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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형 노사문화 무르익는다

선진국형 노사문화 무르익는다

WEF<세계경제포럼> 국가경쟁력 순위, 개선된 노사관계 반영 못해 … 비밀·차별·경계 없앤 기업 많아



19위.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이하 WEF)이 평가한 지난해 우리나라 국가경쟁력 순위다. 2011년 24위에 비해 5단계 상승했다. 2008년 이후 꾸준히 하락하다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다. 부문별로 살펴보면 보건 및 초등교육(15→11위), 상품시장 효율성(37→29위), 기업활동 성숙도(25→22위) 등 6개 부문에서 순위가 올랐다. 거시경제 환경(6→10위)과 기업혁신(14→16위) 부문은 하락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가장 낮은 평가를 받은 세부 항목은 무엇일까? 바로 ‘노사 협력’이다. WEF가 평가한 우리나라 노사 협력 순위는 조사대상 144개국 중 129위에 머물렀다.

하지만 WEF의 조사가 갈수록 좋아지는 우리나라의 노사 관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다. WEF의 국가경쟁력 조사는 국내 기업 최고경영자 115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와 각 항목별 통계치를 7:3의 비율로 반영한다. WEF처럼 국가경쟁력 순위를 발표하는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의 설문조사 반영 비율은 30%다. 설문조사 비중이 크다 보니 노사 협력과 같은 추상적인 항목의 경우 개인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크다.

개선할 점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100위권 밖에 머물 만큼 우리나라 노사 관계가 나쁘지는 않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업계 관계자는 “국가경쟁력 순위가 우리나라의 장단점을 보완하는 순기능을 해야 하는데 조사결과만 놓고 판단하다 보니 ‘한국은 기업하기 힘든 나라’ ‘강성 노조의 나라’라는 인식이 고착화할까 염려된다”며 “이러한 인식은 외국계 기업의 국내 투자와 자본 유치를 어렵게 만든다”고 말했다.



설문 비중 70%로 주관 개입 여지 커우리나라 노사분규는 2005년 이후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1년 노사분규 발생건수는 65건으로 2006년(138건)의 절반 정도다. 노사분규에 따른 근로손실일수 역시 연간 42만 9000일(2011년)로 크게 줄었다. 2004년(119만9000일)의 3분의 1 수준이다. 고소와 고발을 남발하며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일이 크게 줄었다.

서로를 대립이 아닌 협력의 상대로 보자는 인식이 널리 퍼지는 분위기다. 분규를 당연시 하던 1980~90년대와 달라진 점이다. 실제로 최근 국내 기업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제품 경쟁력이나 브랜드보다 노사 간 상생 모델로 더 잘 알려진 기업이 많다. 비결이 뭔지 들여다보니 이들 기업에는 세 가지가 없다. 비밀이 없고, 차별이 없고, ‘너’와 ‘나’의 경계가 없다.

금호폴리켐은 노사 간 비밀이 없는 대표적인 회사다. 모기업 금호석유화학이 1985년 설립한 금호폴리켐은 자동차 부품에 주로 쓰이는 고기능성 특수합성고무인 EP고무를 생산한다. 설립 이후 국내 최대의 EP고무 제조업체로 자리를 잡았지만 1990년대 들어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회사가 노사갈등으로 주춤하는 사이 국내외 경쟁사들이 잇달아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으며 추격해 온 때문이다. 줄곧 흑자경영을 유지하던 금호폴리켐은 2002년 처음으로 적자 기업이 됐다. 적자는 3년 동안 계속됐고 회사 전체에 위기감이 번졌다.

노사는 내부 문제부터 해결하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경영진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우선 노조의 참여를 제한했던 경영설명회와 전략 워크숍 등 각종 회의를 전 직원에게 개방했다. 공장 증설 등 투자 계획까지 모두 직원에게 공개했다. 일반 직원들이 접속할 수 없었던 사내 통신망 또한 누구나 접속할 수 있도록 바꿨다. 개방은 소통을 낳았다.

경영상황과 비전을 공유하자 직원 사이에서 위기 극복 아이디어가 나왔다. 금호폴리켐 관계자는 “노사의 대화 채널을 가동해 공장장과 지원팀장, 그리고 노조위원장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서로의 방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고 말했다. 골치 아픈 문제 대부분 이 방안에서 해결됐다. 노사관계가 개선되자 실적은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고 2005년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가정과 직장의 경계 허물기도경북 구미의 디스플레이용 패널 코팅 업체 아바텍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차별이 없다. 근로자 480명이 모두 정규직이기 때문이다. 정보기술(IT) 기업도 아닌 제조업체가 비정규직이나 외주업체에 의존하지 않는 것은 이례적이다.

생산직 근로자는 이직률이 높아 안정적인 인력 확보를 위해서라도 비정규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바텍 경영진은 발상을 바꿨다. 아예 이직하지 않는 회사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 첫 번째 움직임은 모든 직원을 정규직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아바텍 관계자는 “추진 과정에서 비용 증가 등 적지 않은 고민이 있었고 기존 정규직 직원의 반발도 있었지만 근로자가 안정감과 소속감을 가지고 일해야 회사가 오래갈 수 있다는 생각에 과감히 추진했다”며 “신분이 달라지니 직원들이 회사를 대하는 태도부터 달라졌다”고 말했다.

극심한 갈등을 끝내고 최근 5년 만에 상선 수주에 성공한 한진중공업은 노조가 수주에 큰 역할을 했다.

수주는 보통 경영진의 임무지만 회사가 어려운 만큼 ‘내 일’과 ‘네 일’을 나누지 말고 최대한 서로 돕자는 취지다. 아직 법적 효력이 없는 수주의향서 단계지만 2008년 9월 금융위기 이후 단 한 척의 배도 수주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회생의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근로자 70% 이상이 가입한 한진중공업 새 노조는 여러 곳에 탄원서를 보내고 직접 선주를 찾아가 수주를 요청하는 등 파업 왕국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애썼다. 회사 측도 “노조의 도움이 컸다”며 고마움을 표시한다.

한진중공업이 노사 간 ‘일’의 경계를 없앴다면 제니퍼소프트는 가정과 직장의 경계를 없앴다. 웹시스템 성능관리 전문 기업인 제니퍼소프트는 단 20명의 직원으로 20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리는 알짜 IT기업이다. 성공 비결은 혁신적인 근무환경과 직원에 대한 회사의 헌신이다. 이는 회사를 이끄는 이원영 대표의 경영 원칙이다. 제니퍼소프트의 근무 시간은 하루 7시간. 이 대표는 ‘10시 출근, 6시 퇴근’ 원칙을 위해 6시에 사무실 전원을 강제로 끄면서까지 직원들을 퇴근시킨다.

10시 출근이니 직원들은 여유롭게 자녀와 아침을 함께 할 수 있다. 출근 후에도 직원들은 주로 가족과 함께다. 경기도 파주 헤이리에 지은 새 사옥에는 초등학생이나 유치원 자녀들이 방과 후에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있다. 1층에 마련된 놀이공간, 야외 정원, 수영장, 옥상 텃밭 등에서 선생님과 함께 자유롭게 뛰어 논다.

그러다 오후 6시가 되면 아빠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서 여유로운 저녁과 밤을 즐긴다. 이 대표는 “회사의 가치는 직원의 창의성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에서 나온다”며 “그러려면 직원뿐만 아니라 배우자와 자녀들까지 제니퍼소프트를 잘 알고 좋아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경영자와 근로자의 화합이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비용을 줄여야 하는 경영자와 더 많은 임금과 혜택을 원하는 근로자는 근본적인 입장이 다르다. 업계 관계자는 “이 간극을 줄이는 첫 걸음은 긍정적인 생각”이라며 “경영진과 노조부터 ‘우리나라는 노사 분규가 많은 나라’라는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고 말했다. 현장 분위기가 나아지는 만큼 좋은 사례를 공유하면서 선진국형 노사 문화를 만들어보자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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