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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 “닻의 방향 바꿔야 순풍 따라간다”

cover story - “닻의 방향 바꿔야 순풍 따라간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은 리더십과 경영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바다 개척자인 그는 재미에서 이익을 얻고 마음을 다스려 미래를 본다.
1935년 전남 강진군 출생, 부산수산대(현 부경대) 어로학과 졸업, 1964년 동화선단장, 1968년 고려원양어업 이사, 1969년 동원산업 설립, 1996년~ 동원그룹 회장·한국원양어업협회장·한국무역협회장·여수세계박람회 유치위원장 역임



“ 기업(企業)이라는 한자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업을 꾀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이 모여서 하는 일이지요. 제가 회사를 설립한 지 오래됐지만 환경이 바뀌어도 기본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김재철(78) 동원그룹 회장은 “기업은 무엇보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힘줘 말했다. 3월 말 서울 중구 장충동 세계경영연구원(IGM)에서 열린 ‘IGM 창업기업가 사관학교’ 멘토 스쿨에서다. 그는 이날 예비 창업가들에게 기업가 정신에 대해 얘기했다. 3시간의 열띤 강연이 끝나고 그와 따로 만났다. 파란색 폴라 티셔츠를 입은 모습이 훨씬 젊어 보였다.

김 회장은 그룹 지주회사인 동원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해 동원산업·동원F&B·동원시스템즈 등 16개 계열사를 둔 중견그룹의 수장이다. 1969년 설립한 동원의 지난해 매출은 6조원을 넘는다(한국투자금융지주 포함). 2003년 동원금융지주(현 한국투자금융지주)를 분할 설립하기 전까지 금융 부문을 함께 이끌었다. 현재는 장남인 김남구(50) 부회장이 한국투자금융지주를 맡고 있다. 차남 김남정(40) 부사장은 동원엔터프라이즈에서 일한다.

참치 원양어업이 동원그룹의 시작이다. 김 회장이 44년 전 자본금 1000만원으로 세운 동원산업은 지난해 매출 1조5400여억원을 기록했다. 우리나라가 첫 남태평양행 원양어선 ‘지남호’를 띄운 것이 1957년, 당시 바다는 막막한 미지의 세계였다. 김 회장은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도 고속도로가 꽉 막혀 있으면 앞으로 나가지 못하듯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야한다”며 바다에 인생을 걸겠다고 결심한 때를 회상했다.

전남 강진군에서 9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 회장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다. 서울대 농과대학 장학생으로 입학할 예정이었지만 담임교사의 한마디가 마음을 흔들었다. “그 말씀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해요. ‘바다는 무한한 자원의 보고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잘 살려면 바다를 개척해야 한다. 나처럼 서울대 나와 봐야 너희와 입씨름밖에 더 하냐’고 하셨어요.” 그 길로 바다 관련 학과가 있는 대학을 알아보고 부산수산대(현 부경대) 어로학과에 원서를 넣었다.

“부산 영도 수산시험장(현 국립수산과학원)에서 강의를 듣는데 비가 오면 흙 바닥이 질퍽거리고, 배를 타고 실습을 나가도 바다가 생각처럼 넓지 않아 실망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60달러대였다. “집에서는 왜 좋은 대학 두고 뱃놈이 되려고 하느냐며 야단이었어요. 아버지는 ‘반찬은 직접 고기를 낚아 해먹으라’며 쌀만 보내기도 했어요. 눈 앞이 캄캄했습니다.”

대학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던 그는 제동산업이 한국 최초로 참치잡이 원양어선을 띄우기로 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아, 이거다! 싶었어요. 마침 그 회사 사람이 부산에 왔다기에 양담배를 사들고 찾아갔는데 국가적 이벤트에 어디 풋내기 대학생이 명함을 내미느냐고 무시당했어요. 대학 때 취득한 항해사 자격증도 내밀어 보고, 지도교수와 같이 사정해도 안돼요. 나중에 오기가 생기더라고.”

무보수에 식량과 야전침대를 직접 가져가고 죽어도 탓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겠다고 한 다음에 겨우 승선 허가가 떨어졌다.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축전을 보내오고 군악대가 팡파르를 울리며 부산 제 3부두에서 요란하게 출항했어요. 실습항해사 신분이라 보급품도 없고 ‘학생’ 하고 부르면 어떤 허드렛일이라도 다했지요. 일본에서 장비를 사 23일 걸려 남태평양 사모아에 도착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참치잡이 배가 아니었어요. 미국에서 들여온 배를 수리한 건데 먼저 고기를 잡고 있던 일본배 수십 척을 보고 알았어요.”

장비 다루는 법조차 몰랐지만 온 국민의 기대를 받고 온 터라 빈 손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새벽마다 4시간을 달려 깊은 바다에 낚시를 드리웠다. 일본 배가 잡은 고기를 보고 참치 생김새를 익혔다. 어류도감을 보고 값어치없는 고기를 골라냈다. 김 회장은 선풍기도 없는 무더위에서 점차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별을 보고 배 위치를 알아냈는데 선장·항해사가 없으면 그 역할을 내가 했어요. 어떤 날은 한참 보다 보니 별이 아니라 인공위성이야. 다른 나라는 인공위성을 띄우는데 난 여기서 무슨 강태공같은 짓인가 참 한심했어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지남호는 원양어업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1년 만에 복귀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지남호가 잡아온 참치를 각국 대사들에게 자랑하는 것이 대서특필됐다. 그 정도로 수산업이 낙후된 때였다. 지남호의 출항 이후 원양어선을 짓는 곳이 많아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남아프리카에 다녀 온 사람이 거의 없어 여기저기서 러브 콜을 받았어요.”

2007년 여수세계박람회 유치위원장으로 전남 여수를 찾은 김재철 회장.





20대에 ‘캡틴 킴’으로 명성1년 2개월을 항해사로 지내고 최연소 선장으로 발탁됐다. 1인당 국민소득이 70달러일 때 월급이 100달러였다. 부산 중구 남포동 술집이 뱃사람들로 대성황을 이뤘다. “사모아에서 일본 어선 70여 척, 한국 어선 7~8척이 조업을 하는데 큰 사고 없이 최고 어획고를 올려 ‘캡틴 킴’이 믿을 만하다고 소문이 났어요.”

그는 30세에 당시 최대 규모의 수산회사 고려원양어업의 초대 수산부장으로 스카우트된다. 배 3척을 이끌고 인도양으로 향했다. 선장·선단장과 본사 수산부장 1인 3역을 맡았다. 1년 후 돌아와 이사가 됐다. 업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김 회장은 1969년 일본 미쓰비시상사로부터 배를 빌려 3년 후 고기를 잡아 배 값을 갚는 조건으로 ‘동원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고려원양어업에서는 난리가 났지요. 제 대학 7년 선배가 그 회사 차장이었으니 그만큼 인재가 부족하던 시절이었어요.”

창업 초기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창업가는 이단자 취급을 당했어요. 제가 좋은 선장들을 데려갈까 시장에서 곱지 않은 눈으로 봤지요.” 동원산업은 창업 3~4년 만에 배를 6척으로 늘리며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러다 첫 번째 위기를 맞은 것이 1973년 1차 오일쇼크다. 리터당 1달러70센트였던 기름이 6달러로 치솟았다. “고기잡이라고 하면 빈 배로 와서 고기를 채워간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기름과 식량을 싣고 와서 고기와 바꿔 가는 겁니다. 기름 값이 큰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지요.”

1979년 2차 오일쇼크에는 기름 값이 9달러로 더 뛰었다. 수산회사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동원산업은 불황을 넘기 위해 새 배를 건조하기로 했다. 금융기관의 지불보증 없이 미쓰비시상사와 6년 분할 계약을 해 1975년에 4300t급 동산호를 바다에 띄웠다. “다른 회사들이 번 돈을 딴 곳에 쓰기 바쁠 때 동원산업은 한 번도 날짜를 어기지 않고 배 값을 치른 덕에 계약이 성사됐어요.” 캡틴 킴으로 20년 가까이 쌓은 신뢰가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동원산업은 위기 때마다 오히려 규모를 키워나갔다. 2차 오일쇼크 때는 선원을 모두 한국인으로 뽑고 김 회장이 직접 배에 몸을 실었다. 한국 최초 헬리콥터 탑재 참치어선 코스마데마필호는 김 회장의 지원에 힘입어 280만 달러 적자를 1년 만에 22만 달러 흑자로 돌려놨다. 1997년 외환위기의 파고 역시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의 부실을 털어내고 저평가된 회사에 투자하는 계기로 삼아 기업 규모를 확대했다.

동원그룹이 금융업에 진출한 것은 뜻밖의 선택이었다. 바다에서는 캡틴 킴으로 통했지만 육상 네트워크가 부족했다. 부족함을 메우려고 1980년대 초 고려대·서울대 경영대학원 과정에 다녔다. 그곳에서 ‘하버드 케이스 스터디’가 자주 인용되는 것을 보고 유학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했다. “도대체 하버드 케이스 스터디가 뭘까 직접 신청하려고 보니 일본은 수강 가능한 학생 수가 4명, 한국·중국·인도는 각 2명이었어요. 쉽지 않겠다 싶어 알고 지내던 일본 기업인에게 추천서를 써달라고 해 최각규 전 경제부총리와 둘이 미국 하버드대로 갔습니다.”

그는 국가 경쟁력 분석 툴인 ‘다이아몬드 이론’을 제시한 마이클 포터 하버드대 경영대학원(MBA) 교수의 수업을 들었다. “교수가 가까이 오면 질문이라도 할까 등에 땀이 주르륵 흘렀어요. 그곳에서 공부하다 죽는 사람도 있었으니 영어를 못하는 저는 스트레스가 엄청났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영어를 잘 몰라 이론을 다 깨치진 못했지만 세상 돌아가는 분위기를 읽은 것이 소득이었어요.”

1981년 김 회장은 또 한번 ‘아, 이거다!’ 하는 느낌을 받는다. 바로 참치 캔 생산이다. “미국에 있을 때 미국 참치유통·가공업체인 스타키스트를 방문했어요. 1인당 국민소득이 2000달러가 되면 참치 캔을 사먹는다는 이론이 있었죠. 그때 한국 1인당 국민소득이 1200~1300달러였어요.”

하버드대 MBA 최고경영자 과정을 마치고 귀국해 1982년 동원참치 생산을 시작했다. 출시 가격은 당시 돈으로 1000원. 자장면 한 그릇보다 훨씬 비쌌다. 하지만 남대문 시장에서는 미국 유학생들이 3800원을 주고 사먹던 제품이었다. 동원참치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끈 건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다.

“그땐 참치 캔이 막 공장에서 나와 따뜻한 채 팔려나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요.” 참치 캔을 생산·유통하는 동원F&B는 지난해 매출 1조6000억원을 기록했다. 김 회장에게 참치 캔을 알려준 미국 1위 참치업체 스타키스트는 2008년 동원F&B에 인수됐다.

김 회장은 미국에서 또 하나 새로운 발견을 했다. “1980년대 한국에서는 증권회사라고 하면 산업이 아니라 장사치로 여겼어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어딜 가나 가장 우수한 사람들은 증권회사로 가더군요. 재미있다 싶었죠.” 마침 정부가 한신증권 입찰을 했다. 동원은 입찰가 71억2000만원에 낙찰 받아 증권업에 진출했다. “그때는 동원이라고 하면 잘 몰랐어요. 수출만 했으니까. 원양어업 하던 회사가 증권회사를 낙찰 받았다고 하니 한참 떠들썩했지요. 나중에 들어보니 자금출처 조사까지 철저히 했더라고.”

회사를 낙찰 받았지만 금융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막막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인재를 모으는 것이 어려웠다. 김 회장은 원양어선에서 기본 생활비만 지급하고 나머지 급여는 어획량에 따라 나눠주는 것에 착안해 증권회사에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했다. 또 1968년 한신증권 설립 이후 처음으로 공개채용을 했다. 김 회장은 직원 교육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1974년 시작한 직원 강연 프로그램 ‘동원 목요 세미나’는 얼마 전 1890회를 넘어섰다. “선장이 선원 훈련하듯 했으니 하드 트레이닝이지요.”

동원증권은 증권사관학교로 불리며 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을 비롯한 김정태 전 KB국민은행장, 최현만 미래에셋생명 수석부회장, 장인환 KTB자산운용 대표, 송상종 피데스투자자문 사장 등이 동원증권 출신이다. 2005년 동원증권이 한국투자증권을 인수해 지금의 한국투자금융지주가 탄생했다.

수십 년 동안 면접을 봐 온 김 회장은 “어느 정도 관상을 보는 눈이 생긴 것 같다”며 웃었다. “창업 초기에는 성질이 급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을 뽑았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성실하고 열심히 훈련하면 될 것 같은 사람을 채용했지요.” 김 회장은 창업할 때 자신이 잘 아는 분야에 뛰어들라고 강조했다. 또 누군가 도와줄 사람을 옆에 두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부하를 쓸 때는 자신을 교주로 여길 만큼 절대적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걸 ‘치마 이론’이라고 하는데 치마는 아래에서 보면 다 보이잖아요. 마찬가지로 아래 부하직원은 리더가 거짓말을 하면 다 압니다. 그만큼 리더는 열심히 잘해야 하고 부하는 어려울 때 같이 죽는다는 마음이 있어야하지요.” 그는 리더십은 자기관리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배에서는 칼로 찔러서 바다에 던져버리면 그만입니다. 선장이 망설이면 선원들도 흔들립니다. 선장 시절 말을 듣지 않는 험한 선원들이 있으면 술 내기를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내가 지면 네가 어른이고 내가 이기면 무조건 복종하는 조건으로요. 단, 술을 먹고 기상 시간인 새벽 6시에 갑판에 나와 있어야 승리하는 방식입니다. 새벽 5시까지 술을 마시고 저는 찬 물에 얼굴만 내놓고 시간이 되기를 기다립니다. 선원은 당연히 못 나오지요. 내 약점을 잡히지 않아야 존경 받을 수 있지 않겠어요.”

김 회장은 1954년 바다로 눈을 돌릴 때부터 지남호에 올라 동원산업을 설립하고, 참치 캔을 생산하고, 증권업에 진출하기까지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마다 “재미있겠다”라고 느꼈다고 한다. 사업가 기질이 발동하는 것일까. “재미있다는 영어 단어가 뭐죠? ‘interest’지요. 이 단어는 ‘이익’이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단순히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돈이 될 것을 아는 것이죠.”

김 회장은 직감을 넘어선 사고의 원칙이 있다고 소개했다.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것, 다면적으로 생각하는 것, 장기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역사적 인식을 갖고 사물을 봐야 하는데 과거에 대한 기억력, 현재에 대한 판단력, 미래를 보는 상상력이 바탕이 됩니다.”

물론 그의 판단력이 빗나간 적도 있었다. “원양어업으로 돈을 벌고 처음에 수출품목으로 정한 것이 카메라였습니다. 독일 라이카, 일본 캐논이 세계를 평정하지 않았습니까. 경기도 성남에서 교환 렌즈 수출로 시작해 1970년 대 카메라를 직접 생산해 판매했어요. 브랜드가 ‘포토맨’이었어요. 아마 국내 처음일 겁니다.

처음에는 보석상에서 팔아 현금이 들어오니 수익이 괜찮았어요. 그런데 대기업이 카메라 시장에 뛰어들면서 판도가 바뀌었어요. 규모가 큰 기업이 한 달 외상을 주면 우리도 따라 한 달 외상을 줬는데 1년 8개월 동안 치킨 게임을 벌이다 손들었죠. 판단이 옳다고 반드시 성공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예입니다.”

바다로, 세계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4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영국이 세계를 제패할 때 최고 조선소가 있었습니다. 지금 세계 1·2·3위 조선소가 모두 한국에 있습니다. 해운은 세계 6위, 수산은 세계 10위쯤 될 겁니다. 20년 후 인구가 85억 명으로 늘어난다고 합니다. 그때가 되면 자원의 한계가 올 수밖에 없습니다. 바다는 무한한 자원의 보고입니다.”

반평생을 바다를 연구하는데 쏟은 김 회장에게 은퇴 후 계획을 물었다. “은퇴 후에는 교육사업에 힘쓸 생각입니다.” 동원산업은 1979년 동원육영재단을 설립해 장학금 수여, 유아 독서 지원 등을 해왔다. 또 그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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