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EO 에세이 - 남용하다 빛바랜 말 ‘민주화’

언어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속성을 지니게 마련이다. 출생·확장·변용·소멸을 거친다. 같은 발음이라도 시대에 따라 뜻이 달라지고 사용자 계층을 이동한다. ‘동무’라는 단어가 대표적이다. 어린 시절에 자주 쓰였지만, 북한에서 더 많이 사용해서인지 지금은 ‘어깨동무’와 같은 복합명사로만 사용되고, 단독으로는 ‘친구’를 주로 쓴다.
신성한 단어가 욕설로 변천하거나 반대의 경우도 나타난다. 영어사전에서 지저스 크라이스트(Jesus Christ)의 첫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이지만, 둘째 의미는 ‘제기랄’이다. 몽골에서 하늘을 뜻하는 탱그리도 마찬가지이다. 고대 알타이어인 ‘탕구르(Tangur)’가 어원으로 한자로 음차하면 ‘단군(檀君)’, 즉 ‘거룩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수장’의 뜻이다.
부여 계통인 고구려의 제천 행사에서 경배하던 하늘신 탱그리는 오늘날 중국 서부 소수민족의 신앙대상으로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무당을 뜻하는 ‘당골네’로 의미가 퇴색하고, 심지어 중·고교생이 사용하는 ‘X탱구리’라는 욕설로 전락했다.
유사한 패턴은 이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미국 경제학자인 롤랜드 프라이어는 1961년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아이 1600만명의 이름을 분석해서 중요한 패턴을 발견했다. 특정 이름이 고소득에 교육 수준이 높은 부모 사이에서 인기를 얻으면 사회·경제적 지위라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서 10년 정도 지나면 중간층으로, 또 10년이 지나면 저소득에서 유행하고 20년 단위로 이 과정은 반복된다.
예를 들어 1980년대 고소득층에서 가장 인기를 얻은 여자아이 이름인 앰버(Amber)와 헤더(Heather)는 2000년대 저소득층 이름이다. 1990년대 가장 인기인 부유층 이름인 로렌(Lauren)과 메디슨(Medison)은 현재 중간 소득층 이름이다.
최근에는 ‘민주화’가 이 범주에 들어가는 모양이다. 인기 걸그룹 가수가 “저희는 개성을 존중하는 팀이거든요. 민주화시키지 않아요”라고 말하면서 파장을 일으켰다. 여기서 ‘민주화’란 ‘개성 없이 획일화된다’는 의미로 변용됐다. 실제로 젊은 세대간에 주가 하락을 ‘주식 민주화’로 표현하거나, 시험 망친 것을 ‘교수한테 민주화 당했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흔하다.
숭고한 ‘민주화’의 의미를 퇴색시킨다는 점에서 비난도 거세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남용이 가치를 떨어뜨리거나 의미를 변용시킨다는 점에서 ‘민주화’란 단어도 예외가 아니라는 방증이다. 그동안 일부 정치 집단과 시민단체에서 무책임하고 무분별하게 온갖 명분과 구호 앞에 ‘민주화’를 갖다 붙여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댄 자업자득 아닐까.
그러나 마음 한 켠으로는 역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 저항시인 김지하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쓰던 간절함과 경건함은 어디로 갔나. 기껏 일부 정치 집단과 이익단체의 명분을 포장하는 형용사로 전락하더니, 이제는 연예인과 일반인들 가운데 무질서와 혼란을 뜻하는 명사로 추락한 운명이 씁쓸하다. 역시 소중할수록 아껴야 유지됨을 ‘민주화’라는 말의 처지에서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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