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EOUL REPORT - 필리핀은 용서의 나라?

일본에는 ‘8월 저널리즘’이라는 말이 있다. 일본의 8월 달력에는 ‘히로시마 원폭의 날’(8월 6일), ‘나가사키 원폭의 날’(8월 9일), ‘종전기념일’(8월 15일) 등 제2차 세계대전 관련 기념일이 몰려 있는데, 이 기간 동안 일본 언론이 전쟁 체험자의 증언 같은 전쟁 특집 기사를 집중 보도한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언론에서 소개하는 전쟁 체험자는 원폭 피폭자나 공습 피해자, 전 일본군 병사, 전 학도병, 구 일본군에게 부상당한 아시아인 등 전쟁의 양상만큼 다양하다. 원폭, 공습 등 자신이 피해를 입은 경험만이 아니라 전쟁 당시 저질렀던 죄를 고백하는 전 일본군 병사의 증언이 게재되기도 한다.
이런 8월 저널리즘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사항은 ‘다시는 비참한 전쟁을 반복해선 안 된다’는 실로 단순한 메시지다. 혐한 시위에 참가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이목이 집중될지라도 압도적 다수의 일본인에게 있어 8월은 평화와 반전의 맹세를 새롭게 다짐하는 소중한 기간이다.
그런 8월 저널리즘의 양상이 올해는 조금 다르게 나타났다. 지난 해 한일 정치관계가 ‘역대 최악’이라고 일컬어지는 상황을 반영하듯 한일 간 역사인식을 둘러싼 갈등을 다루는 보도가 크게 늘었다. 예를 들면 종전기념일에 일본 언론에서 크게 다뤄진 뉴스는 한국의 한 민주당 국회의원이 야스쿠니 신사에 방문해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우익단체와 일촉즉발의 긴장상태를 일으켰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각료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향한 한국 정부의 반발도 크게 다뤄졌다. “올해 8월 15일의 또 하나의 주인공은 한국이었다”라고 말하는 일본 언론 관계자가 있을 정도다.
엇갈리기만 하는 한일 간 역사인식을 보고 있자면 지난해 여름 한국에 어학연수를 갔을 때 겪은 일화가 떠오른다. 어느 날 한국 대학생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얼마 전 필리핀 여행을 다녀왔다. 필리핀인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침략을 받았음에도 일본을 나쁘게 말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한국은 매일 신문이나 TV를 통해 일본을 비판하고, 많은 사람이 일본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일본이 한국보다 필리핀을 더 관대하게 대했기 때문에 그런 걸까?”
나는 이 학생의 질문에 놀랐다. 분명 필리핀 국민 대다수는 일본에 호감을 갖는다. 예를 들어 8월 미국 퓨 리서치 센터가 발표한 국제여론조사에 따르면 필리핀인들의 일본 호감도는 78%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호주와 나란히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한국은 22%, 중국은 4%였다.
그러나 일본이 전쟁 중에 필리핀 사람들에게 입힌 피해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개시한 1941년 12월, 일본군은 미국의 거점이었던 필리핀을 침공해 점령했다. 필리핀에서 죽은 일본군은 52만 명에 달한다. 그러나 필리핀인은 그 두 배인 111만 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게릴라로 오인된 시민이 일본군에게 살해당하는 사례도 많았다고 한다. 111만 명은 당시 필리핀 총 인구의 16분의 1에 해당하며, 필리핀은 카를로스 로물로 전 필리핀 외무장관의 말대로 “아시아에서 인구 대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국가”다.
나는 그 학생에게 “만약 필리핀 사람들이 일본으로부터 입은 피해가 한국에 비해 가벼웠기 때문에 대일본 감정이 나쁘지 않다고 말하면 상처받는 사람도 있지 않겠나”라고만 말했다. 그와 동시에 전쟁으로 입은 피해의 규모와 현재의 감정, 그리고 용서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봤다.
필리핀이 일본군에 의해 가혹한 희생을 강요당했음에도 현재 대일감정이 양호하고 일본과 역사문제를 두고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는 역대 대통령이 역사 문제로 일본을 소리 높여 비판하지 않았다는 점과, 국민 다수를 점하는 가톨릭교도의 ‘용서 문화’ 덕분이라고 한다.
전후 일본과 전후처리를 놓고 협의한 키리노 대통령은 국민의 불만을 억누르고 일본을 ‘이웃나라’로서 맞이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키리노는 전쟁 중 처자식 3명을 일본군에게 살해당했다. 물론 일본인은 필리핀인의 관용에 기대 과거로부터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나는 전후세대에게 전쟁 책임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려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똑바로 알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대학생의 의문을 계기로 필리핀과 한국을 비교해보면, 역사문제에 대한 인식 차이가 왜 이렇게 큰지 의문이 생긴다. 한국과 일본은 국교정상화 50주년을 2년 앞두고 커다란 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를 타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면 때론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보면서 해결책을 모색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 필자 다케다 하지무(일본)는 아사히 신문 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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