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크 걸린 전미자동차노조 - “침몰하는 타이타닉호 만들 일 없다”
브레이크 걸린 전미자동차노조 - “침몰하는 타이타닉호 만들 일 없다”

미 북부의 디트로이트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전미자동차노조(UAW)가 활로 개척을 위해 야심 차게 추진한 남부 진출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최근 폴크스바겐 근로자들이 자체 투표를 통해 노조결성안을 부결한 데 이어 ‘바이블벨트’로 불릴 정도로 보수적인 남부에서 반(反)노조 정서가 확대되자 UAW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남부 테네시주의 채터누가에 있는 독일 자동차회사 폴크스바겐 공장 근로자들은 2월 12일부터 사흘 간 투표를 했다. 전체 근로자 1550여명 가운데 89%가 참여한 결과 712대 626으로 UAW 지부 형태의 노조를 설립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폴크스바겐에 세우는 노조교두보로 삼아 남부 지역에 노조 지부를 설립하려던 UAW의 시도가 엔진 시동을 걸자마자 꺼진 셈이다.
애초 자동차 업계에서는 폴크스바겐 공장 근로자 투표에서 UAW 지부 설립안이 통과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채터누가 공장의 전체 근로자의 절반이 넘는 인원이 UAW 지지 서명운동 동참했기 때문이다. 노조 설립을 두고 근로자 투표를 하는 것은 미국의 독특한 노동법 때문이다.
연방노동법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근로자들이 상위 노조가입을 통해 노조를 설립하려해도 동료 근로자의 과 수가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노조 가입이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근로자 투표를 실시했는데 UAW는 폴크스바겐 노조 설립을 기정사실화했다. 다음 노조 설립 대상을 앨라배마에 있는 메르세데스-벤츠 공장이라고 일찌감치 공언할 정도로 투표결과에 자신만했다.
독일 기업인 폴크스바겐도 노조 설립에 우호적이었다. 17개 나라에 자동차 생산공장을 운영하는 이 회사는 미국에서는 테네시주 채터누가에만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폴크스바겐은 이번 표결과 관련해 중립을 지키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폴크스바겐 근로자 712대 626으로 반대하지만 결과는 예상과는 달리 UAW의 뼈아픈 패배였다. 2월 14일 오후 채터누가 공장의 프랭크 피셔 최고경영자가 노조 결성안의 부결 결과를 발표하자 현장에 있던 UAW 관계자들은 고개를 숙인 반면 노조 가입 반대운동을 벌인 근로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노조 반대 캠페인에 나섰던 근로자인 션 모스는 “노조없이 폴크스바겐에서 일하며 임금과 복지혜택, 보너스 등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며 “노조를 만들어 회사를 침몰하는 타이타닉호로 만들 필요가 있겠냐”고 말했다.
또 다른 노조 반대 근로자인 마이크 버튼은 “UAW는 우리가 아니라 조직운영자금으로 사용할 조합비를 원한다”며 “우리 일자리가 디트로이트 꼴이 나면 안 된다고 동료들을 설득했다”고 밝혔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 같은 투표 결과와 관련 “남부의 외국계 자동차업체로 세력을 넓히려던 UAW의 계획이 좌절됐다”며 “UAW의 역사적 패배”라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폴크스바겐 노조 설립 무산이 고비용의 노동 계약과 복잡한 취업 규칙, UAW의 민주당 편향 정치색깔 등에 근로자들이 염증을 느낀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기독교인이 많은 ‘바이블벨트’인 남부의 뿌리깊은 반노조 정서가 큰 역할을 했다. 2000년대 들어 회사와 강경대치를 일삼았던 북부의 노조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남부의 보수적 근로자들의 마음을 UAW가 사로잡지 못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UAW는 투표에서 패배한 뒤 공화당과 보수단체들이 노조를 미국 자동차 산업을 상징하는 ‘디트로이트의 몰락’의 원인으로 지목하며 노조 가입을 방해했다고 볼멘소리를 냈다. 공화당 소속인 밥 콜커 상원의원은 폴크스바겐 투표 기간에 “채터누가 공장 근로자들이 노조 가입을 거부하면 폴크스바겐이 그에 대한 보답으로 이곳에 신차 생산을 맡길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고 밝혀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밖에 빌 해슬램 테네시 주지사 등 보수 정치인들은 산업 경쟁력 약화를 이유로 노조 설립 반대를 도왔다고 UAW는 주장했다.
UAW는 폴크스바겐 지부 설립 실패로 큰 충격에 빠졌다. 2011년부터 남부 진출에 공을 들여왔던 UAW로서는 노조 설립 전략을 원점에서 다시 짜야 할 형편이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샌타바버라주립대의 넬슨 리첸스테인 노동전문가는 “더 이상 (테네시에서) 노조가 얻을 게 없다”며 “엄밀히 말하자면 가장 중립적인 지역에서 노조가 완패했다”고 평가했다.
조지아주립대의 노동학 명예교수인 필 라포테는 “폴크스바겐 공장의 선거 결과는 UAW로부터 남부에 세력을 확대하려는 모멘텀을 빼앗았다”고 진단했다. 월스트리트저널도 “UAW가 회사 측의 협조를 받은 폴크스바겐에서도 승리하지 못하면 미국 어디에서도 이길 수 없다”고 평가했다.
UAW는 미국에 공장이 있지만 노조 설립을 반대하는 외국계 자동차 회사를 상대로 3년 전부터 대대적인 반대 캠페인을 벌여 왔다. 도요타와 닛산 등 일본 회사와 벤츠 등 독일 회사는 물론, 현대·기아차 공장도 이 같은 캠페인의 대상이었다. 2001년 테네시주에 위치한 닛산 공장에서 노조 설립 여부를 묻는 투표를 열었지만 노조 설립 때 공장 폐쇄를 경고한 회사 측의 위협에 부결된 적이 있다.
이후 남부 지역에서 제대로 된 노조 설립 움직임이 없자 UAW는 3~4년 간 노조 설립 여건을 조성하는 전략을 세운 뒤 친노조 성향이 있는 업체인 폴크스바겐을 공략했다. UAW는 밥 킹 노조위원장이 직접 지휘하며 이번 투표를 준비했다. 킹 노조위원장은 “UAW가 생존하려면 미국에 진출한 아시아·유럽계 자동차 회사 생산공장 근로자를 노조에 가입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그는 노조위원장 임기가 끝나는 6월 이전에 노조 설립 캠페인에서 가시적 성과를 보이겠다는 의욕을 보였다.
UAW는 자동차 회사 측이 근로자들을 동원해 반노조 모임을 개최하지 못하게 하고 노조 설립 지지자들을 해고하지 못하게 압력을 가했다. 또한 전미노사관계법 절차보다는 미국중재협회(AAA)와 같은 제3자의 감시를 받는 투표를 각 자동차 공장들이 받아들이도록 유도하고 있다. 회사 측이 이 같은 방안을 수용하지 않으면 특정 회사의 공장을 지목해 시민·소비자 단체와 협력해 해당 회사의 브랜드 이미지를 공격하는 강경책도 마련했다. 또한 외국계 기업의 본토에 있는 노조와도 연대를 확대해 왔다.
UAW는 민권·인권지도자협의회와 연대해 현대자동차 대리점 앞에서 가두 시위를 벌이며 현대자동차 미주법인을 압박한 적도 있다. 기아차의 생산직 근로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기아노조(Union for Kia)’라는 웹사이트를 만들어 청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모두 UAW와 연계된 것으로 자동차 업계는 보고 있다.
외국계 자동차 공장을 상대로 UAW가 노조 설립 캠페인을 전개하는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GM과 포드, 크라이슬러 등 미국의 ‘빅3’가 침체되면서 북부 지역의 노조운동이 한 풀 꺾인 때문이다. 노조가 없는 남부의 공장으로 일자리가 몰리자 UAW 내부에서도 이들 지역에 대한 공략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미국에 진출해 ‘빅3’의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 아시아와 유럽 회사들의 공장에 지부를 세우며 노조원을 확보하지 않으면 노조운동 자체가 위태로워진다는 위기감도 팽배했다.
근로자 신뢰 갈수록 잃어미국 최대 규모의 노조인 UAW는 전성기였던 1979년대에는 최대 150만명 정도의 노조원을 둘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당시 이들 노조원이 일했던 북부 지역의 미국 자동차 회사들도 전성기였다. 1979년 베스트셀러 모델 10종 중 9종은 미국산 자동차였다. 하지만 2008년 이후 디트로이트가 몰락하면서 자동차 업계의 중심이 북부에서 외국계 회사들이 공장을 세운 남부로 이동했다.
반노조 성향이 강한 남부에서는 노조 설립이 거의 불가능했다. 외국계 회사들은 이 같은 장점 때문에 남부에 공장을 세웠다. UAW는 ‘빅3’의 위기와 함께 노조원 탈퇴 러시로 어려움을 겪었다. UAW는 최근 노조원 수가 40만명 규모로 감소하며 세력이 크게 약화됐다.
UAW는 투표 결과와 관련해 “공화당 등 정치권의 외압이 있었다”며 반발하고 있다. 또한 성명을 통해 “불행하게도 정치적 의도를 가진 제3자가 테네시에서 일자리를 증대시킬 수 있는 모델을 만들 수 있는 기회와 공장의 장래를 위협했다”고 투표 패배 원인을 외부로 돌렸다.
UAW는 투표를 감독한 전미노동위원회에 투표 결과 이의를 접수하며 재투표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노조에 신뢰감을 잃고 등을 돌린 근로자들의 마음을 돌리기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했다. 노동운동의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한 근로자들에게 신뢰할 만한 해답을 내놓지 않는 이상 노조 운동은 더욱 위축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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