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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iness - 고급 시계 시장의 숨은 손들

business - 고급 시계 시장의 숨은 손들

명품 시계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딜러들은 해외 본사의 직영 매장 확대로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단골 고객 관리로 돌파구를 찾는다.
서울 충무로1가 신세계 백화점의 딜러 매장 드로어써클.



갤러리아백화점 서울 압구정점 동관 지하 1층. 브레게·파텍필립·쇼메·반클리프 아펠·까르띠에 등 시계와 고급 주얼리 매장이 즐비하다. 그런데 한 매장의 이름이 ‘BIG BEN Watch(빅 벤 워치)’다. 바쉐론 콘스탄틴·IWC·로저드뷔·예거르쿨트르·크로노스위스 시계를 팔고 있다. 딜러 매장이다.

고급 수입 시계는 크게 세 가지 매장에서 살 수 있다. 각 브랜드에서 직접 운영하는 직매장, 면세점, 그리고 딜러 매장이다. 정식으로 시계 회사에서 구입해 소비자에게 파는 딜러 매장의 제품은 모두 정품이다.

해방 후부터 벽시계나 탁상시계와 함께 손목시계를 취급하던 ‘시계방’에서 수입 고급 시계를 조금씩 팔았다. 6·25 전쟁 이후부터 활동하던 시계 딜러 1세대는 보통 시계 수리 기술을 터득해 자신의 시계방부터 시작한 사람들이다. 롯데백화점 서울 잠실점과 김포공항점에서 까르띠에·보메 메르시에·IWC 등을 판매하는 월드시계 오성규 대표는 17살 때 고향인 전남 순천의 시계방에서 일을 시작했다.

심부름·청소를 하면서 그 가게에서 잠도 잤다. 어깨너머로 시계 수리를 배웠다. 밤에 혼자 가게에 남으면 잠을 안 자고 손님이 맡기고 간 시계를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해 보기를 반복했다. 오 대표는 “내 손으로 조립한 시계가 제대로 작동하니 신이 났다”고 했다. “6·25 전쟁 때 서울에서 순천으로 피난 와 알게 된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정전(停戰)이 되자 서울 가서 저한테 편지를 보냈더라고. 서울의 시계점포에서 일해보지 않겠냐고요.”

얼마 지나지않아 다른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서울 남대문 앞 점포였다. 당시 한국은행 앞에서 옛 미도파 백화점(현재 서울 명동 롯데 영플라자 자리) 앞까지는 시계와 금은보석을 파는 점포가 밀집해 있었다. 사장이 자리를 비웠을 때 대신 시계를 팔던 그에게 사장은 “고치지 말고 파는 걸 해보라”고 했다. 이후 여러 백화점의 시계 매장에서 판매사원으로 일하다가 33세에 자신의 시계매장을 냈다. 이후 지금까지 79세의 나이에도 시계를 판다.

빅 벤 워치 박영준 대표의 아버지 역시 시계 기술자로 시작해 시계 딜러가 됐다. “아버지 건강이 나빠져 제가 물려 받았죠. 그런데 얼마 안돼서 시계를 사 간 손님이 다시 찾아왔어요. 시계 태엽을 감아도 40시간이 못 돼 멈춘다고 했습니다. 시계 본사가 있던 스위스에 수리를 맡겼지만 여전히 작동하지 않았어요. 그걸 해결해준 사람이 아버지에요. 시계 태엽을 한 번 감아보더니 ‘태엽을 감는 부품이 짧아서 그렇다’며 쇳조각을 덧대주더라고요. 그 다음부터는 문제없이 작동했습니다.”

이 외에 이북 지역에서 시계판매를 하다가 6·25 전쟁 때 남쪽으로 피난 와 자리잡은 시계 판매상도 있다. 1970~1980년대에 고급 수입 시계 중 일부는 미군부대 PX에서 흘러나왔다. 미군들이 PX에서 산 시계를 시장에 내다 팔았다. 외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한 두 개씩 사와서 국내에 풀기도 했다. 어떤 판매상은 이 같은 유통 경로를 모른채 시계를 사서 팔기도 했다. 그러다 정부에서 ‘밀수품을 유통한다’며 가게에서 팔던 시계 대부분을 압수해 가는 일도 있었다.

밀수나 미군부대가 아니어도 시계를 구하는 방법이 있었다. 세관의 압수물품 공매를 통해서다. 오 대표는 “공매에 다니면서 시계를 전문적으로 사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과 친해서 수입 고급 시계를 많이 가져와 팔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1973년 서울 명동 옛 미도파백화점에 매장을 내면서부터 수입 고급 시계를 많이 취급했다. 당시 주로 공매에 나오던 브랜드는 롤렉스와 오데마피게 등이었다.

오 대표는 “당시에는 판매상에 시계 기술이 없으면 물건을 들여올 때부터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당시 정식으로 시계를 사서 파는 게 아니기 때문에 수리를 직접 해주는 것은 물론 물건을 들여올 때 제대로 된 시계인지 확인까지 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시계가 들어오니 부품이 있을리 만무했다. 크라운을 비롯해 간단한 부품은 시계 점포에서 직접 깎아 만들었다. 복잡한 부품을 전문적으로 만들어주는 곳도 있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오리엔트시계의 자회사가 오메가를 정식 수입해 팔기 시작했다. 시계의 정식 수입은 1990년대 중반부터다. 직접 브랜드를 수입해 딜러들에게 공급하는 곳이 생긴 때문이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까르띠에·IWC 등으로 대표되는 리치몬트 그룹을 필두로 여러 해외 시계 브랜드가 직접 한국 법인을 세우고 국내 유통을 맡기 시작했다.

서울 잠실 롯데백화점의 월드시계.



현재 많은 딜러 2세가 운영에 참여한다. 월드시계의 오 대표처럼 2세대 없이 1세대 혼자 매장을 꾸리는 일은 드물다.

서울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의 빅 벤 워치, 서울 충무로1가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그리니치시계, 서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본점의 우노와치 등은 2세대가 운영하거나 돕는다.

대구 현대백화점에 있는 오로와치.
시계업체에서 오랫동안 몸담다가 2004년 딜러로 변신한 노블워치의 김문환 대표, 타임포럼이라는 시계 커뮤니티를 운영하다가 2011년부터 시계를 판매하는 드로어써클의 김인식 대표는 예외적인 경우다.

딜러 매장과 직영 매장의 매출 비율은 공식적인 자료가 없다. 브랜드마다 매출 비율도 다르다. 업계에서는 대략 이렇게 추정한다. 직영 매장이 강세를 보이는 곳은 딜러 매장과 직영 매장의 매출 비율이 1대 4정도다.

최근 1~2년 사이에 직영 매장이 생기기 시작한 곳은 1대 1 정도다. 직영매장이 잘 갖춰지지 않은 브랜드는 딜러 매장에서 판매되는 비율이 더 높다.

딜러는 서울에만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다. 전국에도 약 20명 정도다. 보통 한 사람이 여러 개의 매장을 운영하기 때문이다. 국내 유통이 백화점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백화점에 매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드로어써클은 신세계백화점 서울 충무로 본점과 강남점에 이어 올해 부산 센텀시티점 등에 매장을 열었다. 노블워치는 서울 청담동에 로드숍과 목동 현대백화점 등에 매장이 있다. 빅 벤 워치는 서울 압구정 갤러리아 매장 등, 오로와치는 대구 현대백화점 매장과 서울 그랜드하얏트호텔 매장 등이 있다.

직영 매장의 출현은 딜러 매장을 위축시키는 요인 중 하나다. 까르띠에는 청담 부티크를 비롯해 직영점 체제를 굳혔다. 바쉐론 콘스탄틴·IWC·예거르쿨트르 등도 직영점을 내고 있다. 백화점에도 브랜드 직영 매장이 속속 들어오고 있다. 딜러 매장의 강점 중 하나는 할인 판매다. 하지만 일부 브랜드가 ‘노 디씨(No DC)’ 정책을 펴서 딜러 매장에서도 직영점과 같은 가격으로 팔 수 밖에 없는 일이 생긴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딜러들은 나름의 전략을 편다. 월드시계는 고객에게 무한 친절 서비스를 제공한다. 매장을 방문한 고객의 연락처를 받아뒀다가 나중에 백화점 사은행사 정보를 알려준다. 시계가 고가이기 때문에 ‘00원 이상 구입하면 00원어치 상품권 증정’ 등의 사은행사가 있을 때 시계를 사는 게 고객 입장에서는 유리하기 때문이다.

예물시계를 하러 온 손님이 ‘반지는 어디서 하지’ ‘양복은 어디서 맞추지’하고 고민하면 손님에게 매장을 소개해 준다. 오 대표는 “직원들에게 ‘우린 시계만 파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해도 알려줄 수 있어야한다”고 말했다.

빅벤 워치는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다. 바쉐론 콘스탄틴이 한국에 들어온 초창기, 바쉐론 콘스탄틴의 대표 컬렉션 중 하나인 ‘1972’를 국내에 소개한 것도 빅 벤 워치다. 비대칭 사각형 케이스의 특이한 모양 때문에 다른 딜러들은 선뜻 주문하지 않았다. 박 대표의 아버지는 과감히 주문했고 국내에 소개해 인기를 끌었다. 2001년 바쉐론 콘스탄틴이 서울 한남동 그랜드하얏트호텔에 부티크(단독 매장)를 낼 때 박 대표가 함께했다. 브랜드와 딜러의 합작 형태였다.

요즘 브랜드들이 직영으로 부티크를 운영하는 것과 다르다. 박 대표는 “문을 열기 전 아버지 뻘 되는 다른 딜러들이 한 가지 브랜드가, 그것도 호텔에서 팔리겠냐고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부티크를 냈다. 아시아 첫 번째 바쉐론 콘스탄틴 부티크였다. 2005년 서울 그랜드하얏트호텔에 부티크를 하나 더 냈다. 오로와치 임정호 대표와 만든 IWC 부티크다. 국내 첫 IWC 부티크다.

박 대표와 IWC 부티크를 함께 만든 임 대표는 ‘노 디씨’ 딜러로 유명하다. 몇 억원 대 시계를 팔면서 천원 단위까지 정확히 다 받아서 고객한테 “독한 사람”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그 고객은 임 대표의 단골 고객이 됐다. 임 대표는 “직영점에서 얻지 못하는 것을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시계 커뮤니티 등에서 열심히 활동한다. 일부러 시계 얘기는 잘 하지 않는다. 와인이나 영화 이야기 등 취미활동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다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사람들을 연결해준다. “임플란트를 해야 하는데 싸게 잘 하는 치과 없을까”라고 묻는 고객에게 자신이 신뢰하는 치과의사를 소개해주는 식이다. 임 대표의 도움을 받은 사람은 그에게 “깎아달라”는 말 없이 시계를 산다. 임 대표는 “단순히 싸게 파는 것은 경쟁력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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