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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잠 아버 지허(Langsam Aber Sicher <느리지만 확실하게>)”

“랑잠 아버 지허(Langsam Aber Sicher <느리지만 확실하게>)”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R&D예산 늘리는 뚝심…단기 실적 연연하지 않고 기술력 확보에 전력



#1. 프랑크푸르트에서 로렐라이 언덕을 향해 가는 길은 곳곳에 선고성과 포도밭으로 여행객의 발길을 사로 잡는 곳이다. 기대감으로 길을 서둘렀는데 차가 막힌다. 왕복 2차선 강변도로에 한 차선이 공사 중이다. 공사 구간 밖에서 양쪽 차선을 막고 수신호로 한 쪽씩 내보내는데 차가 멈추는 순간 운전자들은 기다렸다는 듯 시동을 끈다. “왜 이렇게 안 가요?” “글쎄요. 공사하나 봐요.” 동행한 운전자는 무심한 듯 답한다. 다들 시동을 끄고 여유를 부린다. 30분을 기다렸다.

지나고 보니 공사 구간은 겨우 200m 남짓. 한국이었다면 일주일이면 끝났을 이 공사를 석 달째 하고 있단다. “한국에서는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다시 깔면 그만이지만 여기는 흙이 나올 때까지 40~50㎝ 이상을 판 뒤에 기초 공사부터 다시 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려요.”자주 오가는 사람은 불만을 터뜨릴 법도 한데 오히려 기다리는 동안 뒤차 운전자가 다가와 왜 시동을 끄지 않느냐고 타박이다.

#2. 코트라(KOTRA) 뮌헨 무역관 사무실. 얼마 전 사무실 카펫을 교체했다. 겨우 바닥에 있는 카펫을 바꾸는 공사에 직원들은 무려 한 달 넘게 불편을 겪었다. 처음에는 “왜 이리 오래 걸리느냐”며 불평했던 직원들은 나중에 마음을 바꿨다. 카펫을 까는 인부의 손길에 진심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깔았던 카펫을 다시 걷어내길 수 차례. 몰입한 인부의 얼굴에선 내내 땀이 흘렀다. 조금이라도 들뜨는 부분이 없어야 하고 자투리 공간이 남지 않아야 한다. 공사를 마치고 그가 떠나던 날 직원들은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이공계 신입생 2011년 24% 증가독일은 느리다. 겉보기엔 그렇다. 빠르게 변하는 한국 사회와 공기부터 다르다. 대부분이 스마트폰을 쓰지만 여전히 지하철과 기차에선 신문과 책을 읽는다. 길거리에 흐르는 음악도 3~4년이 지난 노래가 많다. 유행 변하는 속도가 더디니 세대 간의 격차도 덜하다. 특유의 가족적인 문화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클럽에서는 40~50대들이 20~30대와 함께 춤추고 즐긴다.

독일은 느리지 않다. 실행 속도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르다. 다만 준비 단계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뿐이다. 경제 정책을 마련하는 정부나 현장에서 뛰는 기업이나 대체로 호흡이 길다. 단기적인 성과보다는 장기적인 플랜에 중점을 맞추고 속도를 조절한다. ‘랑잠 아베 지허(Langsam Aber Sicher)’는 이러한 독일 사회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느리지만 확실하게’라는 뜻이다. 개개인에게서는 독일인 특유의 장인정신이 묻어나고, 국가 전체로 보면 기술에 대한 애착이 느껴진다.

중국이 제조업 분야에서 강국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부터 독일은 신흥국이 따라올 수 없는 첨단 기술을 선점하는 방향으로 장기적인 R&D전략을 짰다. 이에 따라 2000년 이후 독일의 R&D 관련 투자는 해마다 크게 늘어 올해는 최초로 600억 유로(민간 포함)를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금융위기 여파로 GDP가 5.1% 감소한 2009년조차도 R&D 투자와 교육비만은 거의 손대지 않았다. 오히려 대학과 국책연구소의 R&D 투자는 5% 늘렸다.

2000년 3월 유럽 정상들은 유럽을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지식 기반을 갖춘 경제공간으로 만들자는 데 합의하고 각국의 R&D 투자수준을 2010년까지 국내총생산(GDP)의 3%를 달성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그러나 독일을 제외한 다른 유럽국가들은 대부분 이에 미치지 못했고 평균 1.9%에 머물렀다. 그에 반해 독일은 지난해 GDP의 2.8%를 달성해 유일하게 목표에 근접했다.

2010년 독일 연방통계청의 통계에 따르면 독일은 국가기관과 사설연구소 9만531명, 대학연구소 12만784명, 기업연구인력 33만7211명 등 총 54만8526명의 R&D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1948년부터 17개의 노벨상을 수상한 막스프랑크를 비롯해 프라운호퍼(Fraunhofer), 라이브니츠(Leibniz), 헬름홀츠(Helmholtz) 등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자연과학 연구소도 16개나 있다.

지난해 독일 대학신입생 51만5900명 중 이공계는 11만5800명으로 2010년에 비해 24%나 증가했다. 교육제도 개편에 따라 진학률이 대폭적으로 증가한 탓에 전체 신입생 증가율도 16.2% 상승하기는 했지만 이공계는 이보다 높은 24%로 큰 증가세를 보였다. 이공계 기피현상이 지속되면서 기업들마다 현장 핵심 기술인력이 부족하다며 울상인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다.

기업들이 스스로 R&D 투자 확대에 나서고 있다는 점이 더 고무적이다. 폭스바겐은 매년 70억 유로를 R&D에 투자하고 있다. 독일에 있는 연구인력만 3만명이다. 지멘스 역시 매년 R&D에 매출액의 5% 이상을 투자한다. 지멘스의 암베르크 공장의 R&D 인력은 250명. 전체 직원 중 4분의 1에 달한다. 중소기업들도 평균적으로 총 매출액의 3.6%를 R&D에 투자하고 있다. 대기업(3.1%)보다 높다.

장기적인 R&D 투자를 진행하면서 독일 산업계는 강점인 자동차, 부품, 소재 분야에서 후발주자와의 기술 격차를 벌려뒀다. 신성장동력으로 꼽히는 의료기술, 반도체 광학 및 태양광, 환경기술 부문에서도 혁신기술을 보유하게 됐다.

한상은 코트라 뮌헨 무역관장은 “상당수의 독일 기업은 어떤 문제에 대한 솔루션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대체할 기업이 많지 않다는 의미”라며 “해당 분야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아무나 따라 할 수 없는 높은 기술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쓰기 싫어도 안 쓸 수 없는 제품을 만들어 낸다는 얘기다.



“현대차가 잘 팔리면 독일이 웃는다”한국 기업들도 2001년부터 2010년까지 연간 9.5%의 R&D 투자 증가율을 이어갔다. 중국, 인도, 브라질 등 신흥국과 유사한 추세다. 문제는 끈기다. 여전히 우리나라의 R&D 환경은 고칠 점이 많다. 국비 지원을 받는 연구소들은 분기별로 실적 압박에 시달리고, 보고서를 위한 보고서를 제출하기 일쑤다. “공기업, 공공기관은 민간기업이 장기적으로 투자하지 못하는 기초 분야를 찾아 투자하고 기다려줘야 하는데 민간기업보다 더 코 앞을 보고 일한다”는 연구자들의 푸념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다.

편식도 문제다. 몇몇 대기업 중심으로 산업을 키워오다 보니 전자·자동차·플랜트 등 특정 분야에서만 재투자가 이뤄지고 다양성이 떨어진다. 실제로 독일과 우리나라의 무역구조를 살펴보면 불균형을 실감할 수 있다. 지난해 한국의 대 독일 수출은 95억 달러, 수입은 169억 달러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수출품은 선박해양구조물, 자동차, 반도체에 집중된 반면 독일의 수출품은 자동차, 펌프, 자동차 부품, 계측제어 분석기, 기계요소 등으로 다양하게 분산돼 있다. 그만큼 수출하는 기업도 다양하고, 대부분 산업 전반에 널리 쓰이는 부품류라 리스크도 적다. “현대자동차가 잘 팔리면 웃는 것은 독일 기업”이란 얘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현대자동차 완제품에 쓰이는 부품 중 상당수가 인피니온, 콘티넨탈 등 독일 자동차 부품사들의 제품이기 때문이다.

김기찬 가톨릭대 교수가 6월 ‘세계 산업 선도국가 도약을 위한 정책토론회’에서 “완전한 산업생태계를 구축한 독일과 달리 우리나라는 핵심 부품·소재의 64% 이상을 수입에 의존할 만큼 불완전한 상태”라고 지적하면서 “R&D 투자를 확대해 경쟁력이 있는 중소·중견 기업을 키우는 방식으로 산업 생태계가 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남다른 창의성과 차별화는 독일 경제의 든든한 기초다. 시장 전반에 퍼져있는 혁신성은 독일의 미래를 밝게 볼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1967년부터 1970년까지 타임지 독일 특파원을 지낸 피터 로스 랜지가 최근 독일을 다시 방문해 소회를 밝힌 기사가 독일 경제지 한델스블라트(Handelsblatt)에 부록으로 실렸다.

“오바마는 제조업을 다시 살리려고 하지만 많은 미국 경제학자들은 낮은 임금국가와 경쟁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며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국의 미래가 서비스업과 지식경제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지금 독일은 바로 그 반대의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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