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cer’s Spanish Fury 스페인 축구의 힘 ‘푸리아’
Soccer’s Spanish Fury 스페인 축구의 힘 ‘푸리아’
1939~75년 스페인 프랑코 총통의 독재 시절 정권은 여가활동으로 축구를 적극 장려했다. 적에게 이용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말이다. 적이란 공산주의자, 비밀결사 프리메이슨 단원들, 자유사상가(freethinkers), 카탈루냐와 바스크 민족주의자 등 다양했다.이들 대부분은 성실한 사람으로 그들의 축구 클럽이 현지의 문화적 정체성에서 기원했다.
이것이 내가 성장하던 시절 스페인 축구에 정치성을 부여했다. 그에 따라 축구 팬들이 민주주의자와 파시스트로 갈렸다.프랑코는 경기장 안팎에서 무자비했다.그는 1939년 스페인 내전이 끝날 무렵 부상했다. 승리의 순간에도 그에게서 아량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철권통치로(with an iron grip) 나라를 장악하기로 작정했다.
스페인사람들은 그와 그의 반란군을 계속 지지하는 사람과 민주적으로 선출된 공화당 정부편에 서서 그에 맞서 싸운 사람들로 나뉘었다. 전자는 일자리, 사회복지 혜택, 새 집으로 보상을 받았다. 후자는 투옥, 처형, 추방 등의 사회적 배척을 당했다.
문화적으로 스페인은 철저히 통제 받는 운동장으로 전락했다. 시골에서 대도시 특히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로 상경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났다. 라디오에 이어 TV가 보급되면서 축구가 투우 경기를 제치고 가장 인기 있는 여가활동으로 자리잡았다.
집권세력은 정권유지의 프리즘을 통해 스포츠를 바라봤다. 위험한 정치적 성격을 띤 반정부 여론을 해소하는 수단이었다. 그 시절을 가리켜 스페인 축구계의 가장 저명한 현지인 평론가 알프레도 렐라뇨는 이렇게 썼다.
“축구는 계속 성장했다. 스페인은 전후 재건을 시작했다. 가능한 한 오랜 시간 일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거의 없었다. 폐허를 복구하고 일요일에는 축구 경기를 보러 갔다. 힘들고 춥고 물자가 부족하고 여가시설이랄 게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집마다 라디오가 한 대 씩(TV가 보급되기 전이었다), 동네마다 극장이 한 곳씩 있었고 축구가 있었다. 사이클링 경주, 권투경기, 투우 경기가 있었지만 뭐니뭐니해도 축구가 인기만점이었고 그밖에는 별로 없었다.”1920년대 스페인의 첫 프로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바스크 지방 아틀레틱 빌바오의 직접적이고 공격적이고 활기찬 플레이 스타일이 표준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런 스타일을 의미하게 된 ‘푸리아(furia, 맹렬함)’의 원조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바스크 사람들이 그런 스타일의 플레이를 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하나는 그들이 다른 스페인 사람들보다 키가 더 크고 육체적으로 더 강인했기 때문이
다.
또 하나는 스페인의 상당 지역이 반 사막인 반면 그들은 습기가 많은 환경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과거 스페인 축구 초창기엔 잔디 깔린 운동장이 거의 없었다.
당시 스페인 사람들은 공격적이고 활기찬 축구 스타일이 영국, 그리고 스페인 클럽으로 건너온 잉글랜드 코치들에게서 비롯됐다는 점을 기꺼이 인정했다. 하지만 프랑코주의 아래서 상황이 바뀌었다. 푸리아 에스파뇰라(Furia Española, 스페인의 맹렬함)가 정권의 군국주의적 용어가 됐다.
‘라푸리아(맹렬함)’가 새롭게 정의되고 국가 프로파간다 조직에 의해 새로 태어난 스페인의 주요 강점 중 하나로 홍보됐다. 그것은 과거 스페인의 제국주의 시절에 탄생한 정복과 영광의 신화를 되살렸다. 가령 가톨릭왕들이 이룬 이슬람 왕국 그라나다의 회복,초창기 콘퀴스타도르(정복자)들이 개척한 스페인령 아메리카 등이다. 문학적 캐릭터 돈키호테를 통해 신화가 된 국가적 이미지에도 뿌리를 뒀다.
돈키호테의 숭고한 목적의식 앞에 그의 무모함과 실패는 잊혀졌다.그는 비타협 정신의 화신이었다.스페인의 파시스트 정당인 팔랑헤당 신문 아리바는 1939년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가 승자로 떠오른 몇 달 뒤 이렇게 썼다.
“푸리아 에스파뇰라는 스페인 생활의 모든측면에 어느 때보다 더 진하게 녹아 들었다.스포츠 분야에서는 축구에서 푸리아가 가장 잘 드러난다. 축구는 스페인 민족의 박력이 완벽하게 표출될 수 있는 스포츠다. 대체로 국제 경기에서 더 좋은 기술을 보유하지만 공격성이 부족한 외국 팀을 압도한다.” 쉽게 말해 그라운드를 전쟁터로 여기고 선수는 군인처럼 플레이를 해야 했다.
용기, 희생그리고 무엇보다도 적에 대한 육체적인 압박이 필요했다. 페어플레이 정신은 물론 기술이나 창조성은 그들의 무기가 아니었다.프랑코는 라 푸리아라는 표현을 좋아했다. 스페인의 본질적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정권에 동조적인 바스크 출신선수가 그 정신의 상징이 됐다.
1950년 브라질 월드컵 조별예선(group stage)에서 스페인이 잉글랜드를 상대할 때였다. 문제의 선수는 아틀레틱 빌바오의 텔모 사라였다. 스페인 6개 선수권 대회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선수였다. 그는 3년 전 리나레스의 투우장에서 사망한 스페인의 전설적인 투우사 마놀레테가 달성한 국민적 우상의 지위에 이미 오른 상태였다.국민들 사이에 사라는 다리가 셋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셋째 다리는 그의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머리였다. 하지만 사라는 머리가 아닌 발로 스페인의 결승골을 만들어냈다. 아구스틴 가인자가 측면에서 올린 크로스를 받아(off a cross) 수비수 알프 램지를 제치고 골문 깊숙이 공을 찔러 넣었다. 경기가 끝난 뒤 스페인 축구계의 고위 관계자 아르만도 무노스 칼레로는 프랑코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각하, 우리가 신의 없는 앨비언(the perfidious Albion, 영국을 경멸조로 부르는 말)을 무찔렀습니다.” 그렇게 프랑코의 스페인은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the Invincible Armada)의 패배에 대한 복수를 했다(get its own back). 어느 정도는 말이다.
그것은 상처뿐인 영광이었다(a Pyrrhic victory). 4개 팀이 치르는 최종 리그전에서 브라질에게 6-1로 대패한 뒤 월드컵 우승의 꿈은 날아가 버렸다. 어쩌면이 때문에 프랑코는 축구에서 최고의 순간(crowning moment)이
1964년 유러피언 네이션스 컵 결승전이었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는지도 모른다.그 경기에서 스페인은 상당한 푸리아를 과시하면서 소련을 물리쳤다. 35년에 걸친 프랑코 독재 시절 스페인 축구대표팀이 획득한 단 하나의 주요 대회 트로피였다.
프랑코의 사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스페인 축구의 실패를 두고 ‘라 푸리아’가 아니라 오히려 특정 국가대표팀 선수들 사이에 그런 정신이 없어서라고 지적하는 스페인 평론가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스페인 팀 실적 부진의 배경에는 불운과 국가대표팀 코치진의 열정 부족뿐 아니라 정치도 깔려 있었다.
민주화 이후 스페인 축구팀의 실적은 한동안 1992년 올림픽에서의 금메달이 전부였다. 2008년에 가서야 다시 유러피언 선수권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여러 해 동안 대체로 무능한 감독이 잇따라 부임하면서 고통과 실망을 겪은 뒤였다.
그 무렵 스페인 국가대표팀은 우수한 클럽의 경기력을 따라잡고 출중한 감독을 만났다. 효과적일 뿐 아니라 보기에도 시원시원하게 플레이하는 최선의 방법에 관한 공감대가 형성됐다. 나도 바르셀로나 팬이 됐다. 이 같은 변화는 네덜란드 출신의 요한 크루이프가 카탈루냐 지방으로 건너온 1970년대에 시작됐다.
선수 출신 감독 알프레도디 스테파노와 마찬가지로 그의 개성과 플레이 방식이 한 세대의 선수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다만 그의 존재감이 스테파노보다 더 오래 지속됐다. 나 같은 팬들에게 그는 프랑코 사후 스페인의 정수를 축구로 구현한 존재였다. 그것은 훗날 내가 라 로하(The Red, 스페인 축구대표팀 별명)의 열성 팬이 되는 밑거름이 됐다. 그리고 숭고한 목적의식이 창조적인 플레이와 버무려져 승리 방정식(winning formula)을 이루는 새로운 미학으로 라 푸리아를 승화시켰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자본시장연구원 신임 원장에 김세완 이화여대 교수 내정
2“‘元’ 하나 잘못 보고”…中 여성, ‘1박 5만원’ 제주도 숙소에 1100만원 냈다
3'40세' 솔비, 결정사서 들은 말 충격 "2세 생각은…"
4"나 말고 딴 남자를"…前 여친 갈비뼈 부러뜨려
5다채로운 신작 출시로 반등 노리는 카카오게임즈
6"강제로 입맞춤" 신인 걸그룹 멤버에 대표가 성추행
7‘찬 바람 불면 배당주’라던데…배당수익률 가장 높을 기업은
8수험생도 학부모도 고생한 수능…마음 트고 다독이길
9‘동양의 하와이’中 하이난 싼야…휴양·레저 도시서 ‘완전체’ 마이스 도시로 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