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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넘어선 인연

운명을 넘어선 인연



어느 날 우산 속으로 우연인 듯 운명처럼 들어온 여인.그 여인을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인우. 두 사람의 운명적인 사랑을 그린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2001)는 환생이라는 비현실적 소재를 멜로 장르에 녹여내 잔잔한 인기를 끌었다. 운명적인 여인을 교통사고로 잃은 인우는 17년 후 가르치고 있는 학생 현빈에게서 태희의 흔적을 읽는다.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에서도 영화의 기본적인 설정과 장면을 그대로 옮겨온다. 어느 날 갑자기 우산 속으로 들어온 여인이라는 설정이나 신발끈을 묶어주면서 물건을 집을 때마다 새끼손가락이 펴질 거라는 주문을 거는 장면, 빗속에서의 싸움과 화해 등 영화 속 인상적인 장면들이 무대에서 재현된다.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추억에 젖어 들게 한다. 무대 언어가 영상 언어와 다름에도 뮤지컬에서는 비교적 무대 언어로의 전환을 훌륭히 해낸다.

첫사랑 이야기를 해달라는 반 아이들의 외침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면서 필름을 되감듯 인우와 태희가 만나는 시점으로 이동하는 장면처럼, 현재와 과거의 시공간 넘나드는 많은 장면들을 유연하게 처리한다. 무대 전면에 미닫이 막을 설치해 마치 영화의 프레임 같은 구실을 하면서 영화적인 느낌을 살렸다. 인우와 현빈이 서로를 알아보고 다음 생을 기약하며 산에 올라 뛰어내리는 장면도 서서히 막이 내려오면서 리프트에 올라선 두 인물을 지워나가는 식으로 영화의 프레임 구조를 이용해 둘의 죽음을 감동적으로 표현했다.

다음 생으로까지 이어지는 사랑은 끈(인연)의 이미지로 빗댔다. 공연 전 닫힌 미닫이 막에는 흰 선 하나가 그어져 있다. 미닫이가 열리면서 인우가 등장하고 칠판에 한 줄을 긋는다. 그 흰 선 위에 작은 점을 세우고는 관객들에게 말을 건넨다. ‘이것이 지구다. 여기서 작은 바늘을 세우고 하늘에서 작은 밀씨를 뿌렸을 때 이 바늘에 꽂힐 말도 안 되는 확률로 우리는 만난 것이다.’ 이내 미닫이가 열리고 학생들이 드러나면서 이 풍경이 첫 수업에서 학생과 담임 선생님의 만남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인우와 태희의 운명적인 만남을 암시하는 말이다.

인우가 다시 태희를 만났을 때 불현듯 묶어주는 신발끈이나, 현빈이 인우와 2인3각 경기를 위해 발을 묶는 끈은 둘의 운명적인 인연을 상징하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것을 뉴질랜드의 광활한 자연을 배경으로 한 번지 점프의 끈으로까지 연장했지만 뮤지컬에서는 무대적 한계 때문에 번지점프 장면은 산 정상으로 대체했다.태희가 현빈으로 환생한 것이라고 확신하는 인우는 현빈에게 집착하면서 가정, 친구, 직장, 명예 모든 것을 잃는다. 한 사람을 기억하려는 인우의 몸부림을 바라보는 것은 안타깝다. 그런 인우의 반응을 이상하게 여긴현빈이 한순간 전생을 떠올린다는 설정은 다소 어설펐지만 인우에게 달려가다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은 마법 같은 연출로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현재와 과거에서 인우에게 달려가던 태희와 현빈이 동시에 사고를 당한다. 사고를 당한 현빈이 무리 속에서 일어날 때는 태희가 되었다가 인우와 함께 걸어나갈 때는 다시 현빈으로 돌아온다. 간단한 트릭이었지만 환생이라는 중요한 설정을 표현한 무대 아이디어가 드라마와 맞물리면서 감동을 준다.무엇보다도 뮤지컬에서는 윌 애른슨이 작곡한 아름다운 음악이 작품 내내 인우와 태희의 운명적인 사랑의 끈을 가슴속에 새겨놓는다. 9월 2일까지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에서 만날 수 있다.


볼 만한 뮤지컬 3편
잭 더 리퍼빅토리아 시대 10주 동안 다섯 명의 창부들을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름 없는 사람을 잭이라고 부르는 습관대로 그의 별명은 ‘살인마 잭’이 되었다. 이 실화를 무대로 옮긴 작품이 '잭 더 리퍼'이다. 스릴러와 멜로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인 조합을 한 이 작품은 원래는 체코 원작이었으나 한국 스태프들이 참여하여 드라마를 더 극적으로 각색했다.

연쇄 살인범을 쫓고 있는 앤더슨 형사에게 외과의사 다니엘이 나타난다. 그가 살인마 잭에게 병든 연인을 치료하기 위해 신선한 장기를 구매했다고 자백한다. 다니엘은 더 이상의 살인을 막기 위해 앤더슨을 돕는다. 사건의 냄새를 맡은 기자 먼로가 코카인에 중독된 앤더슨 형사의 약점을 잡고 독점 기사를 달라고 거래한다. 살인 사건은 이어지고 먼로는 특종을 올리지만 좀체 잭의 행방은 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나는 잭의 정체는 충격적인 반전을 선사한다.이번 공연에서는 무엇보다도 화려한 캐스팅이 눈에 띈다. 신성우, 유준상, 안재욱, 엄기준 등 뮤지컬에 종종 출연해온 연예인들이 대거 캐스킹됐다. 8월 25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왕세자 실종사건왕세자가 실종되었다는 보고로 극이 시작한다. 왕과 중전, 이들을 보필하는 하내관과 최상궁, 그리고 자숙과 구동이 주요 인물이다. 왕세자의 행방을 찾기 위한 수사 과정에서 권력이 집결된 닫힌 공간이 궁 안에서 서로에게 품었던 시기와 질투, 욕망과 사랑이 드러난다.

원작은 동명의 연극이었다. 연극에서는 수사를 진행하면서 왕세자가 실종되었다는 본질을 잊고 각자의 욕망에만 충실한 이기적인 인간상이 부각되었다면,뮤지컬로 각색되면서 숨겨왔던 구동과 자숙의 사랑이 강조된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궁녀가 되어야 했던 자숙과 그런 그녀 곁에 머물고 싶어 내시를 택했던 구동의 사연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뿐만 아니라 왕에게 외면 받고 자신이 데리고 있던 궁녀 자숙에게도 배신을 당하는 중전이나, 구동과 중전 그리고 왕에게까지 사랑을 받지만 그래서 더 불행한 자숙, 사랑을 드러내지 못하고 몰래 가슴앓이를 해야 했던 구동 등 입체적인 캐릭터들이 극을 풍성하게 한다.진술에 따라 똑같은 과거가 여러 번 다르게 리플레이 되는 극 형식이 소소한 재미를 준다. 10월 28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


영웅을 기다리며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딱 삼일의 행적이 기록되어있지 않다고 한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 발칙한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이 뮤지컬 ‘영웅을 기다리며’이다. 일본 무사 사스케는 이순신을 처치하기 위해 홀로 조선에 잠입한다. 그는 이순신을 생포하지만 문제는 그가 이순신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점이다. 바로 이순간 엉뚱하게도 ‘내 이름(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패러디가 생각난다면 바로 그런 코드가 뮤지컬 ‘영웅을 기다리며’가 취하는 태도다.

사스케가 이순신을 알아보지 못할 만도 한 것이 포로로 잡힌 이순신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와 매우 다르다. 막말을 일삼으며, 살기 위해 다소 비굴한 태도를 취하는 그에게서 성웅의 위엄은 찾아볼 수 없다.사스케와 이순신이 명나라 군사에게 겁탈 당하려는 막딸을 구해주면서 셋의 기묘한 동행이 이어진다.자신을 밝혀도 믿지 않는 상황이나, 자라를 보고 거북선을 생각해낸다는 억지 코믹 스토리는 억지스럽다고 여기면서 웃음을 멈출 수 없다.패러디와 정치적 풍자, 그리고 역사 비틀기 등 기존 역사 뮤지컬에서는 보기 드문 발랄한 접근이 이 작품의 특별한 매력을 발산한다. 10월 31일까지 PMC 자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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