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파워피플[32] - 청빈·겸손 실천하는 ‘빈자(貧者)의 교황’
글로벌 파워피플[32] - 청빈·겸손 실천하는 ‘빈자(貧者)의 교황’
2013년 3월13일부터 세계는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차원의 종교 지도자, 영적 스승, 삶의 멘토를 만나고 있다. 바로 교황 프란치스코(78)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 역동적인 교류, 그리고 청빈에 대한 솔선수범으로 전임 교황과 다른 아우라를 보여준다. 교황은 개혁적인 언행으로 전 세계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타임 선정 ‘올해의 인물’이 때문에 2013년 10월30일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는 그를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4위에 올려놨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 이은 순위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나 빌 게이츠 전 마이크로소프트 회장보다 높은 순위다. 교황으로선 이례적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강한 종교인일 뿐 아니라 가장 힘있는 인물의 한 명인 것이다. 게다가 그는 올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로 뽑혔다. 뿐만 아니라 동성애 권익 잡지로부터도 올해의 인물로 뽑힌 이색적인 기록을 세웠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013년 2월28일자로 사임함에 따라 바티칸에서 열린 콘클라베(교황 선출 행사)에서 선출된 신임 교황 프란치스코는 수많은 기록의 보유자다. 본명이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인 그는 가톨릭의 여러 수도회 가운데 예수회 소속의 첫 교황이다. 아르헨티나의 추기경이었던 그는 신대륙 출신 최초의 교황이기도 하다. 남반구 출신으로도 처음이다. 게다가 비유럽 출신이 교황에 오른 것은 1272년 전 그레고리 3세 교황 이후 처음이다.
이런 여러 가지 ‘최초’ 기록을 세우며 교황이 된 그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다 내놓은 성인인 프란치스코(‘사랑받기보다 사랑하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자신의 교황명으로 정했다. 청빈과 금욕의 성자 이름을 교황명으로 삼은 것도 처음이다. 이는 예사롭지 않은 변화의 시작일 뿐이었다. 즉위 뒤 말과 행동으로써 또 다른 ‘최초’를 계속 만들어갔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는 교황에 오른 뒤 우선 교황 관저부터 전임자들이 이용하던 널찍한 사도궁의 교황 아파트에서 비교적 좁고 간소한 인근 게스트하우스인 ‘마르타의 집’으로 옮겼다. 교황 선출을 뜻하는 콘클라베가 열릴 당시 전 세계에서 온 추기경들의 숙소로 사용된 곳이다. 그는 교황에 선출된 직후 이 게스트하우스에 와서 스스로 찜을 싸서 나와 프런트에서 숙박비를 계산하고 체크아웃을 했다. 비서도 수행원도 없었다.
교황의 복장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장식을 배제한 간소한 복장을 선호하는 것은 물론 교황의 상징으로 평생 끼고 다닐 ‘어부의 반지(초대 교황인 성베드로가 어부 출신이라서 역대 교황은 즉위 직후 어부의 반지를 만들어 평생 끼고 다닌다)’도 전통적인 금이 아닌 은을 택했다. 심지어 목에 걸고 다니는 커다란 십자가도 추기경 때부터 매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길 고집했다. 교황의 상징인 빨간 구두를 신지 않겠다고 선언해 뉴스가 되기도 했다.
고대 로마 제국 이후 빨간색을 옷과 신발에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황제와 황후, 교황 단 셋뿐이었다. 빨간 구두는 곧 교황 권력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를 사양하고 대신 고국 아르헨티나에 있는 단골 구두 수선공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신던 낡은 구두를 고쳐달라고 한 뒤 지금까지도 신고 다닌다. 2013년 화제가 된 교황의 빨간 구두 사건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같은 행동으로 교황청이 보다 간결하고 검소하면서도 격식에 얽매이지 않도록 이끌고 있다는 평가를 얻었다. 조용한 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미사에서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애정으로 감싸겠다”고 말했다. 즉위 뒤에는 이런 말로 대대적인 변화를 미리 예고했다. “가톨릭은 낙태, 피임, 동성애에 대한 비난에 몰두하느라 유연함과 자비, 그리고 동정이라는 사회의 거대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더 나아가 가난하고 곤궁에 빠진 사람을 돕는 기독교도의 의무를 강조했으며 관대함과 낙관주의에 입각한 가톨릭 신앙으로 종교 대화 촉진을 촉구했다.
“보잘것없는 이들 애정으로 감싸겠다”그는 올해 자신의 생일날 바티칸 인근에서 지내는 노숙자 4명을 초대해 함께 미사를 올리고 대화를 나눴다. 미사가 끝난 후에는 자신이 거주하는 게스트하우스 식당에 노숙자들과 호텔 직원을 초대해 함께 아침을 먹었다. 교황은 세족식에서 무슬림 여성의 발을 씻기고 입을 맞춰 종교 간 대화와 화합에 대한 강한 의지를 몸소 보여줬다.
동성애에 관용적으로 볼 수 있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동성애 잡지가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그를 표현하는 데 가장 많이 사용된 낱말은 겸손과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 그리고 종교와 사상을 포함해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과의 대화다.
그는 브라질을 순방하던 7월24일 아파레시다 대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며 “돈과 성공, 권력, 쾌락 같은 많은 우상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는 희망을 주는 듯 행세하고 있다”고 일침을 놨다.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라고도 질타했다.
그는 “나이 든 노숙자가 길거리에서 얼어 죽는 건 뉴스가 되지 않고, 주가가 2포인트 하락한 건 뉴스라는 게 말이 되는가”라는 말로 공감을 얻기도 했다. “정의의 성장은 경제 성장보다 어렵다. 바람직한 소득 분배, 고용 창출 등을 위해 단호한 의사 결정이 필요하다”는 발언도 큰 반향을 불렀다.
일부에서 그를 두고 ‘완벽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비판하자 “마르크스주의 정치 철학은 잘못됐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아는 마르크스주의자 중 좋은 사람이 많다. 그래서 날 그렇게 불러도 별로 상처받거나 모욕당했다고 느끼지 않는다”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그는 남미에서 해방신학이 판을 칠 때도 정치 활동이나 발언은 삼가고 오로지 신앙 활동에만 매진했다. 교황의 이런 파격적인 행동은 퍼포먼스가 아니었다. 그의 말과 행동에는 일관된 메시지가 담겨있다. 바로 위에서 군림하지 않고 곁에서 신자는 물론 모든 인류를 끌어안는 교황, 그런 교회가 돼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는 바티칸에서 벌이고 있는 대대적인 개혁 조치에서도 드러난다. 교회 개혁의 핵심이 군림하지 않고 끌어안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교황은 즉위한 지 5개월이 지난 8월 교황청의 핵심 보직인 국무원장 교체를 시작으로 바티칸을 이런 방향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교황 보좌와 교황청 각 부서의 조정·총괄과 외교업무를 담당한 타르치시오 베르네토(78) 전 국무원장은 상당한 권력을 가진 2인자로서 바티칸을 장악하고 있다는 비판을 들었다.
새 교황은 젊은 피에트로 파롤린(58) 대주교를 그 자리에 앉혔다. 영국 BBC방송은 “권력 욕심 없이 본연의 임무만을 수행할 전문가들을 발탁해 교황청 일을 맡긴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 뒤 관저 개축에 수백 억원을 쓴 독일 대주교에게 무기한 정직 처분을 내리는 등 교회를 새롭게 만드는 일에 매진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이탈리아에서 가톨릭 신자가 10만명이나 늘었다는 보도도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힘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958년 22살의 나이로 예수회에 입회해 1969년이 되어서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상당히 긴 세월 동안 예수회 회원으로서 양성받은 셈이다. 이는 예수회원이 사제가 되기까지 걸리는 데 소요되는 기간으로는 평균 정도라고 한다. 따라서 프란시스코 교황은 오랜 양성기간 동안 다양한 사목 체험으로 숙련됐다. 양성을 받는 예수회원은 가난한 사람들과 일하고, 병원에서 환자들을 보살피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 등을 하도록 돼 있다.
그러는 동안에도 줄곧 변기를 닦거나 마루에 걸레질을 하는 등 예수회 창시자인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성인이 “비천하고 시시한 일”이라고 부른 일을 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예수회 배경과 예수회 영성이 그의 현재 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교황은 20대 이후 대부분의 생애를 예수회원으로 보냈을 뿐 아니라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의 관구장을 지내기도 했다. 예수회를 세운 이냐시오 성인은 “예수회원들은 청빈을 어머니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수회원들은 지상에서 가난하게 사셨던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능한 한 간소하게 살아가도록 요구 받는다.
교황의 공감 부르는 말과 행동아울러 예수회원들은 어디든 갈 수 있는 유용성과 개방성, 그리고 내적인 자유를 갖추도록 요청 받는다. 예수회원의 이상은 하느님이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어떤 곳에서 어떤 사람과도 잘 지낼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의미다. 한때 아시아를 포함한 전 세계에 다니며 포교 활동을 한 예수회의 힘의 원천 중 하나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동을 파악하는 기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의 집안과 인생 경험이다. 그는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이다. 그의 부친은 이탈리아에서 배를 타고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뒤 넉 달 만에 아르헨티나에 도착해 철도 노동자로 일했다. 그는 아버지가 원래 타려다 간발의 차로 놓친 배가 아르헨티나에 도착하기 전 침몰해 배에 탔던 사람이 모두 숨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교황이 유럽의 반이민 정서를 강하게 비판하고 시리아 난민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은 이 같은 그의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교황은 이탈리아로 몰래 상륙하려던 불법 이민선이 해안에서 침몰해 수많은 사람이 사망하자 개탄하기도 했다. 이에 이탈리아 정부는 사고 해결과 보상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교황의 적극적인 말과 행동이 벌써 세상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제가 되기 전에 많은 인생 경험을 했다. 가톨릭 살레시오 수도회(고 이태석 신부가 속했던 가톨릭 수도회로 청소년 교육과 선도에 힘쓴 돈 보스코 성인이 세웠다)가 설립한 실업고교에 다닌 그는 화학을 전공해 화학기사가 됐다. 화학기사로 잠시 일한 뒤에는 청소부, 문학 교사 등 다양한 직업을 거치면서 서민의 삶을 살았다. 심지어 술집 경비원도 지냈다고 스스로 밝혔다.
사제가 된 뒤에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도시 빈민가에서 주로 사목활동을 했다. 그는 에이즈 감염자들에게 직접 입을 맞췄으며 미혼모의 자녀라고 세례를 주지 않는 동료 사제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처럼 교황이 지금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지신이 오랫동안 직접 경험해 본질을 파악하고 있는 일에 대해 오랫동안 쌓은 예수회 영성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과 행동이 공감과 설득력을 불러일으키며 전 세계에 거쳐 엄청난 영향력을 얻는 이유일 것이다. 그의 말과 행동은 책이나 주변의 충고에 따른 게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영성 체험에서 우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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