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결혼은 집안 행사” 예단 넉넉히, <2013년> 전셋집·신혼여행 준비에 올인
<1998년>“결혼은 집안 행사” 예단 넉넉히, <2013년> 전셋집·신혼여행 준비에 올인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에는 결혼식이 줄을 잇는다. 5월의 신부를 꿈꾸는 여성이 많은 건 예나 지금이나 다름 없다. 다만 시대가 변하면서 결혼문화가 달라졌다. 우리 삶을 크게 바꾼 1997년 외환위기가 분수령이었다. 그 전만 해도 예비 신혼부부 절반이 신랑 친구들의 함을 받는 함들이 행사를 했지만 요즘엔 찾아보기 어렵다. 주변 사람의 정보에 의존하며 발품을 팔던 혼수 마련 방식도 바뀌었다. 요즘은 전문 웨딩컨설팅 업체에 맡기거나 인터넷 검색으로 직접 품목과 가격을 알아본다. 우리 정치·경제·사회를 뒤흔든 외환위기 무렵의 결혼 문화와 2013년 현재의 결혼 문화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가상의 신랑·신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봤다.
#1. (1998년의 신부) “엄마, 아직 더 가봐야 해?” “아유,그럼 넌 겨우 세 군데 보고 결정하려고 그러니?” 엄마 손에 이끌려 네 번째 예식장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2년 동안 만난 남자 친구와 얼마 전 결혼을 결심하고 상견례까지 마쳤다. “스물 일곱이나 먹은 애가 왜 시집 갈 생각을 않느냐”던 부모의 잔소리에서 벗어난 것은 좋다. 그러나 핑크빛 신혼의 꿈에 젖기에는 세상이 너무 고단하다. 외환위기의 그늘이 너무 짙다. 친구 중 결혼을 무기한 미룬 커플도 여럿 된다.
당장 생계가 어찌될 지 모르는 판에 결혼은 불안하다. 서울의 4년제 사립대학을 나온 남자 친구도 몇 번의 불합격 통지를 받은 끝에 올 초 간신히 직장을 구했다. 제약회사 경영관리팀에서 일하는 나도 맞벌이라는 이유로 구조조정 대상에 오를까 노심초사다.
그런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주말마다 내 손을 잡아 끌고 결혼 준비를 하러 다니느라 바쁘다. 결혼에 관심도 지식도 별로 없는 나는 엄마가 친구나 친척들로부터 얻어 들은 정보에 의존하며 하나 하나 공부한다. 가장 중요한 예식장 선택부터 난관이다.
예식장이 마음에 들면 드레스가 별로고, 드레스가 예쁘면 가격이 너무 비싸다. 보통 드레스 대여, 화장, 야외 촬영을 묶어 예식장이 패키지 상품으로 내놓는다. 잘 사는 대학 동기의 언니는 서울 청담동에서 따로 계약을 했다는데 패키지의 두 배 비용이 들었다. 패키지라고 해봐야 대단한 것도 없는데 200만원 넘게 내야하다니 바가지 쓰는 기분이다. 어찌됐든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다. 어디 보자, 오늘 날짜가 1998년 6월. 결혼은 앞으로 딱 석 달 남았다.
#2. (2013년의 신랑) “벌써 계약됐다고요?” 부동산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자마자 허탈한 마음에 어깨가 축 처진다. 시세보다 저렴하게 나온 아파트 전세가 있다는 말에 회사에 반차를 내고 달려가는 중이었다. 5월 말까지 과연 신혼집을 구할 수 있을까?
누군들 로맨틱한 청혼을 꿈꾸지 않으랴. 결혼 적령기를 넘긴 서른 한 살의 여자 친구에게 끝내 당당하게 프로포즈 못한 건 집 한칸 살 돈은 모아야 한다는 남자의 자존심 때문이다. 그러나 식사자리에서 정색을 하는 여자 친구의 어머니를 본 순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후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집 생각뿐이다. 여자 친구의 회사와 나의 회사, 아파트 시세, 거주 조건 등을 따져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 지역으로 골랐다. 가격을 보니 기가 찬다. 전세가 2억4000만원으로, 매매가와 6000만원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지금 대기업 계열사에서 일하지만 직장 생활 5년 동안 모은 돈이 전세 가격의 3분의 1도 안 된다. 전세자금 대출, 주택구입자금 대출은 우리 둘의 소득이 높아 받을 수 없다. 어디다 하소연도 못하고 끙끙대는데 은퇴한 아버지가 빠듯한 노후자금에서 4000만원을 빼 주셨다. 고맙고 죄송하다. 그래도 1억2000만원이 모자란다. 이걸 다 대출 받으면 한 달에 이자만 50만원씩 나간다.
그 때 갑자기 전화가 울린다. 여자 친구다. “생각해봤는데 결혼 자금으로 모은 돈 6000만원 중에서 쓸 건 쓰고 남는 건 전세금에 보탤 게요. 그리고 부모님께서 3000만원 정도 도와주시겠데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집은 아직 못 구했지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우리는 예단과 예물을 포함한 결혼 비용을 최대한 줄여 전세금에 보태기로 결정했다. “집안의 개혼(開婚)이라 번듯한 구색을 갖추고 싶었는데….” 어머니는 아쉬운 듯 말끝을 흐리면서도 우리 결정을 받아들였다.
전셋값 부담에 프로포즈 미뤄#3. (1998년의 신부) “아무리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서울 종로의 한 금은방에 들어서며 시어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외환위기로 금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마당에 굳이 예물을 요란하게 살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조용히 따르기로 했다. 결혼 반지에 다이아몬드, 순금 세트, 유색 보석까지. 저 빨간 루비, 초록색 사파이어 보석을 내가 하고 다닐 날이 있을까? 하긴 예단으로 드려야 하는 반상기·은수저도 딱히 실용적인 물건은 아니다.
몇 년에 한 번 입을까 말까 한 한복을 나와 남자 친구, 양가 어머님 모두 맞춰 입는 것도 낭비라면 낭비다. 으레 그렇게 하는 거라는 어른들 말씀에 따를 뿐이다. 확실히 결혼은 집안끼리 치르는 행사인가보다. 엄마는 예물 구성을 듣더니 걱정하는 눈치다. “예단에 모피코트라도 얹어 보내야겠다.”
경기 침체 덕분에 집을 구하기는 한결 수월했다. 아파트 매매가와 전세가가 동시에 떨어지는 바람에 서울 목동의 80㎡ 크기의 아파트를 8000만원에 전세로 들어갈 수 있었다. 원래 시세보다 1000만원 싸게 구한 거란다. 집은 신랑이, 혼수는 내가 부담했다. 25인치 평면TV, 9kg 용량 세탁기 등 가전제품은 대기업 양판점에서 혼수 품목 패키지로 묶어서 할인 구매해 전셋집에 넣었다.
가전제품과 가구까지 합쳐 1000만원 정도 들었다. 신혼여행은 요즘 많이들 가는 괌으로 정했다. 여행사 허니문 상품에 나오는 화려한 리조트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나와 신랑의 오붓한 첫 해외여행이다.
결혼을 한 달 앞두고 이제 굵직한 행사는 야외 촬영과 함들이, 예단 보내기 정도만 남았다. 야외 촬영은 예식장과 연계된 사진기자가 와서 롯데월드·민속촌에서 찍어 준다. 신랑은 처음 하는 사진 촬영에 잔뜩 긴장한 모양이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한바탕 난리 쳐야 한다니 걱정되지만 뭐 어떠랴.
다들하는 일인데. “함진아비는 누가 하기로 했어?” “아, 준석이. 걔가 제일 넉살이 좋거든. 함값 두둑하게 준비하라던데?” “저기요, 이불·반상기·은수저에 현금 예단, 그리고 도련님 드릴 정장 한 벌까지. 돈 들어갈 게 한 두 군데가 아니거든요?”
더하기 보다 빼기가 익숙#4. (2013년의 신랑) 간소하게 결혼하기로 결정한 이상 ‘무엇을 하느냐’ 보다 ‘무엇을 뺄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 스튜디오 촬영은 생략했다. 대신 결혼식 당일에 사진작가가 와서 촬영해주는 스냅 사진을 계약했다. 직장을 다니느라 바쁜 여자 친구를 대신해 준비한 웨딩플래너는 “스튜디오 촬영을 생략하는 신혼부부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며 좋은 스냅사진 작가를 소개했다.
결혼식에 조금 더 욕심을 냈다면 100명 내외의 정말 친한 사람만 초대해 치르는 하우스웨딩도 괜찮아 보였다. 복잡한 결혼식장에서 콩 볶아먹듯 순식간에 해치우는 결혼이 아니라, 아늑한 장소에서 여유롭게 식을 올린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일반 예식장에 비해 비용이 많이 든다.
부모님께 미리 말씀을 드렸다시피 예물과 예단은 ‘안 주고 안 받기’를 지키려 노력했다. 서로 주고 받을 결혼반지 한 쌍으로 예물은 끝내고 예단은 이불 한 채만 했다. 장모님께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래도 반상기·은수저는 꼭 해드려야 한다”고 하시기에 부모님께 여쭤봤더니 “차라리 필요한 물건을 선물 받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대답하신다.
여자 친구와 고민 끝에 작은 디지털카메라를 하나 선물했다. 다행히 예단 포장을 풀어보시더니 매우 기뻐하셨다. “손주가 태어나면 이걸로 사진을 찍어서 사돈어른께 보내드려야겠구나.”
결혼 준비를 간소하게 하다 보니 혼수 준비에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이 걸렸다. 백화점은 신혼부부가 혼수를 살 경우 금액의 일정 비율을 상품권으로 돌려주는 웨딩 마일리지를 운영한다. 전자제품 판매점은 한꺼번에 혼수를 사면 전체 금액에서 할인 해준다. 돌아다니며 사고 싶은 모델을 고른 후 인터넷 최저가를 알아보고 다른 유통업체와 비교해봤다. 일부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일부는 전자제품 판매점에서 구입했다.
인터넷 검색으로 손쉽게 결혼 준비마른 수건도 짜는 심정으로 결혼 준비를 했지만 단 하나 아끼지않은 것은 바로 신혼여행이다. 화려한 결혼식을 포기한 여자 친구에게 신혼여행만큼은 근사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신혼여행지가 프랑스다. 니스·아비뇽·프로방스 등 프랑스 남부 지역을 돌면서 고성과 호텔에서 머무는 일정이다. 항공권과 숙박 모두 직접 예약해 450만원 예산 안에서 해결했다.
요즘 여자 친구는 인터넷 카페에서 정보 검색하는 재미에 푹빠졌다. 폐백이 뭐고 이바지 음식이 무엇인지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고 좋은 가게가 어디인지 추천 받는다. 결혼 준비가 대부분 끝난 뒤에는 신혼여행 코스를 짜느라 온종일 컴퓨터에 매달려 있다. 하긴 장모님도 멀리 떨어져 사시고 주변에 결혼한 친구도 많지 않은데 인터넷 없었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둘이 어떻게 준비했을까 싶다.
#5. (1998년의 신부) 드디어 결혼식 날. 나는 지금 신부 대기실에 앉아 드나드는 수많은 손님에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내년에는 여동생이 결혼한다. 3개월 동안 결혼을 준비하며 알게 된 많은 노하우를 알려줘야겠다. 언젠가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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