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꽂히면 10년 기다리는 우린 가치투자가

꽂히면 10년 기다리는 우린 가치투자가

최적의 타이밍을 기다리는 가치투자가들. 싼 가격에 주식을 살 때마다 시간도 사야 한다. 투자가 옳았음을 알기까지는 적어도 3년이 걸린다. 외로운 싸움 속에서도 자신을 이해하는 동지는 큰 힘이 된다. 허남권(49) 신영자산운용 본부장과 이채원(48)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부사장은 서로 의지하며 가치투자가의 길을 걷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가치투자가 허남권 신영자산운용 본부장과 이채원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부사장. 고집스럽게 자신의 투자원칙을 지켜온 두 사람을 10월12일 여의도 신영증권 6층 회의실에서 만났다. 두 사람이 자신 있게 내민 건 펀드 운용 성적표다. 그들의 투자철학과 신념이 그대로 담긴 결과다. 두 사람을 스타 펀드매니저 반열로 올린 펀드들이기도 하다.

허 본부장이 맡은 신영마라톤펀드는 올해 4월 딱 10년 됐다. 2002년 설정 이후 누적 수익률은 300%가 넘는다. 그가 운용 중인 ‘신영밸류고배당증권투자신탁’ 역시 2003년 5월 설정 후 수익률이 346.9%에 이른다. 이 부사장은 2006년부터 ‘한국밸류 10년투자펀드’를 운용한다. 10월14일 기준 설정 이후 누적 수익률은 98.1%. 이 펀드는 지난해 국내 증시가 10%가량 하락하면서 대부분의 펀드가 손실을 냈을 때도 플러스 수익률을 기록했다.

가치투자가라는 공통점 외에도 두 사람은 닮은 점이 많다. 금융가에서 유일하게 회사 명함을 바꿔 본 적이 없다. 여의도 입성 시기마저 똑같다. 88년 허 본부장은 신영증권, 이 부사장은 동원증권에 입사했다. 96년 두 증권사가 계열사로 자산운용사를 설립할 때 창립멤버로 합류했다. 둘 다 올해로 회사에 입사한 지 25년 됐다. 이직을 하지 않은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경영자가 그들의 경영철학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허 본부장은 “펀드 매니저에겐 ‘자신의 투자 가치관을 실현할 수 있느냐’가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들려준다. “스카우트 제안은 몇차례 있었지만 특별히 옮길 이유가 없었어요. 경영자가 운용사 설립 때부터 소신껏 펀드를 운용하라며 믿고 맡기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 원칙엔 지금도 변함이 없고요.”

이채원 부사장은 기업 오너가 금융산업을 잘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맞장구쳤다. 원국희 신영증권 회장과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부회장은 증권업계에서 탄탄하게 기초를 닦은 금융전문가로 손꼽는다. 특히 이 부사장은 김 부회장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99년 IT열풍으로 닷컴 주식이 급등했을 때 그는 가치주 전용 펀드를 운용했다. 지수가 20% 올랐는데 펀드는 거꾸로 20% 빠졌다. 법적으로 가치주 전용 펀드는 기술주를 단 한 주도 살 수 없었다.

투자자들의 항의가 빗발치면서 이 부사장은 마음 고생이 심했다. 그는 심각하게 회사를 그만둘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그때 김 부회장이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회사 돈 줄테니 증권에 와서 고유계정을 운용하라고 하시더군요. 가장 힘든 시기에 큰 힘이 됐습니다. 이후 증권사에서 6년 동안 고유계정 700억원을 굴려 2000억원의 수익을 냈어요. 보답을 한 거 같아 다행입니다(웃음).”



입사 초기 ‘주식에 미쳤다’ 소문두 사람이 증권사에 입사한 데는 사회적 분위기가 한 몫 했다. 88년은 코스피 지수가 1000을 돌파했을 때다. 최고의 직장은 당연 증권사였다. 대학을 졸업한 우수 인재들이 앞다퉈 증권사로 몰렸다. 허 본부장 역시 4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신영증권에 입사했다. 고려대에서 행정학을 전공한 그는 행정고시를 준비했었다. 공부를 할 수록 적성에 맞지 않았다. 과감히 진로를 증권사로 바꿨다.

이 부사장은 중앙대 경영학과를 나왔다. 그가 경영학과를 택한 이유는 단 한가지. 회사원이 되기 위해서다. 어린 시절부터 멋진 슈트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회사원이 멋있어 보였다. 두 사람 모두 증권사에 입사한 후 주식 투자가 천직임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2년 후 각각의 회사에서 허 본부장과 이 부사장은 ‘주식에 미쳤다’는 얘기를 들을 만큼 투자에 푹 빠졌다.

이 부사장은 주식투자 편람책자를 통째로 외웠다. 수 백 개의 종목 코드를 암기했다. 허 본부장 역시 밤새 주식을 공부했다. 당시엔 기업 분석보다 테마주나 감으로 투자하는 때였다. 한 순간에 큰 돈을 날릴 수 있었다. 그는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 기업의 내재가치를 분석하는 바텀 업(Bottom Up) 밖에 없음을 그때 깨달았다”고 얘기했다. 열심히 주식 투자를 공부한 보람이 있었다. 신영증권과 동원증권은 96년 운용사 설립을 인가 받았다. 두 사람 모두 이때 펀드매니저로 변신했다.

허 본부장과 이 부사장이 가치투자가가 된 계기는 뭘까. 이 부사장은 “돈 깨지는 걸너무나 싫어한다”고 강조한다. 펀드를 떠나 개인적인 성향이라고 덧붙였다. “리스크를 질 수 있는 일을 싫어해요. 농담 같지만 위험한 일은 안 합니다. 놀이기구 한번도 탄적이 없는 걸요(웃음). 중요한 자료는 5~6개씩 보관합니다. 보통 책이나 음악 CD도 두 개씩 사요. 정말 아끼는 제품일 땐 세 개 구입합니다.”



기다림은 최소 3년, 기쁨은 두 배이 부사장 얘기에 허 본부장이 “아무래도 소심한 성격은 비슷한 거 같다”며 웃었다. 그는 “손해 보는 걸 싫어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치투자가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시장을 이기려면 충분한 시간을 갖고 투자할 수 있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자산은 사이클을 갖고 움직이기 마련이지요.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뚜렷한 투자원칙을 갖고 투자를 하면 수익을 거둘 수 있지요. 여기에 투자 일관성을 갖는다면 남보다 사이클 반복 횟수가 늘어납니다.” 이 부사장은 “기다리는 것은 자신있다”고 얘기한다. “주식만 사면 그 주가는 떨어집니다. 그리고 2~3년 후에 오릅니다. 그러니 기다릴 수 밖에 없어요.”

기다리는 일은 허 본부장도 만만치 않다. “맞습니다. 빨라야 3년이죠. 10년 이상 들고 있는 종목들이 수두룩 합니다. 분명 매출과 배당이 꾸준히 늘고 있음에도 주가가 제자리라면 언제까지 들고 있을 수 있어요. 기다림이 클수록 보상이 큰 종목이 많아요. 파라다이스는 5~6년 전에 2000원부터 4000원에 사들였죠. 10배 가량 올랐습니다. 10년 전에 투자한 한세실업도 10배 이상 수익을 냈지요.”

이 부사장은 기다린 보람을 갖게 해준 종목으로 동원산업과 유진테크를 꼽았다. “그나마 동원산업은 꾸준히 올랐어요. 5만원부터 샀는데 30만원까지 올랐으니까요. 유진테크는 1000원에 사서 반 토막 나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다시 기업 탐방을 가서 꼼꼼히 분석했는데 내재가치가 뛰어났습니다. 리스크도 없고요. 과감히 더 사들였습니다. 현재 유진테크 주가가 1만3700원입니다.” 두 사람은 주식을 살 때보다 팔 때 고심이 많다고 입을 모은다. 허 본부장은 주가가 내재가치를 넘어설 때 판다고 얘기한다.

문제는 그때 가격에 버블이 생긴다. “보통 남들이 사기 시작할 때 팔기 시작하는 거 같아요. 가치투자가는 값싼 가격에 사지만 시간도 삽니다. 오랜 시간 기다렸다는 보상심리 때문에 팔고 싶은 욕구가 크지요. 그러다 보면 잔치상를 뺏길 수 있어요. 그래서 버블 전부터 버블 끝날 때까지 파는 방식을선호합니다.”

반면 이 본부장은 무조건 내재가치보다 더 많이 오르면 판다. “보통 팔면 주가가 두 배는 더 뛰는 거 같아요. 충분히 올랐다는 생각에 2만원에 판 종목이 100만원까지 치솟은 경우도 있습니다. 꾸준히 이익 내고 배당 주면서 매년 10%씩 오르는 주식만 있으면 마음이 편할텐데요(웃음).”



자신이 운용하는 펀드에 투자두 사람은 펀드 자금 운용에도 닮은 점이 있다. 투자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개인 자산을 자신이 운용하는 펀드에 넣었다. 허 본부장은 회사 펀드매니저들에게 “가난한 매니저는 펀드를 운용할 자격이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남의 돈을 운용하는 펀드매니저가 가난하면 말이 안되죠. 자신이 운용하는 펀드에 돈을 넣어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솔선수범을 보이는 게 당연합니다.” 실제로 허 본부장은 여유자금을 자신이 운용하는 펀드에 분산해 넣어놓고 있다. 현재 원금의 5배 이상 수익을 냈다고 귀띔했다.

이 부사장도 마찬가지. 그는 “한국밸류10년투자신탁과 운명을 같이한다”고 말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 빼곤 모두 이 펀드에 투자했기 때문이다. 이 뿐 아니다. 한국투자증권 일부 고유자금은 물론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과 김남구 부회장의 자금도 투자돼있다. 그만큼 이 부사장의 어깨는 무겁다.

인터뷰 말미에 주식 시장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허 본부장은 내년 초까지 주식시장은 크게 움직이지 않을 것으로 봤다. 현재 시장이 움직이는 것은 유동성 효과라고 분석했다. 무엇보다 투자들이 인정해야 할 것은 저성장·저금리 시대라는 것이다. 그는 적어도 금리 두 배 이상의 수익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변동성이 높은 장에선 주식형 펀드에 올인하기 보다 주식혼합형펀드가 나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시장 전망에 대한 시각은 이 부사장도 비슷했다. 그는 2~3년 이상 주식시장이 정체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요즘 주식시장에선 모바일·게임·엔터테인먼트 등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어요. 성장이 둔화되고 불확실성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이럴 땐 막연한 것보다 확실한 가치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일본과 중국 쪽에 수출하면서 경쟁력이 있는 필수 소비재에 관심이 높습니다.”이 부사장 얘기에 허 본부장이 한 마디 보탰다. “경기 변동에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성장이 가능한 우직한 기업이 언제나 정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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