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병을 구조한 뒤 떠나겠다”
“부상병을 구조한 뒤 떠나겠다”
작전 첫 날부터 전사자가 나왔다. 무덥고 조용한 토요일, 거센 바람으로 아프가니스탄 동부 조이스 전진작전기지가 모래 회오리에 휩싸였다. 곧 조용하던 아침의 침묵이 깨졌다. 무전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응급후송팀(Medevac)! 응급후송팀! 응급후송팀!” 위장복을 입은 팀원 8명이 텐트를 박차고 나왔다. 응급후송헬기 더스트오프 72와 73기의 승무원들이었다. 그들은 훈련으로 몸에 밴 민첩한 행동으로 이륙 채비를 마쳤다. 교범을 그대로 따르면 블랙호크 한 대를 띄우는 데 보통 1시간 이상이 걸린다.
그러나 더스트오프 72, 73기는 5분도 채 안 걸려 공중으로 떠올랐다. 조종사들은 졸음을 쫓느라 연신 눈을 깜빡거렸다. ‘망치 내려치기 작전(Operation Hammer Down)’을 수행하는 부대의 구조 요청이었다. 파키스탄의 가장 위험한 부족 지역을 마주보는 아프가니스탄 쪽 국경 부근인 와타푸르 계곡의 탈레반 훈련소를 소탕하는 작전이었다.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이 바로 그곳에서 발목을 잡혔다.
탈레반·알카에다에 맞선 미국의 전쟁에서도 그 지역의 장악이 핵심이었지만 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매년 여름이면 미군이 그곳의 탈레반과 알카에다를 쫓아내지만 가을만되면 그들이 되돌아왔다. 특히 이번 작전은 미국이 전쟁을 끝내기 전에 아프간 정규군과 손발을 맞추는 마지막 중대한 임무였다.
그러나 작전은 시작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새벽 직전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던 치누크 수송 헬기가 나무에 걸려 비상 착륙하는 바람에 보병 1개 소대가 고립됐다. 다른 2개 소대는 새벽녘 계곡으로 진입하다가 매복한 적의 공격을 받았다. 정오가 되자 응급구조 요청이 쇄도했다. 가장 긴급한 요청은 산비탈 마을 감비르에서 왔다. 그곳의 미군 40명이 적의 맹습에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소대장이 퇴각을 지휘하려고 조금 높은 곳으로 올라가다가 목에 총을 맞고 사망했다. 깡마른 흑인 이병은 총상으로 턱이 없어지고 피에 서서히 질식해 갔다.
더스트오프 73기의 조종사 에릭 새비스턴(38) 선임준위는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전방을 주시했다. 기지에서 그는 못된 장난으로 유명했다. 프로야구팀 레드삭스의 열성팬인 병사가 사용하는 로커에 경쟁팀 양키스의 스티커를 잔뜩 붙여두곤 했다. 하지만 작전 중에는 달랐다. 새비스턴은 실전 경험이 많은 부조종사 케네스 브로드헤드(44)와 전략을 의논했다. 그들 뒤에는 기술담당 데이비드 캡스(24) 상병과 위생병 줄리아 브링글로 병장이 있었다. 브링글로는 최전선에서 보기 드문 여성 위생병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미군 백여 명이 전사한 지역의 상공을 날아갔다. 여러 개의 계곡이 이어진 곳이지만 참전군인들은 그곳을 ‘죽음
의 계곡(Valley of Death)’으로 부른다. 감비르에는 착륙이 불가능했다. 중상을 입은 흑인 병사 주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나무가 불타고 건물들이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동굴과 동조하는 주민의 집에 숨어 있던 탈레반 지원군이 속속 몰려들었다. 미군 공격헬기들이 비상 착륙지를 확보하려고 감비르를 폭격하는 두어 시간 동안 더스트오프 두 대는 다른 곳에서 구조활동을 개시했다.
넓적다리에 파편이 박힌 환자 1명, 총상을 입은 환자 2명, 그 다음 또 총상을 입은 환자 2명을 후송했다. 그곳에서도 착륙은 하지 않았다. 더스트오프 73기의 브링글로와 더스트오프 72기의 위생병은 로프를 타고 내려가 환자를 승강장치에 태우고 로프로 다시 올라가 헬기에 탑승했다. 총격도 없었고, 적도 보이지 않았다. 거의 훈련과 같았다. 그 임무를 마친 뒤 새비스턴은 더스트오프 73기의 기수를 감비르로 돌렸다. 갑자기 마을 전체가 눈에 들어왔다. 새비스턴은 ‘지옥의 묵시록’ 같은 전쟁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몸 속에서 아드레날린이 뜨겁게 솟구쳤다(A hot tide of adrenaline rushed through him). 방탄복 아래 미국 국기를 몸에 두른 캡스는 태어난지 5개월 된 아들을 생각했다. 11세의 아들을 둔 브링글로는 더 많은 환자에 대비해 기내에 정맥주사 백과모니터를 설치했다. 헬기가 현장에 접근하는 동안 그녀는 흥분을 가라앉히려고(trying to steady her nerves) 숨겨둔 곰 젤리 과자를 집어 한 웅큼 입에 털어 넣었다.
더스트오프 72기가 먼저 구조를 시도했다. 턱이 날아간 부상병은 키 큰 소나무에 둘러쌓인 절벽 앞에 지은 진흙 오두막 부근에 있었다. 헬기가 접근하자 탈레반이 총격을 가했다. 로켓 추진 수류탄이 헬기의 꼬리를 살짝 넘어 절벽에 맞아 폭파했다. 소총 사격은 더 정확했다. 그 총격으로 헬기의 유압장치가 고장났다. 구름이 잔뜩 끼어 달빛도 없는 저녁이 되가면서 더스트오프 72기는 구조를 포기하고 현장에서 벗어나 비상착륙했다. 더스터오프 73기에 탄 새비스턴, 브로드헤드, 브링글로, 캡스는 무거운 뭔가가 마음을 짓누르는 듯이 느꼈다. 자신들이 그 현장에 남은 유일한 응급구조팀이었다.
2011년 6월 25일이었다. 그 다음 48시간 동안 일어난 일은 항공 역사에서 가장 훈장을 많이 받은 임무 중 하나가 됐다. 뉴스위크는 군사 기록, 관련자 증언, 공개된 보고서를 기초로 그 임무의 전말을 처음으로 재구성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그토록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험준한 지형, 희박한 공기, 절박함 같은 그 당시의 세부사항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이 전혀 특별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기이한 사실이다.
미 육군의 항공 앰뷸런스 부대는 미군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시설을 갖춘 응급구조대다. 영웅주의는 그들의 기본적인 임무에 새겨져있다(heroism is inscribed in its basic job description). 그들의 헬기는 생명을 앗는 게 아니라 생명을 구하는 임무를 띤 또 다른 전쟁의 최전선에서 활동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의 임무는 제대로 수행된다.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전투 중 부상한다면 살아서 귀향할 확률이 90% 이상이다. 전쟁 역사에서 최고의 생존율이다. 베트남전의 경우76%, 제2차 세계대전은 70%였고 그 전에는 당연히 훨씬 더 저조했다. 10년 간의 피비릿내 나는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인 측면 중 하나다. 병사가 어디서 쓰러지든 그를 대개 1시간 안에 야전병원으로 후송시키고, 그 후 일주일 안에 귀향시켜 더 특별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이룬 성과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1차 응급처치다. 거의 모든 부상병이 경험하는 헬기 후송을 말한다. 더스트오프 73기의 조종사 새비스턴은 “헬기 후송은 부상병에게 꼭 지켜야 할 약속과 같다(It’s almost sacred)”고 말했다. 더스트오프 73기 승무원 중 그 일에 처음부터 직접 뛰어든 사람은 없다. 새비스턴은 10대 시절 버지니아주에서 해군 예비군으로 입대했다. 9·11 후 육군으로 옮겨 여섯 차례의 시도 끝에 육군 항공학교에 들어가 조종사가 됐다. 캡스는 네브래스카 출신으로 고교 시절 레슬링 선수였다.
10대 시절 9·11 공격으로 불타는 세계무역센터 타워의 강한 기억과 막연히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서 입대했다. 브로드헤드는 사우스플로리다의 튜바 연주자로 육군 군악대에 들어갔다. 10년 뒤 항공학교에 들어가 조종사가 된 뒤 최초의 사지절단 환자를 포함해 장병 수백 명의 목숨을 구했다. 그는 수년전에 전역할 수 있었지만 육군 응급후송대가 아내와 쌍둥이 아들을 구해준 은혜를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난산을 앞둔 그의 아내를 캘리포니아 시골에서 샌디에이고까지 헬기로 후송해 주었다. 브로드헤드는 그들에게 빚졌다고 믿는다. 그중에서도 브링글로의 이력이 가장 곡절이 많고 흥미롭다. 엔지니어의 딸로 대학에서 학생회장까지 지냈지만 중퇴한 뒤 도랑을 파고 통나무를 나르며 생계를 꾸렸다. 20대 후반 그녀는 하와이에서 건설 도급업자로 일했다. 그곳에서 결혼하고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부자들의 집을 짓는 데 싫증을 느꼈다. 또 동료가 건설현장에서 사다리에서 떨어지거나 손가락이 잘려 나가는 부상을 당했을 때 그들을 진정시키고 도울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응급구호대원이 되기로 마음먹고, 훈련 비용을 마련하려고 입대했다. “가족과 친구들은 내가 정신나갔다고 생각했다(My family and friends thought I’d completely lost my brain)”고 그녀는 돌이켰다. 어떤면에서는 사실 그랬다. 당시는 2007년이었고 모병 담당자도 “부인, 전쟁터에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아세요(Ma’am, you do know you’ll be going to war)?”라고 말했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응급후송대원들은 공격 대상이 돼선 안 된다. 그러나 그 협약은 대부분 무시된다. 예를 들어 ‘망치 내려치기 작전’ 후 6개월 동안 미 육군 응급후송 헬기(군인만이 아니라 민간인도 구조한다)는 57차례나 공격 받았다. 전투에서 비무장으로 활동하는 데는 상당한 희생이 따른다. 정서적인 문제가 많이 생기고 자주 사상자가 발생한다. 육군 응급후송대는 올해로 설립 50주년을 맞았지만 근본적으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 잘랄라바드에 있는 더스트오프 73기 대원막사의 외벽에는 “헬기로 생명을 구한다(burning gas to save your ass)”는 현수막이 붙어있다. 그러나 그들의 위장복에 부착된 휘장에는 더 음울한 신조가 새겨져 있다. 최초의 응급후송 부대장 찰스 켈리 소령의 마지막 말이다. 그는 베트남에서 위험한 구조 현장을 떠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환자를 후송하려다가 가슴에 총을 맞아 사망했다. 그는 “부상병을 구조한 뒤 떠나겠다(I’ll leave when I have your wounded)”고 말했다.
감비르의 진흙 오두막에서 턱을 잃은 이등병의 상태는 시간이 갈수록 더 나빠졌다. 그의 소대 선임하사는 지상에서 절박하게 구조를 요청했다. “제발 착륙해 달라”고 그가 말했다. “이 산에서 그를 데려가 달라.” 더스트오프 73은 착륙을 시도할 준비를 갖췄지만 주변의 전투가 더욱 치열해졌다. 기지에서는 착륙 지점이 확보될 때까지 대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들은 적어도 그때는 명령을 따랐다.
찰스 켈리의 유언을 새기는 일도 중요하지만 응급후송팀의 전사는 사실 무의미하며 이 계곡에서 마지막 팀을 잃는 것 자체가 너무도 비극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지휘소 컴퓨터에서 다른 구조 요청이 나왔다. 심한 탈수증이라는 비교적 사소한 문제였다. 하지만 탈수증 환자를 구조하러 가면 대원들을 진흙 오두막의 전투에 휩쓸리게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새비스턴은 그 임무를 수락했다. 그는 몇km 떨어진 곳으로 헬기를 몰았다. 수백m나 더 높은 고지대였다.
그 환자는 30m 높이의 소나무가 울창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이 세고 거의 완전히 어두워졌다. 비행하기 가장 어려운 조건이었다. “로프로 끌어올리기에는 최악의 상황(The worst possible situation to do a hoist in)”이라고 새비스턴은 생각했다. 브링글로의 생각도 사실 똑같았다. 그래도 그녀는 노란 로프 고리에 몸을 묶고 수목 한계선 위로 몸을 기울인 뒤 뛰어내렸다. 약 50m 상공의 밤하늘에서 바람 때문에 그녀는 서커스 곡예사처럼 빙빙 돌며 하강했다.
착지한 뒤 방향감각을 되찾으려고 잠시 누워 있어야 했다. 그런 다음 그 병사에게로 기어갔다. 몸집이 컸다. 사실 그녀보다는 남자병사들이 거의 몸집이 크다. 그녀는 환자를 승강장치에 태우고 자신도 올라탄 뒤 캡스에게 로프를 올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약 3m간격으로 쉬면서 서서히 공중으로 올랐다.
바람이 몰아치면서 승강장치가 좌우로 흔들렸다. 중심선을 벗어나 다시 흔들려 돌아올 때 고목의 뾰족한 가지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위에서 캡스는 브링글로가 몸을 비꼬는 모습을 지켜봤다. 왼쪽 다리로 충격을 흡수하며 나뭇가지를 밀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낚시 미끼처럼 그 가지에 찍힐 상황이었다. 브링글로는 직접적인 충격은 피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나뭇가지가 정강이를 후벼파면서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뼈가 거미줄 같이 골절됐다. 나중에 그들이 지상에 도착했을 때 한 간호사는 브링글로가 환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상처 부위를 직접 세척한 뒤 절룩거리며 헬기로 돌아갔다. “괜찮아?” 캡스가 브링글로에게 물었다. “견딜 만해”라고 그녀가 대답했다. “이제 그만 할건가(You need to quit)?” 새 비스턴이 반쯤 히죽거리며 물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제 완전히 어두워졌다. 상공에서 감비르는 꺼져가는 캠프파이어처럼 보였다. 전투 응급후송 임무는 대개 착륙해서 이륙할때까지 39분이 걸린다. 그러나 이미 몇 시간이나 지났고 지상의 선임하사는 턱을 잃은 병사가 몇 분 뒤면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군은 부상병의 90% 이상 생존율을 자랑하지만 그 과정에는 끔찍한 일이 따른다. 부상병들은 방탄복이 없는 신체 부위를 조준사격당하기 때문에 대개 얼굴이나 사지에 총을 맞는다. 브링글로와 그의 팀이 구조하는 환자 대여섯 명 중 한 명은 너무도 피를 많이 흘리기 때문에 헬기 안에서 호스로 피를 씻어내야 한다. 브링글로는 이번에도 그럴 각오를 했다.
브링글로는 나중에 한 증언에서 “솔직히 말해 내 몸의 모든 세포가 그 진흙 오두막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In an honest assessment of myself, every cell in my body was against going back)”고 말했다. “그 현장은 앞과 좌우 삼 면에서 공격을 받아 통제가 불가능했다.” 브링글로는 임무를 수행하려면 두려움을 억눌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두려움을 떨쳐야 할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녀처럼 전투에 참가한 여성은 아주 드물기 때문에 많은 눈이 지켜본다는 사실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여성은 정서적으로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 브링글로는 늘 그런 시각을 불식시키려고 애썼다. “나는 군에서 여성이 아니라 군인으로 처신하려 한다(I try to conduct myself in the military not as a woman but as a soldier)”고 그녀는 나중에 설명했다. “성별이 아니라 직업의 문제이기 때문이다(because we’re talking about a job, not a gender).”
승강장치를 이용한 환자 후송을 감행하기에는 너무 어두웠다. 브로드헤드와 새비스턴은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했다. “지붕 위에 착륙하라!”고 지상에서 선임하사가 다급하게 말했다. 조건이 완벽한 상황에서도 온당한 방법이 아니었다. 무게 8t인 헬기를 진흙 지붕에 착륙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완전히 착륙하지 않고 한쪽 바퀴만 루프라인에 살짝 닿는 것이다. 머리를 손바닥으로 살짝 치듯이 말이다.
모든 더스트오프 조종사들은 공기가 희박한 산악지대에서 헬기의 기계적 한계를 시험하려고 바위 위에서 그런 연습을 한다. 그러나 훈련할 때는 공기가 이처럼 희박하지도 않고 공간도 이 정도로 협소하지 않은 조건이다(But the air is never this thin, and the space is never this tight). 진흙 오두막의 지붕을 뚫고 자라는 나무도 있었다. 새비스턴은 자신이 앉은 쪽으로 착륙을 시도했지만 공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세 차례를 시도한 뒤 물러났다. “우릴 두고 떠나는 거야?” 선임하사가 무전으로 소리쳤다.
이번에는 브로드헤드가 자기 쪽에서 착륙을 시도했다. 대부분 전투 지역에서 5000시간 이상을 비행한 노련한 브로드헤드는 그 지역에서 선임 비행교관이었다. 그가 못한다면 아예 불가능한 착륙이 확실했다. 그는 계속 하강했다. 회전날개의 날카로운 소리가 산을 뒤덮었다. 응급후송팀을 또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파치와 키오와 공격헬기가 원형 방호사격으로 지원했다. “우리 헬기의 동체가 좌우로 흔들렸다”고 새비스턴은 돌이켰다. “멋졌다. 독립기념일과 같았다.”
블랙호크는 백미러가 없기 때문에 캡스와 브링글로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브로드헤드에게 착륙 지점을 지시했다. “왼쪽으로 5cm 이동. 정지.” “오른쪽으로 2.5cm 이동. 정지.” 미군 공격헬기들이 적을 진압하려고 쏘는 미사일의 충격이 몇 초 간격으로 조종석에 전해졌다. “아군 헬기의 공격이야!” 브로드헤드가 대원들을 진정시키려고 소리쳤다. “괜찮아. 괜찮다고.” 바로 그때 로켓 추진 수류탄으로 무장한 탈레반이 근처 가옥의 지붕 위에 나타나 헬기를 겨냥했다. 곧바로 미군은 30mm 기관총으로 그들을 제압했다.
몇 초 후 그들은 진흙 오두막 지붕에 헬기를 갖다 붙였다. 브링글로는 나중에 이렇게 돌이켰다. “물속에 너무 오래 있어서 모든 걸 포기하고 폐에 물을 받아들여야 할 때라는 바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a bit like being under water for too long and finally accepting the fact that it’s time to take that first breath of water into your lungs).” 그녀는 화물칸 문을 열고 총격전 속으로 들어갔다. 먼지 때문에 숨도 쉬기 어렵고 눈을 뜰 수도 없었다. 그녀는 부상병을 소리쳐 불렀다. 병사 세 명이 올라탔다.
두 명은 부상병을 부축했다. 부상병의 눈동자는 마치 기도를 하듯 말려 올라가 있었다. 심하게 부상한 환자는 대개 헬기 엔진보다 더 크게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그는 기이하게 조용했다. 기내의 푸른 불빛 속에서 브링글로는 환자의 한 콧구멍으로 호흡관을 삽입하고 기도를 연 뒤 팔에 정맥주사를 꽂았다. 그녀는 어떤 상태의 팔이든 필요하다면 뼈에 구멍을 뚫어서라도 정맥주사를 놓는 훈련을 받았다.
그녀는 응고제에 적신 거즈로 지혈을 시도했다.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너무 늦었어”라고 그녀가 인터콤으로 조종석에 말했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조이스 전진작전기지에서 잠을 깼다. 전날 입은 옷차림 그대로였다. 브링글로의 위장복은 피가 스며들어 짙은 분홍색으로 얼룩져 있었다. 임무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기억은 그들 아무도 잊지못할 흐릿한 슬로모션 몇 장면으로 남아 있다.
브링글로가 6m 높이의 바위에 로프로 내려앉는 장면. 헬기가 기계적 한계에 다달아 흔들리는 가운데 새비스턴이 고도 3km 능선 위에 맴도는 장면. 캡스가 헬기 밖으로 다리는 뻗어 빈 플라스틱 시신 운반용 부대가 꼬리 날개에 닿기 전에 낚아채는 장면, 그리고 극적인 종말을 장식한 마지막 두 건의 구조가 있었다. 그 두 건 모두에서 주인공은 브링글로였다. 그녀는 다시 감비르의 진흙 오두막 지붕에 로프를 타고 내려 시신을 수거했다.
착륙 지점에 총탄이 빗발쳤고 다시 로프로 올라가는 도중에도 총탄이 귓전을 스쳤다(Bullets flecked the landing zone and sizzled past her ears during the hoist back up). 이 같은 상황에서 15초 동안 임무를 수행하자 부근의 아파치 공격헬기 대원들이 그 용감한 행동에 환호성을 올렸다. 그동안 새비스턴과 브로드헤드는 무슨 수를 쓰든 헬기 기체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저격당한 조종사가 너무도 많기 때문에 조종석은 수술 테이블로 젖혀질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안전 지대로 이동했을 때 브로드헤드는 바로 200m 떨어진 운동장에서 희한한 장면을 목격했다. 축구경기가 진행 중이었다. 미국에선 소방차가 지나가도 아이들이 경기를 멈추지만 여기서는 헬기가 총탄 세례를 받으며 날아가도 경기가 계속된다. 그들은 마지막 환자 후송을 위해 다시 산악지대로 돌아갔다. 사흘 동안 날씨가 좋지 않았지만 비행은 할 만했다. 브링글로가 환자와 함께 헬기 아래 15m에 매달려 있을 때였다.
갑자기 구름이 헬기를 감쌌다. 기내에서는 밖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브링글로가 올려다 봤을 때 축축한 회색 구름 속으로 사라진 로프만 눈에 들어왔다. “조금만 참아요.” 브링글로가 환자에게 말했다. “곧 구름을 벗어날 거에요.” 새비스턴과 브로드헤드는 비상상황을 무전으로 알렸다. 시야가 전부 가려진 상태에서 그들은 기계 조작 만으로 계곡 속에서 상승했다. 몇 분 동안 오르자 갑자기 그들은 구름 위로 튀어 올랐다.
그들은 그 사흘 동안 14명의 병사를 구조했고, 세 차례 재보급을 받았으며, 시신 두 구를 회수했고, 매일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제 그들은 잘랄라바드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친구와 가족에게 온라인으로 연락했다. 팀원들은 그 임무를 두고 서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후송한 환자 모두가 목숨을 구했다는 소식을 듣기 전에도 그 임무가 특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they all understood it was special even before they got the news that every one of their hoists survived). 턱에 심한 부상을 입은 그 흑인 병사는 이미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독일의 포근한 병원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는 독일에서 턱 성형수술을 받은 뒤 다시 미국으로 이송될 예정이었다.
“언젠가 그 청년은 자식이나 손자손녀를 안고 자기 집 현관에 앉아 있을 거야. 죽지않고 살아서 말이야.” 다른 더스트오프 조종사가 기지에서 새비스턴에게 말했다. “그게 자네가 받는 보상이야. 자네가 그를 도왔다는 사실을 아는 것 말이야.” 다른 보상도 있었다. 지난 겨울 더스트오프 73기의 그 임무는 미 육군 항공협회의 최고 영예인 ‘올해의 공해 구조’ 상에 선정됐다. 지난 여름 브링글로는 뉴욕에 가서 미군위문협회(USO)의 ‘올해의 여성’ 상을 받았다. 최초의 여성 4성 장군 앤 던우디, 최초의 록히드마틴 여성 사장 매릴린 휴슨과 나란히 섰다. 그리고 더 큰 상이 남아 있었다.
지난 달 포트 드럼과 포트 러커에서 열린 행사에서 브링글로, 브로드헤드, 새비스턴은 비행수훈 십자훈장을 받았다. 응급후송 부대 초대 부대장이었던 켈리 소령도 비슷한 임무로 그 훈장을 받았다. “위태로운 산악 구조 임무에서 나무 사이로 한쪽 바퀴로 착륙했다”고 켈리의 고향 신문이 보도했다.
몇 주 뒤 켈리는 훈장을 받는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전사했다. 더스트오프 73기의 세 명은 그보다 운이 좋았다. 그들은 “작전 중 두드러진 용맹성과 대담성”으로 훈장을 받았다. 브링글로에게는 특히 격찬이 쏟아졌다. 그녀는 여성으로서 7번째, 전투 임무에서 여성으로서 4번째로 그 훈장을 받았다. 대서양을 횡단한 미국 최초의 여류 비행사 아멜리아 에어하트가 받은 훈장이다.
브로드헤드는 마침내 전역을 생각 중이다. 캡스는 ‘망치 내려치기 작전’으로 무공훈장을 받은 뒤 이미 전역했다. 새비스턴은 앨러배마주 포트 러커에서 비행 교관으로 활동하며 전투의 휴식을 즐기고 있다. 브링글로는 내년의 재파견을 준비 중이다. 최근 그녀는 응급구호대원 고급과정을 마쳤다.
‘죽음없는 전투’라는 완벽한 전쟁을 위한 미군의 새로운 노력(a new effort in the Army’s push for a perfect war, a fight without dying)에서 개설된 과정이다. 중동에서 귀환하는 병력이 많아지면서 올해는 예년에 비해 사상자가 당연히 적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투가 끝났다는 뜻은 아니다. 더스트오프 73기의 영웅적인 임무 수행이 끝나고 한 달 뒤 미군 정보기관은 아프가니스탄 국경 부근의 탈레반·알카에다 훈련소에서 새로운 활동이 포착됐다고 보고했다. ‘망치 내려치기 작전’으로 조직이 와해된 후 그들의 재편성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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