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siness - 현지 기업가 통해 본 메콩강 4국 경제탐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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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움직여도 땀이 흘렀다. 베트남과는 또 다른 더위다. 몽리띠 그룹 사옥은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시내 한복판의 노르돔에 있었다.
최대 재벌이지만 한국의 대기업 사옥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몇 차례 우여곡절 끝에 겨우 인터뷰가 이뤄졌다. 사옥 2층 회장실에 자리한 건 오전 10시38분. 애초 8시 30분 약속이 2시간 이상 늦어졌다. 명함엔 금색 글씨로 ‘설립자’라고 적혀 있다.
몽리띠 회장은 “찾아와줘 고맙다. 총리와의 회의가 있어 늦어졌다. 미안하다. 오후엔 상원회의가 있다. 시간 더 못 내줘 미안하다”고 했다.
총리와의 회의? 짐짓 모른 체 묻자 “선거가 얼마 남지 않지 않았느냐”는 반문이 돌아왔다(캄보디아 총선은 7월 23일이다). 그는 캄보디아 최대 농업재벌이자 상원의원이요 훈센 총리의 절친이기도 했다. 새까맣게 탄 얼굴에 강한 눈빛, 큼직한 순금 의원 배지가 상의 왼쪽에서 빛났다.
어떻게 창업했나.
나나 회사 모두 역사가 어렵고 길다. 캄보디아 역사가 그랬잖은가. 1979년 폴포트가 쫓겨났을 때 나는 시아누크빌의 항구 노동자였다(시아누크빌은 캄보디아 유일의 임해항만도시다). 당시 26살. 폴포트가 죽자 세상이 달라졌다.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년 뒤인 1980년 자전거 택시 지클러를 몰았다. 외국인을 태우고 페달을 밟았다. 빵도 팔았다. 당시 캄보디아 사람들 누구나 하듯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다했다. 먹어야 사니까. 그때 해봤던 작은 사업들이 나중에 큰 도움이 됐다. 80년대 말에야 회사 설립이 가능해졌다. 1989년 몽리띠를 설립했다. 캄보디아 건설업체 1호다. 이후 고무회사·팜오일·항만·돼지농장으로 넓혀갔다.
다들 어려울 때 혼자 성공했다. 비결이 뭔가.
내전으로 산업 기반시설이 다 파괴돼 어려움이 많았다. 전후 세대라 배움이 짧다. 배운 사람을 왼손 오른손으로 써서 부족한 부분을 채웠다. 성공의 최고 비결이라면 훈센을 만난 것이다. 1970년 초, 내전을 피해 한 절에 의탁했다. 캄보디아 젊은이 대부분 그땐 그랬다. 먹을 게 없고 힘들면 절에 의탁한다. 나는 동자승이었고, 훈센은 허드렛일을 했다. 먹을 것도 주고 친해졌다. 그땐 한사람이 훗날 총리가 되고 또 한 사람이 옥냐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다.
옥냐가 뭔가.
일종의 작위 같은 건데, 옥냐 얘기하면 오래 걸린다. 옥냐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다. 돈 있는 옥냐가 있고, 없는 옥냐도 있다. 나는 1996년 옥냐가 됐다. 상원의원이라 각하(His Excellency) 엑설런시’까지 갖고 있는 옥냐 중에도 최고다. 이 지위로 뭘 할 수 있느냐는 건 민감한 부분이다. 그런 얘기는 안 하겠다. 너무 기사거리를 많이 주면 곤란하지 않나.(웃음)
요즘 젊은이들도 부자될 수 있나.
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훈센을 친구로 둘 수 없지 않나.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요즘 사람들은 나처럼 밑바닥 어려움을 모른다. 즐기려고만 한다. 돈 조금 벌면 도박·여자·술에 빠진다. 우선 그런 걸 경계해야 한다. 노래방부터 조심해야 한다.
총선이 7월이다. 훈센을 위해 뛰고 있나.
총력을 다하고 있다. 승리할 거다. 훈센 총리 영도 아래 산업이 급속히 발전하고 나라경제가 날로 좋아지고 있다. 나도 농업 쪽에서 힘을 쓰고 있다. 1만3000㏊의 팜오일 공장에 1만여 명을 고용하고 있다. 이 중 최소 9000명은 훈센의 캄보디아인민당(CPP, Cambodian People’s Party)을 찍을 것이다. 자신한다.
매출이 얼마나 되나.
말하기 어렵다. 내 그룹이 캄보디아에서 제일 크다지만 어디 한국 기업만 하겠나. 나 뿐 아니다. 아무도 매출 얘기 안한다. 공개할 이유도 없다. 주식회사도 아닌데….
캄보디아엔 아직 주식회사 설립이 안된다. 개인 명의의 유한회사만 세울 수 있다. 몽리띠 그룹도 아직까지 가족회사로 운영된다. 아내·아들·딸·사위가 각기 회사를 맡아 경영한다. 몽리띠 회장은 그룹총수 역할을 한다. 팜오일·건설·항만·플랜테이션농장을 거느린 몽리띠 그룹의 매출은 2008년 약 5억 달러 정도로 추산된다.
캄보디아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은 약 150억 달러, 1인당 GDP가 945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몽리띠의 매출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물론 한 나라 최대 농업재벌치고는 크지 않은 규모다.
안 하는 사업이 없다. 문어발 확장은 왜 했나.
그렇지 않다. 몽리띠는 농업그룹이다. 캄보디아에서 기업적으로 농업을 한 첫번째 회사다. 우리나라 산업의 80%가 농업에 의존한다. 기반이 없는 나라다. 내전으로 그나마 있던 것도 다 까먹었다. 사업을 할 때 주변 국가를 벤치마킹했다. 팜오일을 시작한 것도 그래서다. 오일 추출 공장도 먼저 시작했다. 농업 중엔 식물보다 동물 사육이 더 어렵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선 태국이 돼지 사육을 가장 먼저 했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돼지가 우리 돼지 농가를 황폐화시켰다. 태국 돼지를 막고 우리 돼지를 지키기 위해 돼지 사육을 시작했다.캄보디아는 지금도 한 해 200만 마리의 돼지를 수입한다.염소·양고기도 외국에서 수입한다. 농업 주권을 세우는 게 중요하다. 길게 보면 몽리띠는 농업에 집중할 거다.
그의 말은 1960~70년대 우리네 개발연대 시절 ‘기업을 세워 나라에 보답한다(事業報國)’는 구호를 떠올리게 했다. 실제 그는 훈센의 요청에 따라 기업농을 일구기 시작했다는 뉘앙스를 많이 풍겼다. 그에겐 개인 항만도 있다. 훈센은 왜 개인의 항만 소유를 허용해줬을까. 어떻게 개인 항만 운용이 가능할까. 그는 항만 얘기를 길게 했다.
“캄보디아 최대 항만은 시아누크빌에 있다. 물론 프놈펜 항만도 작지는 않다. 시아누크빌이 5성급이라면 프놈펜은 3성급이다. 규모가 작은 업체는 이용하기 쉽지 않다. 그에 비하면 내 항만은 일종의 게스트하우스로, 작은 물량 수입 때 활용한다. 훈센 총리는 ‘오픈 스카이(Open Sky)·오픈 씨(Open Sea)’ 정책을 펼치고 있다. 하늘이든 바다든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하겠다는 의미다. 그래서 세관·경찰·해관 모두 연결해 원스톱 서비스를 펼친다.
몽리띠 항은 개인 항구지만 캄보디아 정부가 통관절차를 맡는다. 소형 사업자들이 많이 쓴다. 시아누크빌보다 처리 비용도 싸다. 시멘트를 수입할 때 시아누크빌이 t당 5달러라면 내 항구는 1달러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면, 이자 비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몽리띠 항구는 투자금이 1500만 달러다. 전액 자체 자금으로 지었다. 반면 시아누크빌은 7500만 달러를 일본에서 빌렸다. 갚을 돈이 많으니 사용료가 비쌀 수밖에.”
그는 한국인 윤씨 얘기를 했다. 한국인과 꽤 교감이 있었다. 한국에 대한 인상도 좋다고 했다. 자주 한국을 찾아 둘러 보고 배운다고 했다. 1995년 팜오일 사업을 시작할 때 동업자가 한국 사람 윤이었다. 지금은 지분을 대만에 팔고 떠났지만 몽리띠 그룹과 사이가 나빠져서 그런건 아니라고 했다.
지금도 한국에 가면 윤이 쌈밥을 사준다고 했다. 윤이 누구냐고 물었다. 몽리띠 회장은 “그냥 윤이다”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몽리띠 그룹의 도약에 아직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기업의 투자를 원했다. 하지만 투자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데는 익숙치 않아 보였다.
“캄보디아 정부는 외국인 자금 유치를 장려한다. 몽리띠 그룹에도 외자가 중요하다. 우리는 대부분 자체 자금으로 기업을 꾸려가고 있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면 연 10% 이상의 이자를 물어야 한다. 한국처럼 싼 이자에 대출 받기 어렵다. 농업에 대한 지원도 미약하다. 캄보디아 정부가 힘이 없고, 은행은 돈이 없다. 한국 기업의 투자가 절실하다.”
빈부격차가 커지고 있다. 점점 문제가 되지 않겠나.
맞는 말이다. 가난한 사람이 많으면 사회문제가 생긴다. 해결해주고 싶은 데 내 능력이 그만큼 안된다. 직원들에게 월급 많이 주고 대우 잘해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팜오일 농장 직원의 경우 부부가 700달러 정도 월급을 받는다(캄보디아의 최저 임금은 월 81달러다). 엄청나게 많이 주는 것이다. 돼지농장 400명 노동자에겐 세 끼 밥을 다 제공한다. 내가 한국에 가보니 못 사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 같다. 아무리 못살아도 캄보디아만큼이야 못 살겠는가.
캄보디아의 경제의 향후 전망은.
정치 안정이 가장 큰 장점이다. 다양한 사업이 두루 발전할 거다. 7월에 CPP당이 압승하면 정치는 더욱 안정될 거다. 경제발전에는 정치 안정이 최고의 조건이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한국에 감사한다”고 했다. 캄보디아에서 한국에 취업한 많은 젊은이가 고급 기술을 익혀 귀국하는데, 캄보디아 경제발전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슬리퍼 한 켤레를 보여줬다. 그가 훈센과 함께 도망쳐 절간에 숨었을 때 신던 것이라고 했다. 아무 것도 없이 달랑 고무신 한짝, 옷 한벌 갖춰 입지 못했다고 했다. 슬리퍼는 폐타이어를 잘라 만들었다. 40여 년이 흘렀지만 슬리퍼는 멀쩡했다.
지금도 회장실 서재 한가운데 모셔놓고 옛날을 잊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처음 언론에 공개하는 것”이라고 했다. 특유의 신발론도 폈다. “신발과 식량 중 신발이 중요하다. 식량 없으면 신발 신고 구하러 가지만, 신발이 없으면 식량 있어도 그 식량이 다 떨어지면 끝이다.” 몽리띠 어록 1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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