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siness - SK이노베이션 8부 능선 넘어
Business - SK이노베이션 8부 능선 넘어
전기차는 완성차·부품 업계뿐만 아니라 석유화학 업계에서도 ‘미래 먹거리’로 삼는 분야다. 전기차에 들어가는 배터리(2차전지)를 연구·생산해 완성차 업체에 공급하기 때문이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은 국내에서 전기차 배터리를 생산하는 대표적인 석유화학 업체다.
LG화학이 시장을 선점했고 SK이노베이션이 후발주자다. 2011년 전기차 배터리 매출 3000억원을 돌파한 LG화학은 2015년까지 이 부문 세계 시장 점유율을 25%로 높일 목표다. SK이노베이션도 지난해 독일의 세계적 자동차 부품업체인 콘티넨탈과 합작법인 설립 계약을 하고 5년간 4000억원을 투자한다.
두 회사는 그동안 국내외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최근 몇년간 이 경쟁은 특허침해 소송으로 번졌다. 시작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LG화학은 2011년 12월 전기차 배터리의 안전성 강화 분리막(SRS) 기술을 SK이노베이션이 무단으로 적용했다며 서울중앙지법에 특허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SK이노베이션의 세라믹 코팅처리 분리막(CCS) 기술이 분리막 안전성 강화 과정에서 SRS 특허를 침해했다는 것이다. 이에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의 주장이 틀리다며 특허무효 심판을 청구했다.
1차 승자는 SK이노베이션이었다. 특허심판원은 지난해 8월 심결에서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의 특허를 침해한 게 아니라고 밝혔다. LG화학의 특허 범위가 너무 넓으며 선행 기술이 일부 포함됐다는 이유에서다. 국내 특허 분쟁에서 1심 격인 특허심판원의 판단이 SK이노베이션 쪽으로 기울자 LG화학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법원 “LG 특허침해 아니다”특허법원 판결에 두 회사의 희비는 엇갈렸다. LG화학 관계자는 “SRS 특허는 미국을 비롯한 해외 특허청과 국내외 완성차 업체들이 모두 가치를 인정한 원천 특허”라며 “해외가 인정한 원천 특허 기술을 오히려 국내에서 인정하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LG화학은 조만간 상급 기관인 대법원에 상고하겠다는 입장이다. SK이노베이션은 차분한 모습이다. 김정기 SK이노베이션 상무는 “2심 격인 특허법원에서도 우리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왔다”며 “대법원까지 가도 판결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쟁점은 LG화학의 SRS 특허가 ‘신규성’과 ‘진보성’을 지녔느냐는 것이다. 특허법원은 판결문에서 “피고(SK이노베이션)가 원고(LG화학)의 특허에 신규성과 진보성이 없다고 주장한 점을 인정한 특허심판원의 심결은 적법하다”고 밝혔다. 전기차에 들어가는 리튬이온 2차전지는 일반 2차전지와 마찬가지로 충전·방전을 반복할 수 있어 재충전을 하며 장기간 사용할 수 있다.
충전·방전 중엔 리튬이온이 전해액을 통해 양극과 음극 사이를 이동하면서 에너지를 전달하는 원리다. 이때 분리막(Separator)에 있는 기공 (미세구멍)은 리튬이온을 자유롭게 이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LG화학이 특허를 낸 SRS는 이 분리막에 무기물을 첨가해 전지의 단락을 막는 등 안전성을 강화한 기술이다.
그러나 특허심판원은 “특허 핵심기술인 분리막에 도포된 활성층 기공 구조에 대한 특허청구 범위가 너무 넓어 기존 분리막의 기공 구조 일부를 포함한다”며 무효를 선언했다. 또 “전지의 성능과 안전성을 개선한 일부 효과 역시 차이가 없는 부분이 있어 LG화학의 특허는 선행 기술보다 신규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특허법원의 이번 기각은 특허심판원의 이 같은 심결을 그대로 인정한 것이다.
특허심판원과 특허법원이 판결문에 명기한 신규성과 진보성은 특허 분쟁뿐 아니라 출원에 있어서도 중요한 개념이다. 신규성은 말 그대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느냐는 얘기다. 기존까지 있던 특허가 가지지 못한 새로운 기술력을 보였느냐의 문제다. 그러려면 기존의 특허와는 동일성이 거의 없어야 한다. 특히 국내외에 공지됐거나 반포된 간행물에 게시된 발명, 전기통신 회선을 통해 공중이 이용 가능하게 된 발명은 특허 출원 대상에서 제외된다.
진보성은 기존에 구현된 기술과 맥락상 맞닿는 부분이 있더라도 새 기술·기법을 추가해 제품의 개선·발전에 혁신적으로 기여한 경우 성립된다. 새로 개선된 점이 인정되면 진보성이 있는 기술로 평가 받는다. 이와 달리 특허와 관련된 기술 분야에서 일반적인 지식을 가진 이가 공지 기술로부터 손쉽게 발명할 수 있다면 진보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나라 특허법은 출원된 발명 모두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신규성·진보성 요건을 갖춘 경우에만 보호한다. 기술력의 신규성·진보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특허로 인정받지 못한다.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의 특허가 신규성·진보성을 갖추지 못한 기술이라고 주장한다. 한 관계자는 “SRS의 핵심 개념인 ‘무기질을 바탕으로 분리막에 코팅을 할 경우 안전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기술”이라며 “1999년과 2004년 이미 일본 공개 특허공보에 선행 기술이 소개된 전례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 경우 특허의 신규성·진보성 원칙에 위배된다. 특허심판원과 특허법원은 SK이노베이션의 이런 주장을 수용한 것이다.
LG화학은 SRS가 자체 개발한 기술로 신규성·진보성이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LG화학 관계자는 “SRS는 전지의 열적과 기계적 강도를 높여 전지 내부 단락을 방지하면서 리튬이온 전지의 안전성을 결정짓는 핵심 기술”이라며 “2005년에 이미 국내에 특허등록을 마쳤고 미국·중국 등 세계 주요 국가에서도 특허로 등록 돼 신규성·진보성을 인정 받았다”고 말했다.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오히려 특허를 침해했다는 입장을 재차 강조했다.
LG화학 “해외 업체 공세가 더 걱정”LG화학이 이번 판결과 대법원 판결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속내는 따로 있다. 국내에선 현대·기아자동차가 전기차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지만 초기 단계일뿐더러 후발주자인 SK이노베이션과는 아직 격차가 있다고 본다. 문제는 해외다. 전략 시장인 미국과 중국에서 GM·르노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와 공급계약을 맺은 상태에서 경쟁사들이 특허 무효화를 무기로 시장점유율을 높이려 LG화학을 압박할 수 있다.
회사 관계자는 “SK이노베이션보다는 일본 등지의 해외 경쟁사가 한국내 판결을 계기로 해외에서 특허 분쟁을 일으킬 게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이 경우 SRS 특허 분쟁이 미국과 중국에서 격화되면서 해외 전기차 배터리 판매에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
이건 SK이노베이션이 이번 판결에서 얻은 전리품이다. 글로벌 공급계약을 늘리려는 상황에서 CCS 기술을 해외에 효과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현재까지 국내 판결은 SK이노베이션의 CCS가 독자 기술이라고 대외적으로 드러낸 격이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잇단 판결은 우리 독자 기술력이 인정받은 사례”라며 “앞으로 해외에서도 특허 분쟁이나 공급계약 때 긍정적인 영향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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