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CULTURE - 음악은 삶의 동력이자 고결한 쾌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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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명연주 명음반’ 정만섭입니다. ‘아무도 당신을 믿지 않을 때도 자기 자신을 믿는 것, 그것이 챔피언이 되는 길이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복서였는데요. 슈거 레이 로빈슨이 남긴 이야깁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믿는다는 건 중요하죠. 자신이 잘 돼야 남도 잘 되는 법입니다.”
역시 ‘명연주 명음반’다운 오프닝이다. 진행자 정만섭씨는 곡이 끝날 때마다 구구절절 사족을 붙이지 않는다. 그저 2시간 동안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 클래식FM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그것이 바로 그가 11년 동안 KBS 1FM ‘명연주 명음반’을 지켜온 비결이 아닐까. 파트너인 김우석 PD에게 그의 매력을 묻자 단번에 ‘미스터리함’ 이라는 말이 돌아온다. 같은 남자지만 목소리가 좋고, 신비로움을 느낀다고 했다. 스튜디오 창 너머로 눈빛이나 제스처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니 베테랑의 여유가 묻어난다.
인간 거름종이, 클래식 감별사정만섭씨의 하루는 새벽 6시에 시작된다. 선곡은 보통 방송 전날, 때로는 당일 오전에 한다. 그날그날의 감성을 최대한 반영하려는 생각에서다. 그는 “내일은 왠지 이런 음악을 좋아할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는 감이 오면, 중심 곡을 정해놓고 분위기에 맞춰 흐르게 한다”고 소개했다.
대본은 따로 없다. 선곡을 하고 오프닝에 들어갈 명언을 고른다. 2시간 생방송 동안 그는 웬만하면 스튜디오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다. 볼륨을 크게 높여놓고 온전히 음악을 듣기 위해서다.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음악 감상을 할 수 있는 게 이 직업의 특권이란다. 4시간 정도 방송 일을 위한 음악을 듣고, 나머지 시간엔 듣고 싶은 음악을 듣는다. 방송과 강의가 끝나고 해가 저물면 한잔 술과 음악이 그를 기다린다.
정만섭씨는 애주가다. 하지만 그는 “술이든 음악이든 이성적으로 즐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감상을 떨쳐버리고 이성적으로 즐겨야만 제대로 된 음악 감상을 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음악에 대한 불같은 열정을 냉정함으로 식히며 그가 발견하고자 하는 건 ‘명연주자’다. 좋은 연주가 좋은 음악을 만든다고 믿는다.
듣고 또 들어라, 그러면 득할 것이다대체 좋은 연주란 무엇일까. 음악을 그저 그렇게 듣는 이들에게는 멀고 먼 경지처럼 느껴진다. 정씨는 잘 듣기 위해선 무조건 들으라고 조언한다. 뭔가 신통한 답이 나올줄 알았는데 누구나 다 아는 ‘정공법’을 얘기한다.
“음악이란 좋은 게 있는데, 그 좋은 걸 모르고 한 평생 살다가는 건 아깝지 않나. 무조건 한 번 들어봐라. 소위 명곡이라고 하는 것, 친숙하다고 생각되는 곡을 수십 번 수백 번 들어보라고 합니다.” 듣고 또 들으면 ‘득’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 그의 표정엔 절절함이 묻어났다.
연주자들조차 음악을 듣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음악을 듣지 않고 알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다. 그는 좋은 연주의 차이를 알고, 뉘앙스를 표현할 줄 아는 차세대 연주자로 피아니스트 손열음을 꼽았다.
클래식 전문가지만 그는 팝·재즈·트로트 등 대중가요도 두루 듣는다. “요즘 가요경연 프로그램이 많은데 내지르는 가창력만 부각되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불후의 명가수 김현식이 지금 출연한다고 하면 1등 할 수 있겠어요?” 어떤 장르든 음악에선 사람을 울컥하게 하는 힘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배호, 레너드 코헨, 밥 딜런 같은 명가수들을 줄줄이 호명했다.
그는 대중가요를 가장 많이 아는 고전음악 평론가일 것이라 자부했다. 경계나 장르를 가리지 않는 것, 그게 자신의 장점이라 했다. 이런 배경에는 어린 시절 집안 환경이 작용했다. 기계광인 아버지와 음반사 프로듀서였던 외삼촌 덕분에 전축과 LP를 일찍 탐험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얼리어답터 집안서 자라 자연스럽게 음악을 좋아하게 된 셈이다. 색소폰·피아노·드럼·하모니카 등 여러 악기를 조금씩은 다룰 줄 안다. 소년 시절엔 문학에 소질이 있어 백일장을 휩쓸고 대학 땐 밴드 활동을 하며 대학가요제도 출전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지만 역시 끝까지 남은 취미는 ‘음악’이었다.
삶의 의욕 돋우는 ‘치유의 음악’개인적으로 2~3년간 파란만장한 일을 많이 겪었다는 정만섭씨. 오십대에 접어든 그에게도 우울증 같은 마음의 병이 찾아왔다. 자살 충동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평소 자살은 죄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본인보다 남아있는 사람이 얼마나 충격이겠어요. 그런데 우울증이 오면 죄책감같은 게 없어져요. 그냥 나만 죽으면 되지, 이런 생각이 들죠. 대개 자살하는 사람은 고민하다 죽지 않아요. 그냥 죽지. 저도 그런 감정을 경험했는데 음악이 지켜줬죠.”
그는 좋은 음악을 듣다 보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잇단 자살 소식이 안타까워 라디오 방송에서 그가 제일 좋아하는 팝송인 길버트 오 셜리반의 ‘얼론 어게인 내츄럴리(Alone Again Naturally)’를 추천했다. “내가 몸을 던져서 죽었을 때 누가 눈 하나 깜빡 하겠나. 절대 고독의 세계이기도 하고, 해탈의 경지이기도 하고. 그래서 ‘얼론 어게인’ 가사를 많이 소개해요. 많이 위로가 되는 가사죠. 화날 땐 때려 부수는 음악을 듣거나 쇼스타 코비치 교향곡 5번 4악장을 듣기도 하죠.”
음악은 그에게, 피로에 지친 사회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꼭 필요한 치료약이다. 그는 음악이 아니더라도 어떤 것이든 좋아하는 일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물론 이성적으로!
사뭇 진지해진 분위기였지만 그에게 또 다른 이성적 취미를 물었다. 그는 수준급 음악 애호가이자 운전기사 노릇을 하는 오랜 친구와 여행을 즐겨 다닌다. 지도에 다트를 찍어 즉흥 여행을 가거나 숨은 별미를 발굴하러 떠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후예답게 최근엔 금석학에 관심이 많다. 특히 이순신 장군 묘비를 5년 정도 찾아다니며 연구했다고 한다.
갑자기 묘지를 산책하는 시인, 혹은 철학자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긴 음악, 짧은 코멘트. 그의 방송만큼이나 시(詩)의 행간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뜬금없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인생의 동력이 되고, 인생을 사는 이유가 되는 건 쾌락이라 생각해요. 육체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음악도 궁극적으로 쾌락이죠. 음악적 쾌락. 소위 카타르시스도 다 쾌락 아니에요? 쾌락이 없으면 못 살 것 같아요. 그런 고급 쾌락을 만들어 가는 게 중요해요. 음악도 어느 단계에 이르면 고급 쾌락이 됩니다. 그 고결한 쾌락은 이루 말할 수 없죠.”
그가 제대로 경험한 쾌락은 음악이다. 파고 또 파도 새로운 보석이 발견 되는 게 바로 클래식이다. 고전 음악은 그런 의미에서 ‘고전’이라는 말을 가장 잘 일깨워 줄 수 있는 장르다.
혹독한 겨울이 조금은 물러가는 2월, 클래식에 입문할 수 있는 곡은 뭐가 있을까. 그는 50분 정도의 교향곡을 한번 들어보길 권했다.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을 크게 들어보면 좋을 거라고 했다. 입문용이면서도 입문용 같지 않은 곡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클래식의 대중화에 일침을 가했다. 대중화한다면서 하향평준화하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클래식은 과거부터 귀족이 듣는 음악이었어요. 현대에도 귀족이 듣는 음악이죠. 하지만 그 귀족은 돈 많은 귀족이 아니라 정신적인 귀족이에요. 지적으로 노력해야 음악이 들리기 때문에 정신적인 귀족이 돼서 클래식을 많이 들었으면 좋겠어요. 돈 많이 드는 게 걱정된다면 ‘명연주 명음반’을 들어주세요. 제가 다 알아서 골라드리니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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