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andal fallout - 대중의 관음증에 스러진 전쟁영웅
scandal fallout - 대중의 관음증에 스러진 전쟁영웅
지난 1월 존 앨런 해병 대장은 아프가니스탄의 막사에 앉아 전쟁영웅답지 않게 신세를 한탄했다. 전쟁 중에 가족과 늘 떨어져 지내면서 의도치 않게 벌어진 일들이 회한으로 밀려왔다. 그는 지난 72개월 중 50개월 이상 아내와 두 딸을 고국에 남겨둔 채 해외 전쟁터에서 지냈다.
한 보좌관에 따르면 앨런은 두 딸이 어렸을 때 이후로 아내와 호젓하게 휴가를 즐긴적이 없다. 지난 19개월 동안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을 맡으면서는 워싱턴에서 열린 전략회의에 참석할 때만 귀국했다. 그때도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고 밤샘하며 의회 청문회를 준비했다.
35년 전 그와 결혼한 캐시 앨런 역시 한결같이 군인의 아내로서 모범을 보였다. 그동안 그녀는 남모르는 고통에 시달리며 개인적인 희생을 감내했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앨런 부부의 부모 세 명이 세상을 떠났다. 캐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2010년 사망했다. 남편이 멀리 전쟁터에 있는 동안 그녀 혼자 그 슬픔을 견뎌냈다. 앨런의 어머니가 지난해 임종을 앞두었을 때도 역시 남편을 대신해 그 짐을 떠안았다. 남편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그에게 어머니의 위중함을 자세히 알리지 않았다.
지난해 8월 마침내 캐시는 아프가니스탄에 전화를 걸어 남편에게 어머니의 별세를 통지했다. 캐시 자신도 자가면역장애를 포함해 숱한 만성질병에 시달렸다. 사실 몇 년 전부터 앨런은 아내에게 너무 힘들면 전역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캐시는 늘 만류하며 불평한마디 없이 견뎌냈다. 한 친구는 “그녀의 지나친 극기심이 건강을 완전히 해쳤다”고 말했다.
앨런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전형적인 구식 애처가라고 말했다. “그 친구는 아주 구식 사나이”라고 국무부 관리로 앨런의 정치고문이었던 마크 크레틴이 말했다. “식탁 아래서 아내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는 그런 남자다.”
그러나 앨런은 지난해 11월 아프가니스탄 임무를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복잡하게 얽힌 섹스 스캔들에 휘말렸다. 앨런이 나토군 최고사령관으로 지명 받고 워싱턴에서 상원 인준 청문회를 기다리는 동안 그 일이 터지면서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CIA 국장이 사임했다. 결국 앨런도 미군 최고의 영예직인 나토군 최고사령관으로 영전하지 못하고 미디어 서커스의 광대로 전락했다.
퍼트레이어스는 자신의 전기를 쓰는 폴라 브로드웰과 불륜 관계였다는 사실이 드러나 CIA 국장직을 사임했다. 브로드웰이 연적으로 생각한 질 켈리에게 퍼트레이어스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보낸 협박성 이메일이 화근이 돼 FBI 수사가 진행됐다. 질 켈리는 플로리다주의 사교계 명사로 맥딜 공군기지에서 군민 관계를 돈독히 하는 자칭 명예 대사로 활동했다.
수사 과정에서 앨런과 질 켈리 사이에 개인 이메일이 수없이 오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앨런과 켈리도 불륜관계를 의심 받았다. 한 소식통은 그 두사람 사이에 오간 이메일 내용과 관련해 “부적절해 보일 수 있는 표현은 있지만 실제로 그 두 사람이 은밀한 관계를 맺은 건 아닌 듯하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앨런은 외도를 부인하며 부적절한 일은 결코 없었다고 말했다. 켈리와 단 둘이 있는 기회를 갖지 않으려고 무척 신경썼다고 말했다. 그러나 워싱턴의 관료적·정치적 현실 때문에 공식 조사가 시작되면서 앨런을 향한 의혹은 증폭됐다. 앨런 가족과 가까운 소식통은 그들이 선정적인 보도로 인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들이 주고 받은 이메일이 폰섹스 수준이라는 터무니없는 보도까지 나왔다.
결국 백악관은 앨런의 나토군 최고사령관 지명을 보류했고, 국방부가 진상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관 15명이 매달렸다. 그들은 앨런이 미군 장교로서 부적절한 행위를 했거나 군법을 어긴 증거를 찾으려고 수만 건의 이메일과 문건을 샅샅이 훑었다. 그동안 앨런은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 조사 결과를 기다렸다. 그는 전쟁을 수행하고, 현지 주둔 미군 수만 명의 단계적 철수를 감독하고 그에 따라 군사전력을 수정하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마침내 지난 1월 말 국방부 감찰관은 10주에 걸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부적절한 행동이 전혀 없었다는 결론이었다.
앨런을 둘러싼 의혹이 끝나면서 명예도 회복됐다. 그래서 지난 2월 그가 워싱턴에 돌아왔을 때 측근 참모들도 그가 나토군 최고사령관을 맡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앨런의 아내 캐시의 건강이 크게 악화됐다. 응급실에 여러 차례 실려갔다.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추정된다. 결국 해병대에 41년 동안 몸 담으며 장군의 모범을 보였던 앨런은 59세의 나이에 옷을 벗기로 결심했다.
그는 퇴역을 발표한 후 워싱턴포스트지 기자 라지브 찬드라세카란에게 “아내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 이제 가족을 돌볼 때가 됐다”고 말했다. 앨런의 대변인 데이비드 네버스 소령은 캐시의 건강이 전역 결심의 주된 요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불륜 의혹 조사도 그들에게 큰 타격이었다”고 덧붙였다.
백악관은 이미 아프가니스탄에 그의 후임자를 파견했고, 나토군 최고사령관 후보를 물색하는 중이다. 그러나 존 앨런에게 닥친 비극은 진지하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 그의 이메일의 음란성 여부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대중이 군인의 사생활을 과연 얼마나 캐고 들어야 할까?
근년 들어 미국인들은 정치인들의 도덕적 실수를 너그러이 봐주는 추세다. 앨런의 나토군 최고사령관 지명을 좌우할 수 있었던 상원 군사위원회 위원들 중에는 데이비드 비터 의원(루이지애나주)이 있다. 그는 소위 ‘워싱턴 마담’의 매춘 서비스를 받았다고 시인했지만 거뜬히 재선됐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장성들에게 훨씬 높은 수준의 도덕을 요구한다. 계속되는 전쟁 때문에 장성들이 받는 부담은 갈수록 크고 극단적으로 변해가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미 육군과 해병 지상군은 10년이나 지속된 전쟁으로 완전히 지쳤다”고 앨런을 보좌한 존 네이글이 말했다. “전투에 투입되는 육군이나 해병 병사가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들을 지휘하는 장성도 무척 힘들다. 미국인들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미국의 가장 긴 전쟁을 치르는 앨런의 부대원들이 이룬 성과보다는 이런 터무니없는 스캔들 의혹에 훨씬 더 관심을 가졌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나올 만하다. 우리가 초인적인 임무를 떠맡긴 사람들의 인간적 약점에는 좀 더 관대해야 하지 않을까? 기준을 고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스캔들과 유능한 인재의 몰락이 더 많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앨런은 명예롭고 고결하고 용감한 해병장교의 모범이었다. 전쟁 영화의 주인공처럼 날씬하고 단단한 체격, 진지한 눈빛. 그의 자세는 늘 꼿꼿했다. 미 해군사관학교를 다닌 그는 일찍이 두각을 나타냈다. 앨런은 1988년 가장 이상적인 해병 장교에게 수여되는 영예의 상 레프트위치 트로피를 받았다.
늘 학구적인 앨런은 석사학위 여러 개를 딴 뒤 해사 교수가 됐다. 그는 놀라운 투지와 완벽주의로 신망을 얻었다. 밥 먹듯 야근하며 비행복으로 갈아 입고 좁은 연구실에서 잠을 청했다. 때로는 새벽에 휑뎅그렁한 강당에 혼자 서서 강의 연습을 했다. 단어 하나하나를 암송하는 그의 목소리가 어두운 복도에 울려 퍼졌다.
해사에서 함께 가르친 민간인 교수 스티븐 레이지는 앨런이 완벽한 강의를 위해 늘 “무대 총 리허설”을 했다고 돌이켰다. 앨런은 꼼꼼함과 격식 따지기로도 유명했다. 해사가 5일간의 연례 국제관계 학술대회를 개최하면 앨런은 행사 준비와 운영에 필요한 세세한 사항까지 지시하는 48쪽짜리 작전 명령을 작성했다.
2002년 1월 앨런은 해사 교장에 임명됐다. 해병 출신으로는 처음이었다. 그는 엄격한 훈육관이 될 수 있었지만 생도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함양하려면 처벌만큼 마음 수양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교장 시절 내린 견책 명령은 지금도 해군사관학교 파일에 남아 있다. 불량 생도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도록 지시한 것이 대표적이다.
앨런은 열정과 유머 감각도 있었다. 전통깊은 육사-해사 경기를 앞두고 사기를 진작하는 단합대회에서 그는 얼굴에 위장 크림을 잔뜩 바르고 완전무장을 한 채 체육관 천장에서 로프를 타고 하강하며 “육사를 격파하라!”고 고함쳤다. 그때가 앨런에게는 여러모로 행복한 시절이었다.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리더십을 연마하는 동시에 이미 건강이 나빠지고 있던 캐시를 곁에서 돌볼 수 있었다. 한 동료는 앨런이 사무실 벽에 이런 문구가 적힌 카드를 붙여두었다고 돌이켰다. “최고의 친구와 결혼한 것 자체가 행복이다(Happiness is being married to your best friend).”
그러나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앨런은 전쟁터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했다. 그는 잠시 국방부에서 근무한 뒤 이라크에 배치됐다. 앨런은 알-안바르주의 부족장들을 능숙하게 다루었다. 역사광인 그는 T E 로렌스(‘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쓴 ‘지혜의 일곱 기둥(Seven Pillars of Wisdom)’을 탐독했다.
그러나 그는 작가 톰릭스에게 자신의 진정한 영웅은 거트루드벨이라고 말했다. 벨은 영국 고고학자이자 중동 전문가로 부족 정치에 달통해 식민 시대에 영국의 이라크 통치에 큰 도움을 주었다. 앨런도 수니파 족장들을 설득해 미국을 상대로 한 그들의 저항운동을 종식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공로로 앨런은 플로리다주 탬파의 미중부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승진했다. 중동의 군사작전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총괄하는 사령부다. 그곳에서 앨런은 질 켈리를 알게 됐다. 그녀는 사령부 기지에서 군민 관계를 원만히 이끄는 명예 대사를 자임했다. 앨런은 중동과 아프가니스탄, 워싱턴을 수시로 오가며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지냈다.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은 거의 없었다.
2011년 여름 대장으로 진급한 앨런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에 올랐다. 미군 증파의 절정기였고, 사상자가 여전히 많았다. 아프가니스탄은 혼돈의 벼랑에서 비틀거렸다. 앨런이 가진 모든 능력과 기술이 시험대에 올랐다. 위기가 잇따랐다. 부주의한 미군 병사들의 코란 소각 사건, 신경쇠약에 걸린 한 미군 병사의 아프간 민간인 17명 학살 사건 등. 하나같이 주둔군 임무를 실패로 몰아갈 수 있는 위험이 숱했다.
앨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위기를 넘기고 상황을 수습했다. 당시 그와 늘 함께 있었던 정치 고문 크레틴은 앨런이 “마라톤 거리를 단거리 경주하듯이 달렸다”고 말했다. 앨런은 하루 서너 시간 눈을 붙였다. 장교들이 온라인으로 요금을 지불하고 세탁을 하는 매주 금요일 아침 3시간 외에는 쉴 틈이 없었다.
낮에는 국방부, 백악관, 브뤼셀의 나토 본부에서 들어온 수많은 이메일에 회신하고, 국가 수반, 연합군 지휘자, 미국 정치인, 아프간 관리 등 끊임없이 이어지는 방문객을 맞았다. 게다가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앨런은 병사들의 죽음과 끔찍한 부상을 보면서 심리적, 정서적으로 진이 빠졌다.
전사한 병사의 시신을 담은 관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음울한 행사가 한 주에 서너 차례나 201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열린 앨런의 대장 진급식이 열렸다. 그의 아내와 딸은 미국에서 그 모습을 화상으로 지켜봤다(왼쪽). 앨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눈코 뜰새 없이 업무에 몰두했다. 하루 서너 시간 눈 붙이고 주 3시간 정도만 휴식을 취했다. 열린 때도 적지 않았다.
현재 2014년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오바마 대통령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앨런은 오바마 대통령이 가장 중시하는 국가안보 정책인 전쟁 종식을 위해 군을 준비시킨 공로도 인정 받을 만하다. 오바마는 첫 임기동안 군 장성들과 갈등했다. 그는 자신이 처음 임명한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 데이비드 매키어넌을 네 달 만에 해임했다. 그의 후임인 스탠리 매크리스털도 롤링스톤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백악관의 전략 부재를 공개 비판한 뒤 해임됐다.
그 뒤를 이은 퍼트레이어스도 세간의 주목을 끄는 스타일로 백악관을 언짢게 했다. 앨런은 그들과 대조적으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절제된 태도로 일관했다. 오바마는 그런 신중한 앨런의 자세를 높이 평가했다. 두 사람은 강한 유대감을 맺었다. 한 백악관 관리는 “앨런은 퍼트레이어스와 정반대”라고 말했다.
앨런이 해병대 40여 년 경력을 마무리하려면 앞으로 몇 주는 걸릴 것이다. 그러나 곧 그는 아내 캐시에게 전념할 생각이다. 친구들은 앨런 부부가 버지니아주 셰넌도어 밸리에서 지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앨런이 태어난 곳에서 멀지 않고 친척이 그곳에 땅을 갖고 있다. 시간이 나면 앨런은 독서 삼매경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그가 가장 읽고 싶어하는 책은 윌리엄 달림플의 ‘왕의 귀환(The Return of a King)’이다. 19세기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려다가 실패한 과정을 다룬 책이다.
앨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영국보다는 더 잘 할 수 있도록 애썼다. 그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미 해군사관학교에서 이룬 성과를 고려하면 나토군 최고사령관을 맡았더라도 훌륭히 임무를 수행했을 듯하다. 하지만 그의 개인 이메일에 대중의 관음증이 발동하면서 본의 아니게 군복을 벗는다. 이제 미국은 전쟁의 가혹한 짐을 기꺼이지려는 장성 한 명을 더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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