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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FORBES KOREA AGENDA 부자의 품격② - 유일한과 김만덕의 ‘베품의 정신’

2013 FORBES KOREA AGENDA 부자의 품격② - 유일한과 김만덕의 ‘베품의 정신’

포브스코리아는 3월호부터 ‘부자의 품격’을 연재하고 있다. 첫 회에(3월호 참조) 품격있는 부자의 의미를 찾은데 이어 이번 호에는 ‘품격있는 부자의 조건’을 살펴본다. 한동철 부자학연구학회장은 정신적 행복, 물질적 풍요, 사회적 만족 세 가지를 품격 조건으로 봤다. 국내 대표적 참부자로 손꼽히는 유일한 박사와 의인 김만덕을 소개한다. 그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김윤섭 유한양행 대표와 양원찬 김만덕기념사업회 대표에게 생생한 얘기를 들었다.
‘애국애족’ 정신을 실천한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자.



첫째, 손녀 유일링(당시 7세)에게는 대학 졸업 시까지 학자금 1만 달러를 준다.

둘째, 딸 유재라에게는 유한공고 안의 (내) 묘소와 주변 땅 1만6529m²(5000평)을 물려준다. 그 땅을 유한동산으로 꾸미되 결코 울타리를 치지 말고 유한중·공업고교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여 어린 학생들의 티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느끼게 해달라.

셋째, 내 소유주식 14만941주는 전부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현 유한재단)에 기증한다.

넷째, 아들 유일선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유일한의 유언장에서

1971년 4월 공개된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주의 유언장이다. 그 해 3월 11일 유일한 박사가 눈을 감기까지 각종 공익재단에 기증한 개인 주식은 유한양행 총 주식의 40%에 이른다. 추정 가치는 약 8000억원. 유 박사가 평생 해온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 결과다.

딸인 유재라 여사에게 남긴 ‘유한동산’은 꾸며달라는 구절을 넣어 재산이기 보다는 부탁에 가깝다. 특히 ‘어린 학생들의 맑고 젊은 정신을 지하에서나마 느끼게 해달라’는 대목은 4월 유언장 공개 당시 유 여사를 비롯해 참여한 모든 이의 눈시울을 붉게 했다.

현재 유 박사의 뜻을 이어 유한양행을 이끄는 이는 김윤섭 대표. 영업사원으로 출발해 CEO까지 오른 그는 유한양행의 19번째 대표다. 김 대표는 유한양행은 탄생부터 기업의 이윤보다 민족의 생존을 내세웠다고 말했다.

“유 박사는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나 9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대학 동창과 식품 사업을 해서 큰 성공을 거뒀어요. 사업차 중국을 방문했다가 고향을 들렀어요. 그때 유 박사는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고 가난과 질병으로 신음하는 동포를 보며 자신이 할 일을 찾은 겁니다. 미국 사업을 넘기고 1926년 12월 한국에 유한양행을 세웠습니다. 국민이 건강해야 잃은 주권을 되찾을수 있다며 제약 회사를 차린 거에요. 유한의 상징인 버드나무는 국민이 쉴 수 있는 큰 그늘이 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어요. ”

유 박사는 당초 계획처럼 의약품만 팔지 않았다. 화장지·생리대·비누·치약 등 국내에 필요한 각종 위생용품을 들여왔다. 심지어 농기구와 염료·페인트를 수입했다. 의약품 판매를 늘리기 위해 전국을 다니다보니 낙후한 농촌을 목격했다. 농민들이 효율적으로 농사를 짓도록 편리한 농기구를 값싸게 보급했다.

의약품은 결핵약·진통 소염제·피부 병약 등 가장 기본적인 약품을 팔았다. 의약품 수입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경기 부천 소사에 제약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개발했다. 유한양행이 히트한 상품으로는 안티푸라민과 삐콤씨가 있다. 1962년 주식회사 설립 이후 75년 연속 흑자를 기록했다. 1997년 직후 외환위기 때를 제외하곤 거의 매년 무상 증자와 현금배당을 실시했다.

평소 유 박사는 “기업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종업원과 사회의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1936년 유 박사는 기업공개를 결정했다. 그를 포함 종업원 77명 가운데 24명이 주주가 됐다. 상당수 주식을 종업원에게 공로주 형태로 배분했다. 국내 기업 최초의 ‘종업원 지주제’였다.

매년 정기적으로 노사협의회가 열린다. 직원의 어려운 점이나 아이디어를 복지에 반영하기 위해서다. 원활한 소통 덕분에 창업 이후 한차례도 노사 분규가 일지 않았다. 1971년에는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했다. 이후 유 박사 친·인척 중에 유한양행과 인연을 맺은 사람은 없다.

김 대표는 유한양행에는 세 가지가 없다고 했다. “3무(無)라고 하는데요. 지연·혈연·학연이 없습니다.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사장이 될 수 있어요. 내부 경쟁이 치열해요. 능력은 기본이고 동료들과 화합할 줄 알아야 합니다. 회사 발전을 위해서는 쓴 소리도 할 줄 알아야 하고요.”

당시 유 박사는 부자가 갖춰야 할 사회적 의무를 알고 있었다. 그가 남긴 어록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다.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 1952년 회사 경영이 안정기에 접어들자 그는 장학사업에 나섰다. 사재를 출연해 고려공과기술학교를 세웠다. 1962년에는 재단법인 유한학원을 설립하고 유한공고와 유한중학교를 세웠다. 유 박사는 시간이 날 때면 유한공고를 찾았다.

“훌륭한 사람이 돼야 나라가 발전한다”며 학생들을 격려했다. 그만큼 미래를 짊어질 학생을 위한 교육에 애정을 쏟았다. 타계 1년 전 사회복지사업의 발전을 위해 재단법인 유한재단의 전신인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을 설립했다. 이 뿐이 아니다. 유한양행 자료에 따르면 유일한 박사는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특히 미국 전략정보국(당시 OSS·CIA의 전신)의 한국 고문이었다.

유일한 박사는 ‘암호명 A’로 불렸다. 1945년에는 한국 독립을 위한 ‘냅코(NAPKO)’ 작전에 참여했다. 재미 한인 교포로 특수공작대가 구성됐다. 이들이 한국에 침투돼 첩보 수집과 지하조직을 만들어 투쟁을 벌이자고 했다. 일본의 조기 항복으로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김 대표는 유 박사의 장녀 유재라 여사의 리세스 오블리주도 빼놓을 수 없다고 얘기했다.

“유 여사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갔습니다. 부친이 별세한 뒤에는 유한재단 이사로 사회공헌활동에 매진했어요. 경영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요. 1991년 아버지가 남긴 유한동산을 비롯해 개인 소유의 유한주식을 모두 유한재단에 기부하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약 200억원 상당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셨지요.”

김 대표는 유 박사의 정신이 후대에 계승될 수 있도록 경영하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최근 유 박사의 생애를 기록한 『위대한 선각자 유일한 박사』라는 책을 만들었다. 직원들이 창업주를 기억하고 기업 철학을 공감할 수 있도록 교육용으로 활용한다. 사내에서 유 박사의 기업이념을 주제로 토론하는 시간을 갖는다. 더불어 투명한 경영으로 고객과 직원에게 신뢰를 주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기녀 출신 거상 김만덕은 제주도 영웅품격있는 부자로 의인 김만덕을 손꼽는다. 김만덕 사후 제주에 유배 온 추사 김정희 선생은 그의 나눔과 사랑에 감동받고 양손자에게 ‘은광연세(恩光衍世)’ 라는 글귀를 써줬다. ‘보은의 빛이 세상에 가득 차다’라는 의미다.

김만덕의 ‘은광’은 1795년에 있었다. 1792년부터 제주에는 큰 흉년이 들었다. 두 해 동안은 비 한방울 내리지 않더니 1794년에는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곡식은 바람에 꺾이고 바닷물이 논에 들어찼다. 먹을 게 없었다. 1만8000여 명이 굶어 죽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라에서 보낸 구휼미마저 풍랑을 만나 모두 잃었다. 이때 김만덕은 자신이 평생 모은 돈을 내놓아 수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

그는 품격있는 부자의 조건 중 나눔을 실천했다. 그렇다면 그가 기부에 나선 배경과 재산을 모은 비결은 뭘까. 김만덕의 정신을 계승하는 김만덕기념사업회의 양원찬 대표에게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김만덕은 조선시대 여권신장을 높였다”고 얘기했다. “그는 12살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됐어요. 퇴기(退妓)의 집에 수양 딸로 들어가 관기로 지냈지요. 양인이었다가 천민의 신분이 됐습니다. 그는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바꿔나갔어요. 23살에 관기의 신분을 벗고 양인으로 신분을 회복했습니다.”

관기를 그만둔 그는 사업을 했다. 지금의 제주시 건립동에 객주를 차렸다. 장삿배에서 관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배들이 드나드는 포구 근처였다. 당시 객주는 상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상품을 위탁 판매했다. 양 대표는 “그는 사업적 수완이 뛰어났다”고 들려준다.

“조선 후기 산업의 변화가 일었어요. 농업 이외 수공업이나 유통경제에 인식이 생길 때입니다. 상업과 유통의 중심은 포구 무역과 객주업이었어요. 만덕은 외부에서 들여오는 쌀과 제주에서 생산되지 않는 소금의 독점권을 확보했습니다. 이를 말총·미역·전복 등 제주 특산물과 교환했어요. 무역 규모가 커지자 아예 육지로 나가 물건을 팔았습니다. 중간 상인을 없애 수익을 높였지요. 제주도 최고의 거상이 되었습니다.”

김만덕은 재물이나 명예에 욕심이 많지 않았다. 만덕의 기부가 알려지면서 조정에서 포상을 논의했다. 남자가 아니어서 쉽게 관직을 줄 수 없었다. 만덕은 이 문제를 쉽게 해결했다. 그의 소원은 의외로 소박했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금강산을 유람해 보는 일이다. 당시 국왕인 정조는 흔쾌히 승락했고 그에게 내의원 의녀반수(醫女班收)의 벼슬을 내렸다.

명예직이었으나 여성으로서는 최고의 벼슬이었다. 양 대표는 “김만덕의 금강산 유람은 의미가 크다”고 얘기했다. “당시 제주도 여인들은 육지로 나가는게 법으로 금지돼 있었습니다. 더욱이 금강산 구경은 보통 여성으로서는 꿈 꿀 수 없는 일이었어요. 만덕은 여성 신분의 한계를 깨고 도전하는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금강산 관광 후 만덕은 벼슬을 내려놓고 제주도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사업하면서 번 돈으로 이웃을 도왔다고 한다. 김만덕기념사업회는 김만덕 정신을 잇기위해 ‘나눔 쌀 쌓기’ 운동을 벌였다. 2007년에는 제주도에서 천 섬 쌓기에 성공했다. 2009년에는 서울에서 만 섬 쌓기를 했다.

기부 금액은 목표액을 초과해 이만 섬에 육박했다. 전국에서 모인 쌀 기부였다. 기부 금액은 독거노인, 지역아동센터, 한부모세대 등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됐다. 일부 금액은 베트남에 ‘만덕학교’를 세우는 사업으로 이어졌다. 만섬 쌓기 운동은 작년에도 열려 약 20억원이 모였다.

2010년 5월 김만덕 가문의 6대손 김균 선생이 가보로 소장했던 ‘은광연세’ 편액을 김만덕기념사업회에 기증했다. 김만덕의 정신을 잘 계승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양 대표는 현재 제주도에 김만덕기념관을 세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기념관에는 김만덕을 기리고 기부 문화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는 나눔 교육관과 기아 체험관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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