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재정 집착하다 위기 대응 놓칠라”
“균형재정 집착하다 위기 대응 놓칠라”
2013년 균형재정을 달성하겠다는 정부의 목표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유럽발 재정 위기가 확산되는 가운데, 정부 당국자들이 잇따라 “균형재정 달성 의지에 변화가 없다”고 강조하는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정부가 지나치게 균형재정 목표에 집착해 위기 대응에 실기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하고있다.
균형재정은 세출과 세입이 균형을 이루는 재정을 말한다. 재정 수지가 흑자도 적자도 아닌 상태다. 정부는 지난해 발간한‘2011~2015 국가재정운용계획’을 통해 관리대상 수지(통합 재정수지에서 국민연금 등 4대 사회 보장성 기금을 제외한 정부 재정)를 2013년 0%로 낮춘다는 목표를 잡았다.
2011년에는 -2%였다.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6월 2일 “2013년 균형재정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달성하겠다는 각오로 예산을 짤 생각이다"고 말했다.이명박 대통령도 힘을 실어줬다. 이 대통령은 6월 11일 국내외 언론과 가진 공동 인터뷰에서 “추가경정 예산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며 “여러 면에서 2008년에 비해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이 낫기 때문에 위기를 관리할 수 있고 대비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야권의 추가경정 예산 편성 요구를 일축하면서, 균형재정 달성 목표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정부가 균형재정 달성을 강조하는 것 자체는 탓할 일이 아니다. 2008~2009년 글로벌금융위기 때 우리나라가 상대적으로 위기에서 빨리 벗어났던 이유는 정부가 신속하고화끈하게 재정을 풀었기 때문이다.
이전 정부가 나라 곳간을 채워놨기 때문에 가능했다. 현 정부 역시 균형재정을 이뤄 다음 정부에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최근 대내외 여건을 볼 때 정부가 균형재정기조를 유지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에 대한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6월 11일과 12일 시민단체와 기획재정부가 각각 주최한 재정관련 토론회에서도 이런 이견이 드러났다.
정부 “균형재정 기조 변함 없다”6월 11일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 등이 주최한 ‘시민이 설계하는 2013년도 예산안 대토론회’에서 정창수 나라살림연구소장은“지난 4년간 정부는 감세와 재정지출 확대로 공공부문 부채를 900조원으로 늘려놓았고 이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균형재정을 들고 나왔다”며 “악화한 재정구조 대책이 부족하고, 감세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균형재정은) 단순한 정치적 구호에 그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날 발제자로 나선 고영선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본부장은 “최근 남유럽 재정위기는 매우 낮은 수준의 부채에서도 재정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며 “정부는 2013년 균형재정을 달성한다는 기조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고 본부장은 “경기가 더 악화하면 재정을 풀어야겠지만, 어느 단계까지 갈 때 재정정책을 쓸 것인지에 대한 객관적답은 없다”며 “개인적으로는 유럽위기가 미국으로 전이되는 상황이 되면 정부가 균형재정을 양보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집착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최상대 기획재정부 예산총괄과장은 정부가 균형재정에 너무 집착한다는 지적에 대해 “너무라는 표현은 부담스럽지만, 집착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최 과장은 “금융위기는 재정으로 극복이 가능하지만 재정위기는 수단이 없다”며 “세계은행 역시 한국이 곳간을 쌓을 때라고 권고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4월 무디스가 한국 신용등급을 안정에서 긍정으로 상향조정한 근본적 요인은 재정 건전성”이라며 “나라 곳간을 채워 다음 정부에 건전한 재정을 넘겨주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반면 이영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지금까지는 균형재정을 추구하는 모습이 맞는 것 같지만, 유럽 재정위기가 장기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균형재정에 집착하지않는 게 좋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정부 재정정책은 단기적으로 경기 대응을 잘해야하고 장기적으로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균형재정은 경기가 좋아 보이는 시점에 도달하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정부는 최근의 경제 위기가 재정확대 정책을 쓸 만큼 심각하지 않다고 보고있다. 최상대 과장은 “최근 대내외 상황이 2008~2009년처럼 대규모 재정정책을 쓸때가 아니라는 게 정부 판단”이라고 밝혔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2009년 추경예산 편성 당시 우리 성장률 전망은 플러스 4%에서 마이너스 2%로 곤두박질 쳤고 실물경제도 심각했다. 고용 상황도 나빠, 취업자 수가 전년 대비 7만 명이나 감소했다. 이때 전체 추경예산 29조원이었는데 굉장히 큰 규모다.하지만 현재 경제상황은 올해 경제성장률이 3%대를 유지할 전망이고, 1~4월 취업자 수도 평균 46만명 증가했다. 재정 정책을 쓸때가 아니다.”
나랏 돈 쓸 곳은 많은데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 역시 13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열린 위기관리대책회의에서 “글로벌 경기불안으로 인한 시장의 급격한 침체 등 금융위기 당시와 같은 실물경제의 급락 조짐은 없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김한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책팀장은 “중립적, 현실적 관점에서 전망과 진단이 필요한데 정부가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의지와 상관없이, 균형재정 달성자체는 쉽지 않아 보인다. 최상대 과장 역시“균형재정 달성이 쉽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대다수 전문가는 유럽 경기침체가 장기화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유로존 해체 같은 극단적 상황이 오지 않더라도, 우리 경제는 금융이나 실물 부문에 상당한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한국경제는 경기둔화가 지속되는 모습이다. 한국GDP 성장률은 지난해 1분기 4.2%를 기록한 이후 4분기 연속 둔화 추세를 지속하며 올 1분기 2.8%를 기록했다. 정부가 다시 재정을 풀어 경기에 대응해야 할 상황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중기 재정운용 여건도 만만치 않다. 나랏돈을 쓸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구조적으로는 잠재성장률 하락과 인구고령화로 재정압박이 심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우리나 라 잠재성장 률 은2001~2007년 4.4%에서 2010~2015년 3.8%, 2016~2026년에는 2.4%로 떨어질 전망이다. 잠재성장률 하락으로 세입은 주는
데, 성장잠재력을 늘리기 위해 재정지출은 늘려야 하는 상황에서 균형재정을 달성하기 는 매우 어렵다.
국가가 법적으로 지출해야 하는 의무지출이 계속 증가하고 있는 것도 부담이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지난해 총지출 325조원 중 복지·교부금·이자 지출 등 의무지출비중은 45%인 148조원이었다. 의무지출 비중은 2007년 이후 매년 1%포인트씩 상승해왔다. 재정난에 빠진 지방자치단체도 골칫거리다.
중앙정부는 지자체에 교부금과 국고보조금을 지원하는 데 지난해 지방교부금만 75조원으로 정부 재정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지자체는 지방소비세 세율을 5%에서 10%로 인상해달라고 요구하는 등 중앙정부에 더 많은 재정지원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증세를 하기도 버겁다. 최상대과장은 “현 상황은 경제 주체들이 경제하려는 의지가 약해져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세율 인상을 통해 근로·투자의욕을 떨어뜨리는 방향으로 세입 기반을 확충 했을 때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정부 입장에서 가장 큰 걱정거리는 정치권이다.
정부 국가재정운용계획 작업반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최근 총선 과정에서 각 정당은 여러 가지 복지사업을 공약으로 내세웠는데, 이를 이행하는 데는 대규모 재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각 정당은 무상의료, 무상급식, 고교무상교육, 사병월급 인상 등을 경쟁적으로 약속했다. 이에 필요한 재원은 2013~2017년 중 268조원으로 추정된다.’ 한국경제연구원은 각 정당들이 내건 공약을 이행하려면 새누리당은 5년간 281조 원, 민주통합당은 572조 원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영 교수는 “선진국 진입 또는 초기 단계에서 정부 지출 중 가장 많이 늘어나는 게 복지 지출”이라며 “OECD 국가와 비교해 복지 쪽에 쓰는 돈이 상대적으로 적어 늘릴 필요는 있지만 관건은 속도”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복지 늘리는 속도를 조절하지 못해 재정이 훼손되고 산업경쟁력이 악화된 나라가 많다”며 “그리스도 그런 국가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이런 와중에 균형재정과 맞물린 ‘추경 예산 편성 논란’도 뜨겁다. 정부는 아직까지 추경 편성 계획은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추경을 할 경우 국가부채가 늘어 내년 균형예산 목표 달성은 물건너 간다”며 “기조가 바뀌지 않는 한 추경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정치권 추경 편성 놓고 이견대신 정부는 정부 운용기금을 활용하는 카드를 준비하고 있다. 재정을 써야할 상황이 왔다고 판단되면, 국회 동의를 받지 않고 일반 기금은 20%, 금융성 기금은 30%까지 증액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기금을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는 13일 새누리당을 향해 “민생경제활성화를 위해서 추경을 편성해서라도 내수경기를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같은 당이용섭 정책위의장은 “정부가 기금을 늘려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것은 편법”이라며 “위기가 깊어지고 나서는 늦기 때문에 추가 편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새누리당은 유동적이다. 나성린 새누리당정책위부의장은 한 라디오방송에 출연해“유럽 재정위기가 우리 경제에 미칠 영향이 아직 불확실하기 때문에 조금 더 두고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다만 그는 “유럽 사태가 우리 금융과 수출시장에 영향을 미칠 경우엔 서민경제활성화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고 그 중의 하나로 추경이 들어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앞서 이한구 원내대표는 “추경을 하기 전에 우선 예비비를 쓰고 그래도 모자라면 추경을 해야한다”는 입장을 밝혔다.나라 밖 반응도 엇갈린다. 국제통화기금(IMF)은 6월 12일 한국 정부와 연례협의를 마친 직후 내놓은 발표문에서 “한국 정부는 필요에 따라 경제를 부양하기 위한 추가 조치를 취할 여력을 보유하고 있다”며 “경기 둔화가 천천히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추경은 필요하지 않다”고 밝혔다.
반면 HSBC는 “2분기 GDP가 저조할 경우 추경예산 편성은 7월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HSBC는 “한국은 작년 8월 이후 제조업 부문 고용이 큰 폭으로 둔화돼 정부가 추경예산 편성으로 고용증가를 뒷받침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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