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엄정한 법 집행에 ‘오너 리스크’ 부각

엄정한 법 집행에 ‘오너 리스크’ 부각



남색 슈트를 입고 취재 기자들을 향해 “선고 끝나고 봅시다”며 법정에 들어간 김승연(60) 한화그룹 회장이 결국 파란색 수의로 갈아입었다. 서울 서부지방법원 제12형사부(재판장 서경환 부장판사)는 8월 16일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을 법정 구속했다. 징역 4년, 벌금 51억원. 김승연 회장은 1993년, 2007년에 이어 세 번째 영어의 몸이 됐다.

그룹 총수에 대한 이례적인 중형에 한화그룹은 물론 재계, 정치권은 술렁였다. 사법부의 잣대는 엄격했다. 재판부는 판결 직후 보도자료를 통해 “엄격한 양형 기준을 적용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대법원 양형위원회에서 횡령·배임죄에 관하여 정한 양형 기준을적용해 권고 형량 범위를 철저하게 준수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양형위원회 양형 기준 적용으로 형량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것에상응해 유죄에 대한 엄격한 증명을 요구해 주된 공소사실의 절반 정도를 무죄 선고했다”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양형위원회 기준에 따르면, 횡령·배임죄의 양형 기준은 5억~50억원 미만일 때 2~5년, 50억~300억은 4~7년, 300억원 이상은 5~8년으로 돼 있다. 여기에 감경·가중 요소를 적용해 형량을 정한다.


법원 “양형 기준대로 엄격하게 적용”검찰이 김승연 회장에 적용한 혐의는 그룹 계열사를 동원해 편법으로 부실 위장 계열사를 지원해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었다.지급보증 방식으로 9000억원 정도를 계열사에 불법 지원하고 부채2800억원을 갚아준 혐의(배임)도 물었다. 또한 검찰은 김회장 어머니 소유 회사에 240억원을 유상 증자하고, 가족에게 계열사 주식을 헐값에 팔아 1000억원 대 손해를 끼친 혐의도 적용했다. 조성된 비장금으로 주식투자를 해 세금을 포탈했다는 것도 기소 사유였다.

재판부는 9000억원 대 불법 지원 혐의에 대해서는 “계열사들이 실질적 손해를 보지 않았다”며 무죄를 내렸지만, 그룹 계열사 자금 2900여 원을 동원해 위장 계열사인 한유통·웰롭 등의 부채를 갚아준 혐의에 대해선 유죄를 인정했다.차명 주식을 거래해 26억원 상당의 양도소득세를 포탈한 점과 한화그룹 계열사들이 보유하고 있던 김승연 회장 모친 소유의 동일석유 주식을 누나 영혜씨에게 저가에 넘겨 계열사에 142억원의 손해를 끼친 점도 유죄로 판결했다.

2010년 8월 김 회장이 비자금을 조성해 관리 중이라는 제보를 받은 금융감독원이 검찰에 의뢰에 시작된 수사는 강도 높게 진행됐다.대검찰청 관계자가 “한화를 탈탈 털었다고 보면 된다”고 말할 정도다. 검찰은 한화그룹을 열세 차례 압수수색 했고, 김 회장을 피의자

신분으로 세 차례 소환했다. 검찰은 2월 2일 김회장에 징역 9년, 벌금 1500억원을 구형했다.

그럼에도, 김승연 회장이 구속될 것이라는 관측은 많지 않았다.많은 대기업 총수가 대개 ‘징역 몇 년, 집행유예 몇 년, 사회봉사 활

동 몇백 시간’ 정도로 풀려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은 2008년 횡령·배임 혐의에 대해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받았고 2개월 뒤 사면됐다. 같은 해 사법부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1조5000억원 대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에 대해 징역 3년,집유 5년을 선고했다. 최 회장 역시 나중에 사면됐다. 300억원 대 횡령·배임 혐의로 기소된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은 올 1월 징역3년,집유 5년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그 사이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올 2월 서울 서부지법은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에게 1400억원대 회사 돈을 횡령하고 배임

한 죄를 물어 징역 4년 6개월을 선고했다. 이례적인 중형이었다. 재계에선 “지난해 말부터 정치권이 선명성 경쟁을 해 온 경제민주화 바람 탓”이라는 말이 돌았다. 한화그룹 관계자가 “차라리 2월에 1심 선고가 났어야 했는데”라고 말하는 이유다. 원래 김승연 회장 1심 재판은 2월 예정이었지만, 법원 정기 인사로 늦춰졌다.

최근 정치권이 앞다퉈 대기업 범죄에 대해 형량을 강화하는 법안을 발의한 것도 이번 판결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새누리당은 7월 16일 ‘경제민주화 1호 법안’이라며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개정안은 기업인의 횡령·배임규모가 300억원 이상일 때 무기징역 또는 1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50억원 미만도 7년 이상으로 규정했다. 법원이 형량을 절반 줄여도 집행유예가 가능한 3년 이하로 줄기 않기 때문에 사실상 집행유예 선고를 원천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민주통합당 역시 앞서 횡령에 따른 재산 이득액이 300억원 이상이면 무기 또는 10년 이상 징역, 50억~300억원이면 7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처벌한다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한 바 있다.

이번 판결과 관련해서는 대체로 “당연한 결과”라는 반응이 많다.새누리당 이혜훈 최고위원은 “대기업 총수에게 면죄부를 주는 관행

을 끊었다는 데 의의가 있는 판결”이라고 말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재벌총수이기 때문에 경제 기여 등을 고려해 양형을 가볍게 매긴 관례를 깨고 원칙으로 돌아간 것으로 봐야 한다”고 평했다. 물론 이번 판결에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익명을 원한 한 여당 중진 의원은 “법치가 모두의 동의 아래 뿌리를 내리려면 지난 시절의 관습과 관행이 바로 잡힐 수 있는 준비작업이 선행돼야한다”며 “그런 준비 없이 곧바로 실행에 들어가는 것은 적어도 정치적으로 숙성되지 못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법부 판결이 그만큼 전격적이고, 충격적이었다는 얘기다.


정치권 경제민주화 바람 영향재계는 침묵했다. 예년처럼 “경제도 어려운데”라며 반박 성명을 낸 경제 단체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 판결이 가져올 파장에 대해선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오너 리스크’가 더욱 부각될 것이라는 점이다. 오너 리스크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는 총수의 독단 경영이 기업 경영활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을 말한다. 오너 리스크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오너가 잘못을 저질러 유죄를 받아 구속될 경우 경영 공백이 생길 수 있는 위험이다. 또 하나는 오너 리스크로 인해 기업 신인도나 주가가 떨어지면서 투자자가 손해를 볼 수 있는 위험이다. 대한상공회의소 관계자는 “한화는 김 회장이 직접 주도하고 챙기는 신사업이 많았는데, 총수가 구속되면서 의사결정이나 사업 추진에 지장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괜한 말은 아니다. 일각에서는“그렇게 큰 기업에 오너 하나 없다고 경영에 혼선을 빚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231쪽에 달하는 김승연회장 재판 판결문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피고인 김승연은 한화그룹 경영 전반에 걸친 사항 외에도 각 계열사, 사업부분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까지 꼼꼼하게 파악하고 있고, 필요한 사항에 대하여는 상당히 구체적인 지시를 내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판결문에 공개된 한화그룹 계열사 경영진과 경영기획실 메모 내용은 이런 정황을 뒷받침한다.

한화S&C 진화근 대표가 2009년 초반에 작성한 회의내용 메모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대생(대한생명) 명칭 금년 내 확정하라” “해외지사 근무자는 현지어로 해라” “구조조정 통폐합 소규모 회사는 없애라”. 김 회장의 지시사항이다. 김승연 회장은 2007년 아들 관련 폭력사건으로 약 4개월 간 구치소에 수감됐을 때도 옥중 경영을 했다.

재판부는 “피고인(김승연 회장)이 구치소에 있는 상황에서도 한화그룹 계열사의 부동산 거래 문제 등 회사 관련 사항을 임원들로부터 보고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적시했다. 검찰이 2010년 9월 한화빌딩 경영기획실을 압수수색 하면서 입수한 ‘본부조직의 역할과 자세’라는 내부 문건에도 김 회장의 그룹 내 위상과 역할이 잘 나타나 있다.

문건에 따르면, 경영기획실 조직의 존재 이유는 ‘CM(체어맨, 김 회장 지칭)을 위한 조직, CM의 안위 및 재산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조직’이다. 이 문건에는 ‘CM은 신의 경지’라는 말도 있다. 김승연 회장은 경영기획실을 통해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2007년 CM 지시사항’이라는 문건을 보면, 김 회장이 그룹 경영 전반에 얼마나 세밀하게 관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문건에는 이런 말들이 나온다.

‘각 사가 실적을 쪼니 책임 없이 일을 벌리려는 경향이 있는 데 경기실(경영기획실)은 워치할 것’, ‘김00 사장 수주하는 데 도와줄 인력 보완(전직 장성급, 대사 등)’, ‘산업은행 총재에게 대우증권매도 여부 태핑할 것’, ‘20~30년 동안 우려 먹은 사업성 없는 사업은 정리를 검토할 것’, ‘진해공장은 폐쇄를 검토하고 건설은 해당 부지에 아파트 건설 사업성을 검토할 것’…


오너 리스크 방지 대책 나올 듯이는 역으로 김승연 회장이 부재할 경우, 한화그룹 경영이 직접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김 회장이 직접 챙기던 이라크 신도시 프로젝트나 태양광 사업 등에 차질을 빚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재계에선 총수 1인 지배체제가 일반적인 국내 그룹사의 지배구조를 볼 때 총수가 재판을 받고 있는 기업 역시 오너 리스트가 부각될 것으로 본다. 특히 SK그룹과 금호석유화학은 좌불안석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박찬구 금호석화 회장은 특가법상 횡령 혐의로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와 관련 양사 관계자들은“무죄를 예상하지만, 실형을 받더라도 오너가 부재한 상황(구속)만 피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오너 리스크로 기관·소액 투자자가 손해를 볼 가능성도 더 커졌다. 김 회장 구속 소식이 알려진 8월 16일 한화 주가는 전날보다 4%까지 빠졌다가 낙폭을 일부 회복했다. 계열사 주가도 내려갔다. 앞서 2월 6일, 한국거래소가 김 회장의 횡령·배임 공시에 따라 상장폐지 실질심사 해당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한화 주식에 대한 매매 거래 정지를 발표한 날 한화는 물론 계열사 주가가 대부분 폭락했다. 최악의 경우는 상장 폐지까지 될 수 있었다. 앞서 오리온, SK그룹 관련주도 오너 리스크로 인해 주가가 단기 폭락한 적이 있다.

국회 입법조사처 원종현 입법조사관은 “오너 리스크는 외국의 경우 독단경영으로 인한 경영실패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반면, 우리

나라는 배임이나 횡령 등 범죄적 내용이 훨씬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며 “여전히 기업 리스크 관리에서 후진성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치권에서 ‘오너 리스크’를 방지하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어날 가능성도 크다. 새누리당 강석훈 의원은 “미국처럼 기업에 투자한 연기금이나 기관투자자가 보다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거나, 오너에 대한 처벌과는 별도로 주주대표소송제도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지금까지 방조돼온 오너 리스크를 통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세 번째 영어의 몸 된 김승연 회장

천직이라는 경영 또 옥중에서 할 듯
“처음 회장이 됐을 때는 해외 출장 가서도 각 계열사의 부서별 일일 업무보고까지 받았습니다. 2000년말 경 사경을 헤맨 이후 돈은 숫자로만 보고 있지만,경영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습니다. 동물적인 감각이 있다고 할까요. 경영이라는 것은 제 천직입니다.”

김승연 회장이 법정에서 한 말이다. 김 회장은 스스로 천직이라는 경영을 잠시 놓아야 한다. 벌써 세 번째다. 1981년 29세 나이에 한화그룹 회장 자리에 오른 그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그룹을 장악하며 ‘재계의 승부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젊은 시절 그는 나이 많은 임원에게 재떨이를 집어던진 일화가 알려질 정도로 강한 CEO를 자처했다. 그는 지난 7월 열린 재판 최후 진술에서 “젊은 나이에 회사를 맡은 책임감 때문에 감정도 숨긴 채 강한 외모를 보이고 강한 행동을 해야 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가 한화그룹을 굴지의 대기업으로 키웠다는 데 이견은 없다.

하지만 김 회장에 대한 여론은 차갑다. 그는 1993년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당시 해외로 빼낸 돈으로 미국 유명 영화배우인 실베스터 스탤론의 캘리포니아 저택을 구입한 게 알려져 따가운 질책을 받았다. 2007년 폭행사건은 결정타였다. 당시 김 회장은 둘째 아들이 서울 북창동 술집에서 폭행을 당하자 경호원, 조직폭력배 등을 대동하고 직접 가해자를 서울 청계산으로 데려가 보복 폭행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4개월간 구치소에서 살았다. 김 회장은 이번 선고를 앞두고 매우 초조하고 불안해 했다고 한다. 불면증에도 시달렸다. 하지만 달라진 세태와 사법부의 엄정한 법 집행으로 구속은 피하지 못했다. 정치권 움직임이나 여론을 감안할 때 당분간 사면을 받기도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과거 두 차례 영어의 몸이 됐을 때 옥중 경영을 통해 그룹의 주요 사안을 보고 받고 결정했다고 한다. 또 옥중 경영이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수수료 상생안에 프랜차이즈 점주들 난리 난 까닭

2김천 묘광 연화지, 침수 해결하고 야경 명소로 새단장

3"겨울왕국이 현실로?" 영양 자작나무숲이 보내는 순백의 초대

4현대차 월드랠리팀, ‘2024 WRC’ 드라이버 부문 첫 우승

5'1억 4천만원' 비트코인이 무려 33만개...하루 7000억 수익 '잭팟'

6이스타항공 누적 탑승객 600만명↑...LCC 중 최단 기록

7북한군 500명 사망...우크라 매체 '러시아 쿠르스크, 스톰섀도 미사일 공격'

8“쿠팡의 폭주 멈춰야”...서울 도심서 택배노동자 집회

9다시 만난 ‘정의선·도요타 아키오’...日 WRC 현장서 대면

실시간 뉴스

1수수료 상생안에 프랜차이즈 점주들 난리 난 까닭

2김천 묘광 연화지, 침수 해결하고 야경 명소로 새단장

3"겨울왕국이 현실로?" 영양 자작나무숲이 보내는 순백의 초대

4현대차 월드랠리팀, ‘2024 WRC’ 드라이버 부문 첫 우승

5'1억 4천만원' 비트코인이 무려 33만개...하루 7000억 수익 '잭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