때 할머니들은 전쟁의 공포와 추위에 지쳐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the fear and the cold had driven them mad).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나는 함께 일하던 통역사에게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주고 할머니들이 음식과 연료를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내가 준 몇백 마르크로는 할머니들이 겨울을 나기에(to see them through the rest of the winter)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봄에 사라예보로 돌아갔을 때는 두 할머니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그리고 데이턴 협정으로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됐다. 산속의 광포한 군인들은 철수했다. 하지만 전쟁은 사람들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놨다(had thrown lives off course). 가족과 친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사라예보의 축구장은 공동묘지가 됐고 홀리데이 인 호텔은 폐허로 변했다. 세르비아군은 소이수류탄을 이용한 3일간의 포격으로 보스니아 국립도서관을 파괴해 역사를 지워버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쇠퇴기에 건축된 이 무어식 건물은 검은 잿더미(a smoldering heap)가 됐고 구리로 된 멋진 지붕도 무너져내렸다. 150만 권의 장서 대다수가 불길 속에 사라졌다. 그중에는 대체 불가능한 필사본(irreplaceable manuscripts)과 희귀도서 15만 여권이 포함됐다. 그리고 주민 수만 명이 실종됐다. 일부는 난민이 됐고 일부는 영원히 사라졌다. 현재 보스니아에서는 희생자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는(identifying remains) 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보스니아 내전에서 총 10만 명이 사망했고,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최악의 학살(carnage)이다.
사라예보는 전쟁신경증에 시달렸다(shell-shocked). 세르비아군의 포위를 견뎌낸 주민 중 일부는 평화를 찾은 후에도 후유증이 심각했다. “많은 사람이 가족과 헤어져 살았다”고 파로는 말했다. “인간관계가 파괴됐다.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또 물질적으로 전쟁 이전에 가졌던 것을 되찾으려 했다. 하지만 사라예보는 세상과 단절된 채(shut off from the world) 진공 속에서 3년 반을 보냈다.”
2003년 소설 ‘영화 속 소녀(The Girl in the Film)’의 집필을 위해 조사작업차 사라예보를 다시 방문했을 때 무척 마음이 아팠다. 실업률이 40%에 이르는 데다 부정부패로 수백만 달러의 원조금이 낭비됐다. 조직범죄로 방향을 튼 전범들만 잘 먹고 잘 사는 듯했다. 집필을 끝내고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 그곳을 떠났다. 예전에 봤던 사라예보와는 영 딴판이어서 깊은 환멸감이 몰려왔다. 난 사라예보가 아니라 전쟁 그 자체와 사랑에 빠졌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사라예보 포위 20주년을 맞아 다시 찾은 이 도시는 활기를 되찾은 듯 보인다. 내전 당시 많은 나무가 잘려나가고 불탔기 때문에 이곳의 나무는 거의 모두 1995년 이후 심은 것이다. 한때 연기와 쓰레기 태우는 냄새, 화약 냄새가 진동하던 사라예보에서 이제 봄 내음이 풍긴다.
요즘은 거리가 외국인 관광객으로 붐비고 커피숍과 화랑, 극장에도 손님이 넘쳐난다. 사라예보는 1990년대의 프라하나 1920년대의 파리 같은 곳이 돼가고 있다. 젊은이들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공부를 하려고 이곳으로 몰려든다. 자동차로 4시간만 가면 지중해를 볼 수 있고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스키 리조트가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조직범죄는 감소했지만 경제는 활기가 없다(the economy is lackluster).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다가가기 쉬운 곳이기도 하다. 설비가 잘 갖춰진(well-appointed) 시내 아파트의 월세 비용이 200달러 남짓이고, 호텔 에우로파 카페의 커피 한 잔 가격은 1달러도 채 안된다. 또 5달러면 식당에서 근사한 식사를 할 수 있다. 게다가 현지인들은 매력적이고 아직도 대다수 바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다.
호지츠는 시체공시소 일을 그만두고 옛 전선 근처에 농장을 짓고 양을 키운다. 그의 아들이 사망한 뒤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다. 그 아이의 이름은 죽은 아버지를 기려 이브라힘으로 지었다. 이제 그 아이는 19세 대학생이 됐다. 호지츠에 따르면 자기 아버지를 빼닮았다. 전쟁의 기억이 거의 없는 이브라힘은 희망에 가득차 있다.
내 생각에 사라예보가 지닌 불굴의 정신(indomitable spirit)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은 인디라와 파로다. 현재 40세인 인디라는 사라예보에서 가장 성공한 극작가다. 그녀의 연극 ‘나는 험담꾼(I’m the Gossip)’은 무대에 오른 지 1년이 됐는데 객석이 늘 꽉 찬다. 자신의 신문 칼럼과 베스트셀러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보스니아판 ‘섹스 앤 더 시티’로 불릴 만하다. 인디라는 이 작품을 올해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출품할까 생각 중이다. 그리고 올해 53세가 된 핸섬한 외모의 파로는 보스니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어린이책 전문 작가다. 그는 시내에 있는 유명 서점 ‘코넥툼’의 점장이기도 하다. 전쟁이 두 사람을 맺어준 뒤 20년이 흘렀지만 이들은 여전히 서로를 사랑한다.
[필자는 언론사 해외특파원 출신의 소설가 겸 극작가다. 역시 작가인 남편 윌리 스털링과 함께 런던에서 산다.
번역 정경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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