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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품격④ 가문을 위한 패밀리보드 - 경주 최부자처럼 가훈 만들자

부자의 품격④ 가문을 위한 패밀리보드 - 경주 최부자처럼 가훈 만들자

포브스코리아는 3월호부터 ‘부자의 품격’을 연재하고 있다. 첫 회에 품격있는 부자의 의미를 찾은 데 이어, 품격 있는 부자의 조건과 리세스 오블리주를 차례로 담았다. 이번 호에는 ‘가문을 위한 패밀리 보드(Family Board)’를 살펴봤다.



포브스코리아는 최근 전문가 좌담을 통해 품격 있는 부자를 정의한 바 있다. ‘정신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물질적으로 그 일을 할 정도의 여유가 있고, 사회적으로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인정받는 사람’이라는데 의견을 모았다. 정신적 행복, 물

질적 풍요, 사회적 만족 세 가지 조건이 균형을 이뤄야 가능한 일이다.

품격 있는 부자의 조건을 갖춘 뒤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부자의 품격 상속’이다. 가업 상속이나 재산 상속처럼 품격 역시 대를 이어 물려줘야 한다. 경주 최부자 집을 비롯해 스웨덴의 발렌베리, 영국의 로스차일드, 미국의 록펠러 가문이 100년 넘게 존경 받는 이유다.

품격을 자녀에게 물려주기는 쉽지 않다. 창업자가 소유와 경영을 독자적으로 결정할 때는 분란이 없다. 예를들어 가족으로 구성된 주식회사의 경우 소유권자들의 의사결정기구가 주주총회, 경영권자들의 의사결정기구가 이사회다. 창업 초기에는 가족·소유권·경영권 관련 의사결정은 모두 창업자가 한다. 창업자가 회사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면 의사결정권자는 각각 달라질 수 있다. 사공이 많아지면 갈등이 생길 수 있다. 한 세대 더 물려주면 사촌 형제까지 합세해 갈등과 분쟁이 더 빈번해진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패밀리보드(Family Board)다. 창업자의 핵심가치가 대를 이어 전해질 수 있도록 하는 가문관리위원회다. 해외 큰 부호나 명망가에서는 패밀리보드를 운영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제약회사 독일 머크 그룹은 회사를 13대째 가문이 운영한다. 지분을 소유한 가문 멤버가 130명이다.

이 중 13명으로 구성된 패밀리보드가 가문이 지켜야 할 원칙을 정한다. 회사 경영과 관련된 의사 결정뿐만 아니라 후계자 양성 교육까지 맡는다. 지난해 8월 한국을 방문한 프랭크 스탄겐베르그 하버캄 머크 회장은 기자 간담회에서 “머크가 340여년간 회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가족 기업이지만 핵심 가치를 가족이 아닌 기업의 이해관계에 두고 운영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수한 전문경영진을 영입하고 회사에서 번 돈은 회사로 재투자한다는 창업자의 원칙을 지킨 것도 한몫했다”고 부연했다.

패밀리보드를 만들기 위해 먼저 할 일이 있다. 가문 구성원이 공유하고 지켜야 할 가치를 정해야 한다. 패밀리보드 운영에 필요한 기본 원칙인 가문 헌장(Family Mission Statement)이다. 창업자의 핵심 가치와 함께 기업 경영의 기본 철학으로, 모든 활동에 뿌리가 된다. 머크 그룹의 가문 헌장을 보면 핵심 공유 가치의 큰 틀은 용기·존중·투명성·책임이다. 이는 수 백년 동안 계승됐다.

발렌베리 가문의 가문헌장도 빼놓을 수 없다. 1856년 설립된 발렌베리 그룹은 스웨덴 2위 은행 SEB와 세계 2위 가전업체 일렉트로룩스, 세계 최대 통신 장비 업체 에릭슨, 스웨덴 항공 등 다양한 업종 19개 기업의 경영권을 소유한다. 연간 매출액이 약 2030억 달러로 스웨덴 국내총생산의 37%다. 이 가문에서 5대째 그룹 총수를 맡고 있다. 분명 세습 경영인데도 스웨덴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뭘까. 발렌베리가 150여 년 동안 엄격하고 철저하게 지켜온 3가지 원칙 덕분이다.

첫째, 발렌베리 후계자는 기업 주식을 소유하지 않는다. 주식은 지주회사인 인베스터가 보유한다. 인베스터 주식은 크누트 앤 앨리스 발렌베리 재단 등 4개 공익재단이 소유한다. 즉 모든 기업 이익은 배당 형태로 인베스터를 통해 4개 공익재단으로 들어간다. 매년 그룹 이익금의 85%를 법인세로 납부한다. 재단 수익금은 대학 교육이나 연구개발에 쓰인다. 재단 자금은 발렌베리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쓸 수 없다. 단지 재단과 기업에서 일하면서 급여만 받을 뿐이다.

둘째, 철저한 검증을 거쳐 그룹 후계자를 뽑는다. 조건은 부모 도움 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 유학을 다녀오고 해군 장교로 복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노사 화합과 차등의결권이다. 발렌베리는 1938년 이후 집권당인 사회민주당을 지지했다.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장기집권한 사회민주당과 발렌베리 가문의 공조 체제가 스웨덴 복지의 기반이다. 한번도 노사 분쟁이 없었다. 차등주식의결권 제도는 주식 한 주당 한 표의 의결권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한 주에 1000표의 차등의 결권을 부여했다. 경영권을 적극적으로 방어해 창업주의 가치가 후손에게 지속적으로 전해진다.



로스차일드 가훈은 협조·완전·근면19세기와 20세기 초 세계 금융권을 지배한 로스차일드 그룹 역시 창업주의 기본 원칙을 지키고 있다. 우선 한우물만 팠다. 가문의 장남들은 영국 런던의 NM로스차일드 은행에서 금융업을 배웠다. 둘째, 정보력을 중시했다. 다섯 아들을 유럽 각 지역에 보내 은행을 설립하고 그 정보를 투자에 활용했다. 대표적인 예가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한 것을 알고 영국 국채를 공매도해 큰 돈을 번 일이다.

셋째, 가문 관리다. 로스차일드는 1812년 세상을 떠나기 전 5가지 유언을 남겼다. 재산의 외부 유출을 막고, 재산 내역을 공개하지 않으며, 재산 상속 시 변호사 개입을 막았다. 또 가문 은행의 요직은 가문 내부에서 맡고, 장남이 가문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 휘호에 새겨진 협조(concordia)·완전(integritas)·근면(industria) 세 라틴어가 그의 유언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가문헌장이 있었다. ‘부자는 3대를 못 간다’는 한국 속담을 깬 경북 경주 최부자 집이다. 조선조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정무공 최진립에서부터 마지막 최준까지 300년 동안 부를 이었다. 그 비밀은 가훈에 있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 지니지 마라.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다섯째, 시집 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여섯째, 사방 백리(39㎞)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악착같이 재산을 늘리기보다 대대로 나눔을 실천한 덕분에 최부자 집은 재산을 지켜낼 수 있었다.

패밀리보드의 정신적 근간이 가문헌장이라면 구체적인 가이드 라인은 패밀리 운영 지침(Family Board Statement)이다. 패밀리 보드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부터 가문 구성원, 자산 처분까지 의사결정 방법을 상세하게 기록한 실질적인 가문 운영 규정이다. 가문헌장 아래 패밀리 운영 지침을 만들어 가치를 실천한다면 ‘제2의 경주 최부자 집’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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