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혁명의 현장-뜨는 역(逆)경매시장
가격혁명의 현장-뜨는 역(逆)경매시장
오랜만에 동창 모임을 하기로 했는데 장소가 영 마뜩잖다. 마음에 드는 곳은 가격이 너무 비싸고, 그렇다고 잘 모르는 곳에 가려니 맛이 걱정이다. 직장인 김두섭(40) 씨는 지인의 소개로 애플리케이션(이하 앱) ‘돌직구’를 내려 받았다. 앱을 실행한 뒤 ‘광화문, 2014년 3월 15일, 20명, 40만원, 삼겹살류’라고 적어 등록했다.
김씨가 올려놓은 글을 본 음식점 주인들은 각자 파격적인 혜택을 약속하며 입찰을 시작했다. 한 가게는 맥주 무제한 서비스를, 다른 가게는 후식 냉면을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했다. 입찰에 참여한 가게만 32곳. 조건을 따지던 김씨는 20% 할인을 해주기로 한 가게를 낙찰한 뒤 동창들에게 공지를 돌렸다.
‘역경매(逆競賣)’는 기존 경매와 정반대 개념이다. 제품이나 서비스를 원하는 사람이 구매 의사를 표시하면 판매자들이 경쟁적으로 낮은 가격이나 나은 조건을 제시해 거래가 이뤄진다. 대표적 역경매 장터인 ‘돌직구’는 최근 직장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앱이다. 방문자가 날짜와 시간, 방문 인원, 예상 가격, 요리의 종류 등을 적어 경매를 시작하면 가게 주인들이 경매에 참여한다. 일일이 쿠폰을 찾는 수고 없이도 할인이나 추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웨딩 역경매는 비성수기 파격 할인지난해 5월 출시된 돌직구는 누적 다운로드 50만 건을 넘기고 순항 중이다. 가맹점도 8000개로 늘어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돌직구를 운영하는 안병익 씨온 대표는 “빈 테이블이 걱정인 식당 주인과 회식 장소를 고민하는 직장인이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며 “역경매는 고객과 점주의 원활한 소통을 돕고, 스마트한 소비 문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안 대표는 또 “앞으로 여행·숙박·렌터카 등 분야를 다각화할 계획”이라며 “예약뿐 아니라 결제까지 한 곳에서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발 중”이라고 말했다.
인터넷을 통한 역경매가 국내에 도입된 건 2000년대 중반이다. 거래가 가장 활발한 곳은 이사와 웨딩 업계다. 4월 중순 이사를 앞둔 기자가 직접 이사 역경매를 이용해 가격 협상을 시도해봤다.
우선 이사 역경매 사이트에 견적서를 등록했다. 출발지와 도착지, 이사일자, 이삿짐 량, 가족 수 등을 입력했더니 총 10개의 업체가 입찰에 참여했다. 가격은 65만원에서 78만원까지로 다양했다.
이 중 최저가를 제시한 3곳에 문자를 보냈더니 자세한 견적서를 보내왔다. 해당 업체 관계자는 “방문 견적을 통해 이삿짐이 많지 않은 경우 가격을 더 낮춰줄 수 있다”면서 “마지막 정리 정돈은 물론 스팀 소독 서비스까지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서비스 품질은 이사 후에야 알게 되겠지만 일단 가격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웨딩 역경매 역시 결혼을 앞둔 소비자가 결혼 시기와 지역, 예산 등 조건을 사이트에 입력하면 예식장 측이 예약 상황 등을 고려해 견적을 제시한다. 이른바 ‘스드메(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나 신혼여행도 입찰을 통해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별도의 중개 수수료가 없는 것도 장점이다.
웨딩 역경매 사이트 아이티 웨딩 관계자는 “예식장 입장에서는 비워두는 것보다 저렴한 가격에라도 결혼식을 유치하는 것이 좋기 때문에 비성수기에는 파격적인 할인 혜택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며 “예식장 측이 제공하는 스드메 등과 패키지로 묶으면 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복잡한 중고차 거래를 간편하게 처리할 수 있는 역경매 사이트도 등장했다. 중고차를 살 때 차종과 지역, 희망가격 등을 적어 내면 각 지역 중고차 딜러들이 조건에 맞는 차량을 제시한다. 얼마 전 역경매를 통해 중고차를 샀다는 이정태(28) 씨는 “오프라인 매장에서 제시한 가격보다 70만원 정도 싸게 구입한 것 같다”며 “여러 사이트를 돌며 일일이 검색해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어 여러모로 편한 것 같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역경매 사이트 ‘차넷’에서는 하루 평균 약 300건의 역경매가 이뤄진다. 물론 실제 거래로 연결되는 건 이보다 적겠지만 내 차의 정확한 시세를 알아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활용도가 크다.
명품 역경매 사이트도 등장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리버스딜’은 시작가에서 경매 참여자가 늘수록 가격이 올라가는 기존 경매방식이 달리 낙찰될 때까지 가격이 계속 떨어진다. 샤넬이나 프라다 등 유명 브랜드의 가방·지갑 등을 판매하는데 낮 12시를 기준으로 매일 1~5%씩 할인된다. 최대 99%까지 가격 할인이 가능한데 이론적으로는 수백 만원짜리 가방이 불과 몇 만원에 팔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일은 없다. 괜히 더 저렴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다른 구매자가 먼저 사 버리면 아예 살 기회를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300만원짜리 가방이 250만원만 되도 충분히 싸다고 느끼는 사람은 구입을 한다. 이런 소비자의 심리를 이용한 마케팅 방법인데 단 몇 만원이라도 싸게 구입할 수 있으니 사는 사람으로서는 손해 볼 게 없다.
조성진 리버스딜 대표는 “처음 시작했을 땐 220만원짜리 가방의 가격이 80만원으로 내려가기도 했지만 회원이 늘고 경쟁자가 많아지면서 같은 가방이 최근엔 180만원 선에서 팔리고 있다”며 “워낙 저렴해 위조품이 아니냐고 의심하는 분들이 있는데 가품일 경우 구입금액의 2배를 보상해주는 제도를 적용하고 있으니 안심해도 된다”고 말했다. 초기 마케팅 차원에서 도입한 이벤트성 판매 방식이었지만 호응이 커지면서 리버스딜의 페이스북 회원수는 최근 8만명을 넘어섰다.
역경매 대출도 활용할 만하다. 금융감독원의 ‘이지론’, 신용보증기금의 ‘온라인대출장터’, 여신금융협회의 ‘대출직거래장터’ 등이 운영 중이다. 대출신청정보를 입력하면 금융사가 대출 가능 금액과 금리를 제시하고, 그중 최적의 조건을 제시한 곳에서 대출을 받는 시스템이다. 인터넷을 통해 간편하게 신청할 수 있고, 낮은 금리를 제공하는 금융사를 선택해 금리인하 효과를 볼 수 있다. 여러 장점에도 아직 거래는 활발하지 않다.
2011년 8월부터 2013년 6월 사이 대출직거래장터에 대출을 신청한 사람은 1717명이었는데 이 중 실제 대출자 수는 6.9%(118명)에 불과했다. 여신금융협회 관계자는 “실효성은 분명하지만 인지도가 낮은 게 문제”라면서 “좋은 제도인 만큼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홍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소비자가 가격 결정권을 쥐고 있다는 점에서 역경매는 장점이 뚜렷하다. 하지만 유의점도 있다. 우선 부가가치세가 포함돼 있는지, 추가비용이 없는지 따져야 한다. 이사 역경매 서비스의 경우 입찰가에 사다리차 대여비 등이 포함되지 않은 경우가 있어 나중에 20만원 정도를 추가로 냈다는 후기가 올라오기도 한다.
업체에 대한 평가나 후기를 꼼꼼히 챙겨보는 게 좋다. 가격 비교도 필수다. ‘역경매는 무조건 저렴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업체 간 보이지 않는 담합의 가능성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일반 사이트 가격이나 오프라인 시세 등과 비교해 본 뒤 구입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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