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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 POLITICS] 고매함보다 실적 내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US POLITICS] 고매함보다 실적 내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훌륭한 역사책은 결코 과거만 이야기하진 않는다(A great work of history is never only about the past).

로버트 카로의 린든 존슨 전기 제4권 ‘권력의 전환(The Passage of Power)’은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페이지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세계를 떠올린다. 노조가 막강한 힘을 가졌고, 흑인용 백인용 간이식당이 따로 있던 시절이다. 그럼에도 그 세계는 다른 면으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다. 해가 바뀌어도 국가의 시급한 문제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urgent national problems go unaddressed year after year) 정부 기능의 마비로 국민이 낙담하는 상황이 지금과 다를 바 없다.

이 책은 옴짝달싹 못하던 정부가 갑자기 신속하고 단호하게 움직인 순간을 집중 조명한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아래서 3년 동안 민권 문제(the cause of civil rights)는 매우 느리게 진척됐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케네디가 피살됐고, 7개월 뒤 법적 인종차별(legal segregation)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존 F 케네디의 신비로움은 지금도 남아 있다(to this day, the mystique of John F. Kennedy lingers). 미국인의 3분의 1은 케네디를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한다. 역사가들도 일반적으로 후한 찬사(accolades)를 보낸다. 그러나 케네디는 자신이 암살당한 날까지 국내 정책에서 성과를 거의 내지 못했다. 쿠바와 베를린에서는 소련에 승리했다고 주장해도 무방할지 모르지만 국내 의회에서는 반대파에게 패했다.(in Congress, it was his opponents who had bested him). 케네디를 가장 강하게 반대한 세력은 그의 당 내부에 있었다. 보수적인 남부의 민주당 의원들이었다. 그들은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권력의 분기점을 장악했다(they controlled the switching points of power in the House and Senate).

우아한 케네디는 원대한 수사(soaring rhetoric)로 유명했지만 실적은 미미했다. 그런 화려한 말들을 실제 현실로 바꿔놓은 사람은 그의 볼품 없는 후계자(ungainly successor) 존슨이었다. 남부의 인종차별을 타파하는 법안을 의회에서 밀어붙이고, 남부의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메디케이드(Medicaid, 저소득층 의료보장)와 메디케어(Medicare, 고령자 의료보장)를 입법한 사람은 케네디가 아니라 존슨이었다. 지금까지 케네디의 이름을 달고 있는 역사적인 감세(tax cut)법안도 존슨이 통과시켰다.

카로는 2500쪽 이상에 걸쳐 강렬한 문체를 동원해 린든 존슨의 내면적인 삶을 생생하게 그려냈다(Caro has summoned Lyndon Johnson to vivid, intimate life). 카로의 무자비할 정도로 철두철미한 조사 덕분에 우리는 존슨을 당대 사람보다 더 잘 알게 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코 매력적인 그림은 아니다. 카로가 그려낸 존슨은 약자를 괴롭히는 골목대장(bully)이자 허풍쟁이(braggart), 감언으로 꾀는 사람(wheedler)이자 교묘한 막후 조정자(manipulator), 개인적으로 도덕성이 떨어지는 사람(a man of bad personal morals)이자 국정운영 윤리는 더 형편 없는 사람(worse business ethics)이다.

카로에 따르면 진보적인 이상을 더 많이 실현한 사람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포함해 미국 현대사의 어떤 정치인보다, 그리고 매력적이지만 국내 문제에서 역부족이었던 케네디보다, 바로 이 괴물 같은 인물인 존슨이었다. 카로는 인간 존슨은 혐오하지만 그의 업적은 존경해 마지 않는다. 이미 드라마로 가득한 이 이야기에서 저자 카로와 그 대상인 존슨 사이의 팽팽한 긴장은 한편의 극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존슨은 어떻게 그런 일을 해냈을까?

당혹스럽게도 존슨이 영감을 주거나 권고를 통해(by inspiring or exhorting) 그런 일을 해내지 않았다는 것이 카로의 핵심 메시지다. 대신 존슨은 정치적 힘을 동원했다. 그 규모와 무자비함은 그 전후의 다른 모든 대통령을 능가한다.

카로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려고 초점을 좁혔다. 카로가 쓴 존슨 전기 제4권인 이 책은 예상밖의 시대를 다룬다. 1959년 봄 존슨의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출마(결국 실패했다)부터 1964년 봄 그가 케네디의 국내 정책을 성공적으로 입법화한 시점까지다. 64년 존슨이 재선운동을 시작하기 직전에 이야기가 끝나기 때문에 존슨의 대통령 임기 중 가장 많은 부분은 카로의 다음 책으로 넘어갔다.

‘권력의 전환’은 존슨이 부통령으로 재직한 굴욕적인 3년과 케네디 피살 후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한 시점부터 1964년 민권법안과 ‘케네디’ 감세안을 통과시키기까지의 7개월 동안으로 나눠지며 그 각각에 동등한 지면을 할애했다. 존슨은 부통령 시절 따돌림을 당했고(isolated), 무시당했으며(belittled), 다음 선거인 64년 부통령 후보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협박까지 받았다. 그러나 케네디 피살 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다음 7개월 동안은 케네디를 비롯해 어떤 대통령도 엄두를 내지 못한 방식으로 권력을 휘둘렀다(Johnson wielded power in a way that few presidents ever have, and that John F. Kennedy never did).

카로의 책에 따르면 존슨은 케네디 피살에 따른 미국 국민의 비탄(public grief)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을 즉시 간파했다. 물론 존슨이 “좋은 위기를 낭비하지 마라(Never let a good crisis go to waste)”고 공개적으로 외칠 정도로 무모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 격언에 입각해 행동했다.

존슨 대통령은 첫 의회 연설에서 국가적인 케네디 애도 정서를 자극했다. “오늘 이 자리에 서지 않기 위해서라면 나의 모든 것을 흔쾌히 포기했을 텐데 사정이 그러지 못해 유감입니다(All I have I would have gladly given not to be standing here today).” 그 다음 그는 케네디가 간헐적으로 추진한 여러 정책 중 하나를 골라 추도식에 딱 들어맞는 명분으로 삼았다. 민권법이었다. 민권법을 향한 존슨의 열정은 케네디보다 훨씬 강했다. “케네디 대통령이 추진하려고 그토록 오래 싸웠던 민권법안을 가능한 가장 빠른 시일에 통과시키는 것보다 그를 기리는 더 나은 방법은 없습니다.” 케네디가 그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그토록 오래 싸워야 했던 것은 존슨 자신만큼 효과적으로 싸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언외의 뜻이 포함된 말이었다.

수년 뒤 존슨은 전기작가 도리스 컨스 굿윈에게 이렇게 말했다(카로가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다). “역사책에서 내가 배운 것은 순교자는 명분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Everything I had ever learned in the history books taught me that martyrs have to die for causes). 존 케네디는 죽었다. 하지만 그의 ‘명분’이 그리 분명하지 않았다(But his ‘cause’ was not really clear). 그건 내 임무였다. 나는 고인의 정책을 취해 그것을 순교자의 명분으로 만들어야 했다(I had to take the dead man’s program and turn it into a martyr’s cause).”

존슨은 명분을 선택한 뒤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시작했다(Johnson started to assert his authority). 1960년대 초 의회를 지배한 보수파 민주당 의원들은 케네디가 허약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케네디에게 압력을 가해 대개 자신들의 뜻을 이뤘다. 존슨은 취임하자마자 반격할 방법을 모색했다. 대소련 곡물 수출을 둘러싼 싸움에서 기회를 찾았다. 의회의 보수파는 그런 판매를 승인하는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는 법안을 도입했다.

카로는 책에 이렇게 적었다. “존슨은 ‘그 법안을 묵사발로 만들어야 해(I hope that bill gets murdered)’라고 위협적으로 말했다. 그는 과반수의 표를 확보한 뒤에도 압도적인 표차로 그 법안을 기각시키려고 대통령 집무실에 앉아 상원의원 한 명 한 명에게 전화를 걸어 회유하고(cajoling), 협박하고(bullying and threatening), 애교를 떨었다(charming).” 왜 그랬을까? 자신은 케네디처럼 허약하지 않다는 점을 의회에 가르치기 위해서였다(to teach Congress the lesson that Johnson could not be rolled).

교육 효과가 있었다.

그러자 존슨은 의회에서 독자적인 연합전선 구축에 돌입했다. 미국 의회는 1938년 이래 대부분 공화당과 민주당이 다수당을 번갈아 맡았지만 언제나 보수파가 압도적이었다(it was always a conservative majority). 남부 민주당 의원들과 중서부 공화당 의원들이 손잡고 민주당의 북부 출신 의원들과 공화당의 캘리포니아 지역 의원들을 몰아붙였다.

존슨은 민권법을 통과시킬 목적으로 공화당과 진보적 민주당 의원으로 구성된 새로운 다수 세력을 만들었다(민주당보다는 공화당 의원의 비율이 높았다). 무엇보다 에버릿 더크슨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를 구워삶을 필요가 있었다. 존슨은 더크슨의 지지를 얻으려고 기꺼이 대가를 치렀다. 통화 녹취록에 따르면 존슨은 민권법안의 상원 책임자 휴버트 험프리 의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더크슨이 활약할 기회를 주세요. 그가 늘 국민의 호감을 사도록 해야 합니다.”

1964년 봄 더크슨은 공화당 내부의 보수파 압력으로 민권법안에 미온적인(lukewarm)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도 존슨과 험프리는 그를 적대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험프리는 더크슨을 설득하려고 한층 더 노력했다. NBC 방송의 시사대담 프로그램 ‘밋 더 프레스(Meet the Press)’에서 험프리는 이렇게 말했다. “더크슨은 자신의 당보다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Dirksen is a man who thinks of his country before he thinks of his party). … 더크슨 상원의원은 결정의 순간에 닥치면 적극적으로 나서리라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 방송이 나간 뒤 존슨은 곧바로 험프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 잘 했어요(Boy, that was right). … 아주 잘하고 있어요(You’re doing just right now). 계속 그렇게 하세요(You just keep at that). … 더크슨을 찾아가 만나고 그와 술을 마시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세요!”

존슨은 공화당 반대파에 구애를 하는 동시에 다루기 힘든(refractory) 민주당 의원들의 지지도 확보했다. 케네디 행정부의 진보적인 케인즈 학파(liberal Keynesians)는 대폭적인 감세로 경제성장을 촉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관련 상원 위원회를 장악한 남부 보수파는 케인즈의 이론을 믿지 않았다. 아울러 그들은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에게 득이 되는 감세보다 특정 지역구를 위한 조세의 허점(tax loopholes)을 선호했다.

그 남부 보수파 중 가장 고집이 센 의원(the most obdurate of those Southern conservatives)이 해리 버드 상원 금융위원장이었다. 버드는 한번도 “노(no)”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다만 행동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케네디 팀은 버드의 마음을 서서히 돌리고 있다고 확신하고, 결국에는 1964년 11월 전에 그가 행동에 나서줄 것이라고 판단했다. 존슨은 그들의 착각이 심하다는 사실을 알았다(Johnson knew they were kidding themselves).

존슨은 버드와 함께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수년 동안 좋은 관계를 구축했다(Johnson had cultivated Byrd for years). 버드에게 심할 정도로 알랑거리고(flattered Byrd outrageously), 버드의 딸 장례식에도 참석했다(참석한 상원의원은 그를 포함해 두 명뿐이었다). 존슨은 버드의 요구 사항을 알아냈다. 예산의 지출을 1000억 달러 아래로 줄이면 버드는 감세에 동의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진보적인 케인즈 학파는 버드의 예산삭감 요구를 경멸했다. 그러나 버드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감세안은 물 건너갈 수밖에 없었다. 버드는 감세안을 통과시킬 힘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래서 존슨은 행정부 내의 반발을 무마시키고 예산삭감을 밀어붙였다(so Johnson made it happen).

존슨은 상원의원 중 첫 번째로 해리 버드를 백악관 만찬에 초청했다(백악관 차까지 보내 모셨다). 결국 버드가 요구한 예산액에 도달하자 존슨은 그 소식을 이렇게 전했다. “해리, 놀라운 소식이 있어요(I’ve got a surprise for you, Harry). 그 우라질 예산을 1000억 달러 아래로 줄였어요 … 훨씬 아래로 말이요(I’ve got the damn thing down under one hundred billion … way under). 이제 979억 달러밖에 안 되지요. 귀하가 미국 대통령에게 압력을 넣어 예산을 줄였다고 친구들에게 말해도 좋아요. 그 다음 대통령의 감세를 허용해 주시오(Now you can tell your friends that you forced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to reduce the budget before you let him have his tax cut).”

승자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패자처럼 보인다 해도 존슨은 기꺼이 그 대가를 치를 용의가 있었다(If the price of being the winner was to look like the loser, Johnson would pay). 카로는 책에 이렇게 적었다. “존슨은 예산을 둘러싼 싸움의 본질이 되는 현실을 즉시 깨달았다. 버드의 요구사항을 들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고집 불통인 해리 버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그의 애정과 신뢰를 이용하는 능력이었다. 그 두 가지가 의회의 교착상태를 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1월 22일 전에는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었다.”

그런 인간적인 지각은 보기 드문 재능이다(That kind of human knowing is a rare gift). 존슨의 막강한 정적이던 로버트(바비) 케네디는 그와는 아주 다른 재능을 가졌었다. 바비 케네디는 존슨을 두고 경멸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사람들의 재능을 이용하는 방법을 모른다. 사람들이 가진 최선을 찾아 활용하는 방법 말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사람들의 약점을 찾아내 이용하는 방법(how to ferret out and use people’s weaknesses)을 잘 안다.”

카로는 바비 케네디의 언급 중 존슨이 사람들의 최선을 활용할 줄 모른다는 부분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약점을 이용하는 그의 능력에 관해선 충분히 동의한다. 존슨은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았다. 또 규칙도 잘 알고 규칙을 활용하는 방법도 잘 알았다.

카로의 이야기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교훈이 한 가지 더 있다(이 책에서는 자세히 설명되지 않고 제5권에서 독자를 기다린다). 현 시대의 정치에 가장 잘 적용될 듯한 부분이 바로 이 마지막 교훈일지 모른다.

존슨은 반대 세력을 격분시켜 스스로 그 분노 때문에 몰락하도록 만들었다(by infuriating ideological opponents into self-destructive fury). 바로 그런 전략으로 1965~66년 회기에 투표권법, 메디케어, 메디케이드 등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 존슨이 내건 국내 정책의 기조로 가난과 인종차별이 없는 복지 사회를 일컫는다)’의 수많은 정책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1963~64년에도 입법에서 상당한 성과를 올렸지만 그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승리였다. 1963~64년과 1965~66년이 그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가 뭘까? 간단히 말해 존슨에 반기를 든 보수파의 엄청난 오산(the calamitous miscalculations)이었다.

1964년 2월 초 민권법안은 마침내 하원 의사운영위원회(House Rules Committee, 인종차별주의자인 남부 의원이 위원장이었다)를 벗어나 하원 본회의에 상정됐다. 그때 공화당의 대선후보 유력주자는 넬슨 록펠러 뉴욕 주지사였다. 그러나 공화당 보수파는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허망했다. 뉴딜 정책이 나온 이래 선거 때마다 공화당은 보수파가 선호하는 후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정치의 일반적 기준으로 볼 때 골드워터는 가망이 없을 뿐더러 심지어 무모한 후보였다.

그러나 민권법 입법 과정의 놀라운 진전으로 보수파가 격분하면서 정치의 일반적인 기준이 틀어졌다. 공화당의 록펠러와 윌리엄 스크랜턴 후보는 민권법을 강력히 지지했고 골드워터는 반대했다. 골드워터를 비롯한 공화당 상원의원 6명과 남부 민주당 상원의원 21명은 막판까지 민권법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골드워터는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후에도 고집스럽게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물론 그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다. 골드워터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의원 선거에서도 민주당이 압승했다(이미 상당한 차이로 다수당이었던 민주당은 하원 32석, 상원 2석을 추가했다). 대부분 북부와 중서부의 온건한 교외지역에서 공화당 후보들이 패하고 그 자리를 진보적인 민주당 의원들이 차지했다. 다수를 확보한 민주당 진보파는 뉴딜 이후 처음으로 의회를 마음대로 끌어나갈 수 있게 됐다(they could run Congress with a free hand).

여기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향한 말없는 비판이 녹아 있다는 점을 감지하기는 어렵지 않다(It’s hard not to detect in these pages an unspoken critique of Barack Obama). 물론 오바마는 존슨처럼 반대파를 격분시키는 재능이 있다(그게 재능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카로가 너무도 생생하게 묘사하는 존슨의 권력활용 수완은 오바마에겐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존슨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반대파를 상대로 뻔뻔스러운 애정 공세를 펴고, 지지자들의 비위를 끊임없이 맞추고, 회유와 협박을 능란하게 구사했다. 이런 저급한 기술로 존슨은 대성공을 거뒀다(the low arts that led to Johnson’s high success).

버락 오바마처럼 오만할 정도로 고매한 지도자(high-minded leader)는 존슨식의 국정운영에 손사래를 치고 케네디식의 수사적인 위엄(Kennedyesque rhetorical grandeur)을 선호하는 게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대통령은 명언집에 멋진 어구들을 제공하지만(such presidents contribute great phrases to quotation books) 정작 법령집에 영구히 남는 법을 추가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they tend not to add lasting laws to the statute books). 역사적인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번역 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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