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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감독의 어두운 마술

천재 감독의 어두운 마술

우디 앨런, 성적인 탐욕과 과대망상적 지배에 대한 초기 집착으로 되돌아간다



우디 앨런의 새 영화 ‘투 로마 위드 러브(To Rome With Love)’가 LA 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되기 열흘 전인 6월 첫 월요일(4일)이었다. 앨런은 맨해튼 파크 애브뉴의 특색없는 건물 1층에 자리잡은 사무실의 영사실에서 늘 그렇듯 갈색 캐주얼 차림으로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는 과거엔 자기 영화의 홍보를 엄격히 제한했다. 신문 광고에도 격찬하는 영화평의 인용문을 싣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그 광고들은 ‘우디 앨런 감독·각본’이라는 그의 전형적인 흑백 타이틀 카드만큼이나 삭막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에게도, 영화팬들에게도 시대가 변했다. 이제 앨런도 자기 영화를 홍보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한다. 그는 지난 4월 이 영화의 국제 시사회를 위해 로마로 날아갔다.

또 지금 그는 작열하는 조명용 우산(umbrella strobe)도 참고 견디며 사진작가 플레이턴과 상냥하게 정담을 나눈다. 플레이턴은 다른

때와 달리 상당히 긴장된다고 털어놓았다. “당신에게서 인생을 아주 많이 배웠어요(I’ve learned so much about life from you)”라고 그가 말했다.

앨런은 일부러 진지한 듯(deadpan) 대답했다.“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믿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지요(I’ve learned

not to believe anyone who says that).”농담인지 진담인지 모호했지만 모두가 빙그레 웃었다. 앨런의 경력은 전설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짜릿한 상승도 있었지만 아찔한 하강 국면도 있었다(Allen’s fabled career has had exhilarating ups, but also abysmal downs).

격찬 후에는 비난이 따랐다(praise has often been followed by attack). 2002년 한때 그의 프로듀서였던 장 두마니안과 치열한 소송전에 휘말렸을 때가 그 최악의 시점 중 하나였다. 앨런의 천재성을 극찬하던 뉴욕타임스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한 영화평론가는 당시 그의 실패작 ‘할리우드 엔딩’을 맨해튼에서 유일하게 상영하는 타임스 스퀘어 할인 영화관에 관객이 “8명뿐”이었다며 “그는 오랫동안 문화 아이콘이었지만 이제 그의 시대는 끝난 듯하다(his long moment as cultural icon may be over)”고 평했다.

그 이후 앨런은 보란 듯이 재기했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더 낫다고 말하긴 어려워도 해외에서 찍은 영화들이 잇따라 알찬 흥행 실적을 올리면서 어느 때보다 많은 인기를 누렸다. 지난해 개봉된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로 그는 아카데미 각본상(세 번째 수상)을 받았고 감독상 후보에 지명됐다(일곱 번째 지명). 더 놀랍게도 그 영화는 앨런의 역대 최고 흥행작이었다(전 세계에서 1억1000만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렸다).

영사실에서 홍보 사진 촬영이 끝난 뒤 우리는 옆방으로 옮겼다. 앨런의 편집실이었다. 개봉되지 않은 상자들과 어수선하게 물건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는 가운데 우리는 마주보는 의자에 앉았다. 유명 감독의 작업실이라기보다 어설픈 중산층 가장의 차고 같았다. “이곳은 늘 좁고 지저분하다(This has always been such a little rathole)”고 앨런이 말했다. “여기서 30년 이상 일했는데 이정도면 족하다(I’ve been here 30 years or so,and it suffices). 여기서 편집한 뒤 옆방의 영사실에서 돌려보고는 마음에 들지 않아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올해 76세인 앨런은 불경스러운 우아함(unholy grace)으로 나이를 먹어가는 듯하다. 헝클어진 빨강머리는 이제 충격방지용지피 백의 안감처럼 구름 같은 색조를 띠지만 거의 빠지지 않았다. 길쭉한 얼굴은 여전히 당혹스러움을 재미있어 하는 표정을 가진 탈(mobile mask)이다. 매일 운동한 덕분에 말랐지만 강단 있는 체구(wiry physique)는 아직도 과거 운동선수로서의 활력을 내뿜는다. 십대 시절 그는 우수한 복서로서 미국 아마추어 권투경기 골든 글러브 챔피언을 목표로 훈련했다.

단 한가지 그의 분명한 약점은 난청이다(defective hearing). 일상대화의 대가로 재치있는 대사로 유명한 사람으로서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귀청이 떨어질 듯 벨 음량이 크게 맞춰진 그의 전화가 여섯 번이나 울린 뒤에야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저게 무슨 소리지(What’s that)?”라고 물었다. 그렇게 시끄러운 전화벨에도 그는 태연하게 목청 하나 높이지 않았다.

앨런은 ‘비터엔드’ 같은 그리니치 빌리지 클럽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던 시절부터 반세기 동안 무대와 화면에서 공포증과 불안감으로 안절부절못하는 남자(thenebbishy mess of phobias and insecurities)를 연기했다. 하지만 직접 만나보면 그런 이미지와 사뭇 다르다. 사실 그는 섬뜩할 정도로 자신감이 강한 남자로 유명하다. 인정 받는 스타들도 촬영장에서 그가 내세운 까다로운 기준(exacting standard)에 맞추지 못하면 가차 없이 쫓겨난다(마이클 키튼, 샘셰퍼드, 크리스토퍼 월켄 등이 그랬다).

그런 편집광(monomania) 덕분에 그는 한시대의 뛰어난 코미디언이 됐다.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의 진정한 계승자(one true heir)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더 버거운 경쟁자들에 견주어 스스로를 평가한다. 앨런은 “지금까지 내가 만든 영화가 약 45편”이라고 말했다. “어느 정도 괜찮은 작품도 있지만 걸작은 없다. 착각도 거짓 겸손도 아니다(I don’t kid myself and it’s

not false modesty). 영화제에서 ‘라쇼몽(羅生門)’ ‘자전거 도둑’ ‘위대한 환상’ 같은 걸작과 나란히 상영될 만한 내 영화가 없다.”



물론 ‘투 로마 위드 러브’도 그런 걸작들과 어깨를 맞댈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이 영화는 네 가지의 별도 줄거리(각각 순진한 사람들이 속아넘어가 잘못되거나 위험한 선택을 하는 부드러운 익살극이다)를 로베르토 베니니, 알렉 볼드윈, 페넬로페 크루즈 등 호화 배역으로 멋지게 포장해 섞어 엮은 작품이다.

그들 모두는 앨런의 약 1700만 달러 예산(요즘의 영화 예산 기준으로는 푼돈이다)에 맞추려고 최소한의 보수를 받고 영화를 찍었다. 이탈리아 영화평론가들은 즐겁고 유쾌한 장면들(diverting moments)이 있다고 좋아했다. 늦깎이 오페라 가수(유명한 테너가수 파비오 아르밀리아토가 연기했다)가 무대 위에 설치된 이동식 샤워기에서 때를 밀며 팔리아치의 아리아를 부르는 장면이 그 예다. 그러나 실망한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가장 유럽적인 미국 감독(most European of American directors)”으로부터 로마와 영화, 인생에 관한 중요한 선언을 기대하고 시사회에 갔다. 하지만 그런 선언은 전혀 없었다.

캥거루와 복싱 경기를 하고, 개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연기를 한 뉴욕 브루클린 출신의 코미디언이 유럽 대륙의 문화 수도들에서 진지하게 떠받들어진다는 것은 아이러니다(2001년 이래 그는 런던, 바르셀로나, 파리, 로마에서 촬영했다). 그 자체가 ‘돈을 갖고 튀어라’나 ‘젤리그’ 풍의 앨런에 관한 ‘모큐멘터리(mockumentary, 다큐멘터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허구 인물과 허구의 사실을 이야기하는 영화로 ‘짝퉁 다큐’로도 불린다)’로 비친다.

그러나 앨런 자신에게는 그것이 삶의 단순한 사실이다. 아니 예술과 상업을 어설프게 뒤섞는 영화의 단순한 진실이다. “지난 25년, 어쩌면 30년 동안 미국에서보다 유럽과 세계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기가 훨씬 나았다(For the last 25 years, maybe30 years, I’ve been doing better in Europe and

around the world than in the United States)” 고 그가 말했다. “미국에서는 예산을 확보하기 힘들지만 유럽 나라들, 그리고 중국, 러시아, 이스라엘 등 세계 모든 나라에서는 나에게 ‘우리 나라에서 영화를 찍으면 자금을 대겠다’며 어서 오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그건 자청한 유배 생활(a chosen exile)일지 모른다. 돈만이 아니라 지배권의 문제이기도 하다(a matter not only of money but of control). 앨런은 대본, 배역선정, 편집 모두에서 완전한 자율권을 고집한다(Allen insists on total autonomy). 그가 고용하는 스타들도 자신이 맡은 대사가 들어 있는 대본만 볼 수 있다. 그런 고압적인 자세의 기원은 미국 영화의 짧은 황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팬들이 새 영화가 나올 때마다 감독의 위엄 있는 비전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앨런은 ‘바나나’ ‘잠자는 사람’ 같은 슬랩스틱(slapstick, 단순한 동작 위주의 익살)코미디로 감독 경력을 쌓으면서 대학가에서 컬트 팬들을 얻었다. 그러다가 ‘애니 홀(Annie Hall)’이 나왔다. 그의 전 여자친구 다이앤 키튼을 스타덤에 올려놓은 작품이다(아카데미 여우주연상). 1977년 봄 개봉된 ‘애니 홀’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it was a sensation). 맨해튼 부자집 아파트를 배경으로 자신의 삶을 찾는 교양 있고 성공한 사람들의 최신 경향을 그대로 반영한 작품이었다. 완성도도 높았지만 타이밍이 더 좋았다.

1970년대 중반 뉴욕은 위기를 겪었다. 75년에는 시정부가 파산할 뻔했고, 77년엔 대규모 정전사태가 발생해 방화, 약탈, 폭동으로 많은 사람이 체포됐다. 연쇄살인범‘샘의 아들’이 브루클린과 퀸즈의 조용한 동네를 활보했다. 그 시대상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타임스 스퀘어를 무대로 살인과 범죄의 지옥을 그린 마틴 스코세지 감독의 1976년 작품 ‘택시 드라이버’다.‘애니 홀’은 희망과 포부로 그런 시대상의 역비전(countervision)을 제공했다.

앨런의 ‘맨해튼’(1979, 이 섬의 시각적 화려함을 정교한 흑백으로 보여주었다), ‘한나와 그 자매들’도 그랬다. 1986년 작품인 ‘한나와 그 자매’은 그 영화에서 여주인공을 맡았고 앨런의 현실 동반자였던 미아 패로의 널찍한 고급 아파트에서 대부분 찍었다. 이 두 영화는 뉴요커들의 높은 자아의식을 회복해주는 데 일조했다. 영화평론가 폴린 케일은 당시 “그 두 영화는 앨런이 사랑과 뉴욕시에 바치는 장편시의 일부분(canto in Allen’s ongoing poem to love and New York City)”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맨해튼이 다시금 마술의 나라 오즈가 됐고 앨런은 그곳의 마법사로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신비와 매력을 불러냈다. 뉴요커든 아니든 많은 사람이 앨런을 뉴욕과 동일시했다. 익살꾼이자 개그작가였던 그가 거의 하룻밤 사이에 스탠리 큐브릭,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같은 명감독의 대열에 올랐다(Almost overnight,the funnyman and gag writer was being mentioned in the same breath as Stanley Kubrick and Francis Ford Coppola).



그가 레니 브루스와 모트 살의 통렬한 위트, 조지 S 카우프먼과 가슨 캐닌 같은 브로드웨이 연출자들의 페이싱(pacing, 상대방과 보조를 맞춰 공감대를 형성하는 기법),필립 로스의 학구적인 지능 등 미국 특유의 영향을 받아들인 것이 도움이 됐다. 그러나 이 모든 자질을 바탕으로 앨런은 경쟁에서 앞서가기보다는 독자적인 노선을 개척했다.

그는 할리우드의 싸구려 스릴에 반기를 들고 다른 게임을 추구했다. 할리우드가 앨런을 좋아했을지는 몰라도 앨런은 할리우드를 거들떠보지 않았다(Hollywood might love Woody, but he refused to love it back).앨런의 최신작이 개봉되면 (뉴욕타임스의 빈슨 캔비가 쓴 극찬의 비평을 읽은 뒤) 맨해튼의 영화관 앞에 줄을 섰던 팬들은 아카데미상 후보에 매년 오른 그가 시상식 참석을 거부하고 TV로도 보지 않고 마이클스퍼브에서 일요일 밤 공연(백인 재즈 악단과 클라리넷을 연주했다)을 계속 진행하자 환호성을 올렸다.

그러던 앨런이 갑작스럽게 추락했다.1992년 그와 미아 패로는 쓰라린 갈등 끝에 갈라섰다. 패로가 입양한 한국계 딸인 21세의 순이 프레빈(지금은 그의 아내다)과 외도한 사실 때문이었다. 이어진 양육권 다툼으로 선정적인 매체들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촌철살인 재담의 제왕인 그가 오히려 개그의 소재가 되고 더 심하게 폄하되면서 뉴욕 전체의 창피가 됐다(The king of the one-liner was reduced to a punchline and worse, a kind of civic embarrassment).

그의 번득이는 재담은 저급하고 우쭐대는 소리로 들렸다(“미국의 다른 지역 사람들이 뉴요커라면 좌익이고, 공산주의자고, 유대인이고, 호모 포르노 제작자라고 생각하지. 나도 가끔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난 여기에 살아.”). 저명한 작가 조앤 디디언의 1979년 비판을 상기하는 사람도 많았다. 디디언은 이렇게 통렬하게 말했다. “앨런과 그의 팬들은 특권을 가진 ‘하부세계’에 함께 살아간다.‘애니 홀’ ‘실내’ ‘맨해튼’에 나오는 그 특이하고 폐쇄적인 자존심을 대다수 사람은 공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특히 앨런의 여성팬들이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왜소하고 예민하고 연약해서 주인공으로 가장 어울리지 않는 그에게 그들은 반했다. 그런 그가 이제는 “가슴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원한다(the heart wants what it wants)”고 주장했다. 마치 자신의 각본에서 따온 말처럼 들리지만 이 경우는 35세 연하의 순이 프레빈을 두고 한 말이었다.

팬들은 그의 작품에서 더 깊은 메시지,사실과 환상의 애매한 어우러짐(tricky blurrings of fact and illusion)을 원했다. 앨런은 브루클린에서 자라면서 연예계의 삶을 꿈꿨다. 그래서 마술을 배웠다. 날랜 손재주가 특기였다(14세 때 TV 마술 오디션을 보기도 했다). 이런 초기의 경험이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앨런은 자신의 기법을 ‘예상밖의 방향으로 빠지기(misdirection)’라고 불렀다. 한번은 그가 영화 평론가이자 역사가인 리처드 시켈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관객이 무엇인가를 믿도록 이끌지만 영화는 다른 무엇에 관한 작품이 된다(I lead the audience to believe

something, but the movie is really going to be about something else).”

그는 이런 기법을 자신이나 대리인의 극중 역할을 통해 자신이 살아온 과정과 새롭게 만들어내는 환상을 미묘하게 섞는 데서 가장 기발하게 사용한다. 생기 없고 어린아이 같은 ‘앨런’의 캐릭터는 사실은 성적으로 흥분하고 아주 타산적인 인물이다. 채플린의 캐릭터인 ‘리틀 펠로’와 같다. 그리고 채플린처럼 앨런은 젊은 여배우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내 영화에서 너무 예민하게 자전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고 앨런이 1986년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맨해튼에서는 내가 실제로 17세 여자아이(그의 상대역을 한마리엘 헤밍웨이)와 결혼하고 싶어한다고 완전히 믿었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는 그 메시지가 좀 더 모호하다. ‘애니 홀’과 ‘맨해튼’은 감정적이고 로맨틱한 ‘결별(breakup)’의 영화로 포장했지만 사실은 성적 탐욕(sexual avarice)과 자아도취적 지배(narcissistic control)에 관한 어둡고 피그말리온(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키프로스의 왕으로 자신이 만든 여신상을 사랑해 결국 신에게 부탁해 생명을 불어넣게 한다)적인 이야기다. 앨런의 뛰어난 뉴욕 영화 중 마지막인 ‘범죄와 비행(Crimes and Misdemeanors)’에서도 그와 유사한 ‘예상밖의 방향으로 빠지기’가 엿보인다.

거기서 앨런과 가장 닮은 인물은 그가 연기한,침울하고 도덕적 훈계를 좋아하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 아니라 알란 알다가 연기한, 상스럽고 우쭐거리고 권력에 도취된 방송계 기업가다. 그 기업가는 툭하면 휴대용 녹음기를 주머니에서 꺼내 떠오른 ‘아이디어’를 녹음한다. 젊은 우디 앨런도 대화 도중 갑자기 떠오른 재담을 메모하려고 상대방의 말을 가로막곤 했다(interrupt a conversation to scribble one-liners).

‘투 로마 위드 러브’에서도 마찬가지다.명랑한 겉모습과 스페인광장의 아름다운 엽서 이미지 아래엔 앨런의 어두운 마술이숨어 있다. 네 가지 줄거리 중 가장 잘 표현된 이야기에서 교태를 부리고 현실에서도 자신을 극적으로 연기하는 배우(엘런 페이지)가 로마에 사는 젊고 행복한 미국인 부부(제시 아이젠버그와 그레카 거위그)를 찾아간다. 이야기가 어디를 향하는지 처음부터 분명해 보인다(From the beginning it’s clear where the story is headed).

그러나 유혹이 시작되면서 경계선이 점차 흐려진다. 이 이야기의 중심이 과연 누구인가? 유학간 성실한 학생인가 에즈라 파운드와 WB 예이츠의 시 구절을 유창하게 인용하는 태평스러운 관광객인가? 누가 앨런의 실질적인 대역인가(who is the actual stand-in for Woody)?

앨런은 자신의 공적인 이미지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 답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실제로 나는 지식인이 아닌데 사람들은 늘 내가 지식인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갖는다(People always have the mistaken impression that I was an intellectual when in fact I’m not).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십대 시절 내가 좋아했던 여성들이 문화에 심취했고 사상과 학문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난 최선을 다했지만 그들은 내게 내줄 시간이 없었다. 그들과 대화할 때 밀리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책을 읽었다(I read so I could hold my own in conversation with them and not get written off).” 그 여성들은 독특한 부류였다고 앨런은 덧붙였다. “시사만화가 줄스 파이퍼가 즐겨 그리던 표정을 짓고, 검은 가죽 가방을 들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화장을 하지 않았다.

전형적인 그리니치 빌리지식이었다.” 그 묘사는 ‘멘사의 매춘부(The Whore of Mensa)’에 나오는 가공의 여성과 흡사하다. 1974년 앨런이 뉴요커지에 기고한 패러디 단편을 말한다. 문화에 탐닉하는 중산층에게는 좋은 책이 일종의 최음제(aphrodisiac)라는 번뜩이는 통찰력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앨런이 아직도 십대 시절 자신의 집착을 탐구하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It is not surprising that Allen is still plumbing his earliest obsessions). 주요 예술가들은 늘 그랬다. 특히 나이가 들어, 창작 욕구에 비해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할 때가 그렇다. 떨쳐지지 않는 옛 질문에 답할 새로운 방법을 찾기 위해서다. 앨런의 경우 남은 생이 아직도 많을지 모른다. 아버지가 100세까지, 어머니가 95세까지 살았다.

한편 앨런은 이미 다음 영화를 생각한다. 각본은 완성됐고 배역을 선정하는 중이란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4~5주, 뉴욕에서 2주 정도 촬영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2주면 귀향치고는 대단치 않지만 그래도 괜찮은 시작이다(Two weeks isn’t much of a homecoming, but it’s a start). “기회

가 오면 나도 미국적인 그림에 스며들어가려고 한다(I try to sneak in an American picture when I can).” 좋은 이야기다. 유배생활이 너무 길었다(His exile has lasted long en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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