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라는 두 글자는…
‘노래’라는 두 글자는…
가창력 있는 노래를 불러서인지 흑백영상 속의 그녀는 체구가 무척 커 보였다. 그러나 실제론 아담했다. 작곡가 고 이봉조 씨는 그녀가 해외가수들과 함께 서 있으면 “어디 박혀있는지 모르겠다”며 한복을 입으라고 했단다. “너무 작아서 드레스를 못 입었어요.” 영상 속 앳된 모습은 찾을 수 없지만 세월과 함께 성숙한 60대의 그녀가 관객과 마주 앉았다. ‘무인도’의 가수 정훈희다.
1970년대 각종 국제가요제에서 많은 상을 휩쓸며 대한민국을 해외에 알렸다. 관객도 빛 바랜 사진을 넘기듯 추억에 젖었다. JTBC의 ‘패티김쇼’ 덕분에 가수와 관객은 주거니 받거니 정겹게 시간 여행을 한다. 지난 10월 JTBC ‘패티김쇼’ 2회 녹화 현장에 갔다. ‘국내 최초 개인 토크쇼’가 46년 만에 부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패티김쇼는 1967년 TBC에서 방영됐다). 과거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통해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패티김은 한류 1세대이자 TV방송과 콘서트 가수 1세대다. 음악평론가 임진모 씨는 패티김이 데뷔할 당시인 1950년대 후반을 “트로트밖에 없던 한국 대중문화에 서구적인 음악이 필요했던 시기”라고 말했다. 미국식 ‘스탠더드 팝’을 앞세운 패티김의 노래는 1950~60년대 당시 대중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금의 장년층이 패티김의 노래만으로도 과거를 쉽게 떠올리는 이유다.
녹화장을 찾은 윤형구(61) 씨는 추석특집 ‘패티김쇼’를 보고 딸에게 방청신청을 부탁했다. “시골에서 패티김 레코드 판을 틀어놓고 보리타작을 했던 기억이 있지. 방송에서 패티김을 보니 그때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수줍은 듯 그는 껄껄 웃는다. 90년대까지 복고의 대상이 되어버린 요즘, ‘패티김쇼’는 마치 역사책을 뒤적이는 느낌마저 든다.
입담 좋은 신동엽의 진행도 감칠맛 난다. ‘패티김쇼’ 방청은 인터넷 접수와 현장에서 선착순 입장 두 가지 방법으로 가능하다. 인터넷과 현장입장의 관객 비율은 대략 7대 3정도다. 2회 녹화의 티켓배부가 이뤄진 지난 10일 오후 5시에는 녹화 장소인 호암아트홀(서울 중구 순화동 소재) 로비에 100여명의 관객이 기다렸다. 자녀들이 인터넷으로 방청을 신청한 경우도 있었지만 삼삼오오 짝을 지어 직접 신청한 관객도 상당수였다.
선착순 배부인 티켓은 1시간도 되지 않아 동이 났다. 김포에 사는 홍현숙(75) 씨는 티켓배부 시간보다 2시간 반 일찍 호암아트홀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 “버스와 전철을 타고 2시간 걸려 1등으로 도착했어요. 병원도 교회도 가지 않고 왔다니까. 지난번에도 신청했는데 당첨이 되지 않아 다시 신청했지 뭐야.” 녹화 현장은 장년층의 열기로 뜨겁다. 관객 호응도 젊은이들 못지 않다. 아이돌 가수 팬클럽이 울고 갈 정도의 ‘떼창’(모든 관객이 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큰 소리로 따라 부르는 것)이 등장했고, 노래 중간에는 “사랑합니다”라고 크게 외치는 관객도 있었다.
패티김과 출연자들은 쉬는 시간에도 관객과 호흡했다. 패티김은 대본을 보여주는 모니터 글씨가 너무 작아 대(大)자로 써주지 않으면 잘 안 보인다며 “돋보기 없이 보는 건 40대 후반까지”라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추석특집 녹화에는 샌드위치와 건강식 등 간식을 대기실로 보내는 ‘조공’(좋아하는 연예인과 주변 스태프, 출연자에게 보내는 간식 또는 선물)도 있었다고 한다.
‘패티김쇼’의 김형중 PD는 “천재 작곡가 길옥윤 씨와 작업한 패티김 씨의 노래는 명곡이 많지만 젊은 층에게는 고루한 옛날노래라는 인식도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현대적 해석을 통해 젊은 층에게 다가가고 멜로디 라인을 그대로 유지해 장년층이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구성했다고 한다. 1회 방송에서 패티김은 아이돌 그룹 ‘비스트’의 노래 ‘Fiction’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함께 불렀다. 그녀는 ”아이돌 노래가 쉬운 줄 알았는데 직접 불러보니 너무 어렵다”며 관객에게 하소연했다.
2회 녹화에서 패티김의 곡 ‘빛과 그림자’를 부른 가수 에일리는 “첫 소절은 슬픈 발라드, 두 번째 소절부터는 강렬한 기타 사운드와 강력한 리듬으로 편곡했다”고 말했다. “세대를 넘어 전설적인 선배님들과 함께해서 영광이었어요. 선배님들께서 칭찬도 많이 해주시고, 예뻐해 주셔서 정말 즐거웠습니다.”
관객 역시 젊은 층과의 만남을 즐거워한다. 2회 녹화를 본 이성혜(57) 씨는 “에일리가 누군지 오늘 와서 처음 알았다. 젊은 친구가 노래도 참 잘하고 우리 세대 노래를 부르는 모습도 참 예뻐 보였다”고 말했다. 임진모 씨 역시 “패티김의 노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기억하고 애청해야 세대를 넘어 이어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음반을 통해 또 후배들의 리메이크를 통해 영원히 이어질 수 있다.”
‘패티김쇼’는 장년층의 향수와 그들의 문화를 통해 세대간의 공감과 교류를 이끌어낸다. 2회 녹화에서 70대 패티김, 60대 정훈희, 40대 장혜진, 20대 에일리는 한 무대에 서서 ‘사랑이란 두 글자’와 ‘Heal the world’를 열창했다. 한국 대중문화의 시초인 패티김과 그 뒤를 따르는 후배들이 함께 모인 무대는 세대는 물론이고 시대까지 초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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