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IGHT TO FREEDOM - 중국판 ‘쉰들러 리스트’
FLIGHT TO FREEDOM - 중국판 ‘쉰들러 리스트’
밥 푸 목사는 도피 생활의 끔찍함을 너무도 잘 안다. 1996년 베이징에서 살 때 푸와 그의 아내는 지하 개신교 ‘가정교회’ 운동에 참여했다가 두 달 동안 철창신세를 졌다.
친구들은 그에게 곧 다시 체포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푸 부부는 시골로 몸을 피했다가 방콕을 거쳐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으로 탈출했다. 푸의 아내가 홍콩의 한 병원에서 출산한 뒤 친구들과 낯선 사람들이 나서서 그들의 미국 망명을 도왔다. 그들은 1997년 6월 마침내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텍사스주 미들랜드에서 자리를 잡은 푸는 이렇게 돌이켰다. “그때의 경험으로 구출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절박한 느낌이 어떤 건지 확실히 알게 됐다.”
그 경험을 계기로 푸는 현재 비영리단체 차이나에이드(ChinaAid)를 운영한다. 중국의 자원자 수천 명과 함께 불의를 당한 피해자를 돕는 단체다. 2012년 시각장애인 변호사이자 인권운동가인 천광청이 가택연금 중 탈출한 뒤 베이징의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했을 때 푸는 워싱턴 DC의 지인과 언론을 집요하게 설득해 천이 미국 학생비자를 발급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차이나에이드는 박해 받는 중국인들이 비밀조직을 통해 탈출할 수 있도록 돕는 구출임무도 시작했다.
푸는 “하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지하탈출은 1989년 6월 4일 톈안먼 광장 학살 직후 ‘꾀꼬리(黃雀) 작전(Operation Yellowbird)’이 원조다. 그 조직을 통해 중국을 탈출한 사람들이 차이나에이드에 방법을 알려줬다. 따라서 차이나에이드의 구출임무는 ‘꾀꼬리 작전 2.0’인 셈이다.
푸와 그의 아내는 지난해가 돼서야 미국으로 망명할 때 홍콩의 ‘꾀꼬리(Yellowbird)’ 조직으로부터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중국을 탈출한 지 거의 18년이 흐른 뒤였다. 그 조직은 톈안먼 학살의 충격으로 행동에 나선 동조자들의 지하 네트워크였다.
원조 ‘꾀꼬리’는 중국에서 반체제인사들을 은밀히 탈출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폭력조직은 그들을 밀항시키는 보트를 대줬다. 칸토팝(Cantopop, 광둥어 팝 음악) 스타들은 공연 수입금을 기부했다. 홍콩 경찰은 중국을 탈출한 사람들의 변장을 도왔다. CIA도 그런 사람들에게 도청 방지 휴대전화와 야간투시경 등을 제공했다고 알려졌다.
‘꾀꼬리’는 1997년까지 중국 정부의 ‘1급 지명수배자’ 명단에 오른 톈안먼 시위 주역 21명 중 15명을 포함해 중국인 민주운동가 500명 이상의 해외 탈출을 기획했다. 중국 당국이 톈안먼 시위 주모자라며 ‘검은 손’으로 불렀던 왕쥔타오(현재 미국 뉴저지주에서 산다)는 이렇게 돌이켰다. “사실 나는 중국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꾀꼬리’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홍콩에 있는 그 지하조직의 도움과 세계적인 관심, 그리고 탈출 계획이 없었다면 중국의 민주화운동은 거의 명이 끊어졌을 것이다.”
톈안먼 유혈사태 후 25년이 지난 지금 ‘꾀꼬리’의 유산은 아직도 암울하기만 한 중국의 정치 상황에서 한줄기 밝은 빛을 비춘다. 나는 1996년 뉴스위크 베이징 특파원으로서 ‘꾀꼬리’에 관해 처음 기사를 썼다. 그때 그 조직 지도부는 세부 사항을 전부 밝히면 진행 중인 임무가 위태롭게 된다고 경고했다. 밥 푸도 “당시엔 ‘꾀꼬리’ 덕분에 중국을 탈출할 수 있었다고 아무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제야 ‘꾀꼬리’의 몇몇 조직원들이 스파이 소설 같은 기상천외한 탈출 비화를 공개하고 있다.
그러나 ‘꾀꼬리’의 대담한 행동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의 차원을 뛰어 넘는다. 그 조직은 1989년 이후 수 년 동안 활동했으며, 그들의 가장 강력한 유산은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어 밥 푸의 차이나에이드 같은 후속 네트워크의 태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 네트워크는 안전한 피난처를 운영하며 도피중인 여러 중국인 운동가들의 안전한 탈출을 돕는다.
중국의 운동가들을 망명의 길로 내모는 압력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중국 당국은 저장성의 개신교 교회 64곳의 십자가를 강제 철거할 계획이라고 푸가 말했다. 지난 5월 당국은 무슬림 주민이 다수로 민족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유혈 폭력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초강력’ 테러퇴치 작전을 개시했다. 최근엔 신장위구르 자치구 북서부 도시 이리의 한 스타디움에서 주민 7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테러 용의자 55명의 선고공판대회가 열렸다. 문화대혁명 시절의 인민재판을 연상시키는 장면이었다.
중국 정부의 알레르기 반응1989년 6월 4일 벌어진 톈안먼 학살은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그룹들을 단합시켰다. 인권운동가들, 종교인들, 외국 외교관들, 그리고 홍콩의 악명 높은 조직폭력단 삼합회가 한데 뭉쳤다. 홍콩의 출판업자 바오푸는 “모두가, 심지어 마피아까지 나서서 ‘꾀꼬리’를 도왔다는 사실은 톈안먼 시위 진압이 얼마나 비인도적이고 끔찍했는지 잘 말해준다”고 말했다. “생계 수단으로 무슨 일을 하든 거의 모든 사람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안다.” 그의 부친 바오퉁은 자오쯔양 전 중공 총서기의 비서로 톈안먼 시위의 강경 진압에 반대하다가 진압작전이 시작되면서 가장 먼저 체포됐다.
그러나 전부가 그런 건 아니다. 당국은 톈안먼 사태 25주기에 대비해 6월 4일에 관한 모든 공개적인 언급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어느 때보다 더 심한 단속을 벌였다. 톈안먼 사태의 충격은 중국 전체를 사로잡았다. 그 사태로 중국 공산당은 거의 분열될 뻔했고, 시위에 참가한 시민 1000명 이상이 학살됐다. 지금도 당국은 톈안먼 광장에 관한 모든 문제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거의 알레르기 수준이다. 지난 5월 베이징에 놀러 간 한 젊은이는 톈안먼 광장에서 손가락으로 승리를 의미하는 V자를 만들며 셀카를 찍었다가 현장에서 체포됐다.
매년 톈안먼 기념일이 다가오면 당국은 신경을 곤두세운다. 보통은 4월 중순부터 단속이 시작되지만 올해는 특히 일찍부터 강도 높은 단속이 펼쳐졌다. 에이즈 인권운동가 후자는 지난 2월 가택연금을 당했다. 바오퉁은 지금도 베이징에서 ‘가벼운’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 지난 1월 그는 톈안먼에 관해 언론에 이야기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중국 공안은 운동가들과 학자들, 독자적인 기자 1명과 일본 신문의 중국인 취재 보조원, 예술가 1명과 저명한 변호사 1명, 동성애자 권익운동가들, 그리고 참선 중인 불교 신자들을 체포했다. 이처럼 요즘 중국 정부의 빅브러더식 슬로건은 ‘안정 유지’다.
톈안먼 학살로 동료들을 잃은 옛 시위의 주역 중 다수가 자신은 ‘꾀꼬리’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 ‘꾀꼬리’는 당랑규선(螳螂窺蟬)이란 중국 고사 성어에서 유래됐다. 사마귀가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엿본다는 뜻이다. 나뭇가지에서 매미가 울고 있는데 그 뒤에 사마귀가 매미를 잡아먹으려 노리고 있다. 그때 꾀꼬리가 날아와 사마귀를 노리는데 사마귀는 그런 사실을 모른다.
눈앞의 이익만 좇다가 더 큰 것을 놓치기 쉽다는 교훈을 상기시키는 것이 바로 ‘꾀꼬리’다. 그들은 가장 먼저 시위 주역인 학생 3명을 탈출시켰다. 그중 한 명이 리루다. 그는 나중에 미국 컬럼비아대를 다녔고, 현재 펀드 매니저로 워런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의 중국 투자 자문역으로 일하고 있다.
‘꾀꼬리’의 조직원 중 한 명은 1996년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공작원들을 리루에게 보냈다. 그를 차에 태우고 정복을 입은 공안요원을 옆에 앉혔다. 리루는 자신이 체포된 줄 알았다. 하지만 난 그게 그를 탈출시킬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검문을 당하면 그 공안요원이 자신이 체포했다고 말하기로 돼 있었다. 실제로 그는 우리에게 협조하는 공안요원이었다.”
숱한 비화 중에서도 학생시위 지도자 우얼카이시의 탈출이 가장 극적이었다. 친구 7명이 그를 베이징에서 광둥성 남부 해안으로 몰래 빼돌렸다. 그는 숨 막히는 자동차 트렁크 속에 들어가 숨기도 했다.
1989년 5월 학생 대표단과 강경파 리펑 총리가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만났다. 그 장면이 TV로 방영됐다. 당시 단식 투쟁 중이던 우얼카이시는 환자복 차림으로 산소 주머니를 움켜쥔 채 등장했다. 그는 대화의 자리를 늦게 마련했다며 리펑 총리를 면전에서 비난했다. 당연히 그 대화는 언쟁만 벌이다가 성과 없이 끝났다. 리펑은 ‘잘 가시오’라며 퉁명스럽게 대화를 끝냈다.
인민대회당에서 우얼카이시의 태평한 모습과 톈안먼 광장에서 그의 열정적인 연설은 길이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는 6월 4일 톈안먼 광장에서 진압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후 중국 당국의 ‘1급 지명수배자’ 명단에 두 번째로 올랐다.
광둥성 주민 대다수는 홍콩 TV를 보기 때문에 우얼카이시를 쉽게 알아봤다. 따라서 그는 공개적으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없었다. 한 외국인 동조자가 ‘도움 바람’이라고 손으로 크게 쓴 그날 신문을 들고 있는 우얼카이시의 사진을 들고 홍콩으로 건너갔다. 홍콩의 경찰 제토와가 그 사진을 봤다. 그는 톈안먼 도망자들의 탈출을 돕는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꾀꼬리’의 작전이 시작됐다.
한 조직폭력단 두목이 그 작전에 자금을 댔다. 첫 두 번의 구출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세 번째 시도에서 우얼카이시는 멀리 한적한 해변에서 비치는 적외선을 얼핏 봤다. 그와 당시 여자 친구는 날카로운 굴 껍질이 박혀 있는 해변을 가로질러 뛰어가 모터보트에 올라탔다. 그 보트는 지치고 피범벅이 된 그들을 홍콩으로 재빨리 데려 갔다. 프랑스 외교관 장-피에르 몽타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들의 여권과 비행기 표, 비자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곧바로 파리로 날아갔다.
최근 우얼카이시(지금 그에게는 25년 전 그의 나이인 21세의 아들이 있다)는 자신의 탈출에 비용이 엄청나게 들었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 모터보트에만 약 10만 달러가 들었다. ‘6형’으로 불리는 조직폭력단의 보스가 그 돈을 댔다고 들었다. 2004년 홍콩을 다시 찾았을 때 그에게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다고 감사를 표했다.”
‘6형’은 홍콩의 또 다른 특이한 인물이다. 지하세계의 거물에 모터보트 킹이자 자동차 밀수업자다. 그는 톈안먼 학살을 TV로 보고 기절할 뻔했다. 곧 그는 카오룽의 한 호텔에서 홍콩의 부유한 기업가 두 명을 만나 계획을 짰다.
마피아의 협조‘6형’과 그의 팀은 구출 작전에서 수송과 물자조달을 맡았다. 그들은 톈안먼 시위 관련 인사 100명 이상의 탈출을 지원했다. 유명한 인물일수록 망명을 주선하기가 쉬웠지만 그런 만큼 비용은 더 들었다. “홍콩에선 모든 것이 공급과 수요의 원칙을 따른다”고 한 내부자가 빙그레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당국은 ‘꾀꼬리’가 반체제인사들을 돕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조직원들을 체포하기 위한 함정수사를 시작했다. 학자이자 인권운동가인 왕쥔타오에게 한 친구가 ‘꾀꼬리’가 탈출을 도와줄 수 있다고 말했다. 왕은 중국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내 친구는 ‘창사(후난성 성도)에서 만남이 주선돼 있으니 가보고 탈출 여부를 결정하라’고 했다”고 왕은 돌이켰다. “하지만 나는 11월 20일 창사 기차역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됐다.”
중국 공안의 함정수사였다. 왕과 동료 천지밍은 각각 13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6형’의 조직원 두 명도 구속됐다. ‘6형’은 나중에 본토 당국과 협상을 통해 앞으로는 반체제인사들의 탈출을 돕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부하들을 석방시켰다. 왕과 천은 1994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홍콩을 기반으로 하는 ‘꾀꼬리’가 중국 본토의 관료조직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공산당 고위 간부의 친척이 반체제인사들의 탈출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이제야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다.
홍콩의 출판업자 바오푸는 이렇게 말했다. “체제 내부자, 고위 당 간부나 가족이 반체제인사의 탈출을 도왔다. 그때 도움을 준 사람들 중 열두어 명이 투옥됐다. 그중 일부는 10년 이상 징역형을 살았다. 최근 한 장성의 아들을 만났다. 그는 ‘붉은 2세대(red second generation, 공산주의 혁명 당시 마오쩌둥과 함께 싸운 홍위병들의 아들들)’였지만 3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런 식으로 고통을 당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도 중국 정부는 톈안먼 사태와 관련해선 강경한 입장을 굽히지 않는다. 그들은 그 사건을 ‘반혁명 반란(counter-revolutionary rebellion)’으로 간주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꾀꼬리’의 운신 폭은 갈수록 좁아졌다. 90년대 중반까지도 톈안먼 시위 참가자들은 홍콩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영국령이던 홍콩이 1997년 7월 1일자로 중국에 반환될 예정이었다. 그후에는 본토 탈출자들이 망명을 하거나 심지어 홍콩에 발을 디디기조차 어려워진다는 뜻이었다(프랑스가 그들에게 특히 호의적이었다. 프랑스 영사관은 본국의 승인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들에게 즉시 망명을 허용했다).
1996년이 되자 톈안먼 시위의 지명도 높은 인사들은 대부분 투옥되거나 해외로 탈출했다. 그러나 민주운동가이지만 별로 유명하지 않고 수완도 없으며 정치적 탄압을 받고 있다고 외국 정부를 설득할 언변이 없는 사람들이 약 80명 정도 남아 있었다.
밥 푸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96년 가을 임신한 아내와 함께 홍콩에 도착했다. 그는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자신의 말로 ‘작은 감자’였다. 그들 부부는 망명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1989년 베이징 남부 해안지방인 산둥성에 있는 대학에 다니다 학생들을 이끌고 톈안먼 시위에 합류했다. 나중에 그는 자백서를 써야 했지만 투옥되지는 않았다.
그들 부부는 기독교인이 된 뒤 베이징에서 독자적인 성경공부 모임을 만들고 ‘가정교회’ 운동가가 됐다. 국가가 승인한 교회의 통제를 피하기 위해 가정집에 모여 은밀하게 예배하는 모임이다. 그들은 1996년 잠시 구금됐다가 풀려났고 곧 푸의 아내가 임신했다. 중국의 엄격한 ‘한 가구 한 자녀 정책’을 위반한 것이다.
또 다시 구속될 것을 우려한 그들은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일종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푸가 돌이켰다. 친하게 지내던 호주인 선교사가 그들을 베이징의 한 여행사와 연결시켜줬다. 그들은 동남아 단체관광에 합류하고 싶다고 말했다. 여행사 직원이 기술 대기업의 재직증명서를 위조해 여권을 만들어줬다. 방콕과 홍콩을 목적지로 한 20인 단체 관광단에 합류한 그들은 홍콩에 도착한 뒤 관광단을 떠나 숨어들었다.
홍콩에서 그들은 너무도 복잡한 망명 절차에 좌절했다. 홍콩의 중국 반환이 다가오면서 분위기가 이미 바뀌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매주 우리는 홍콩의 여러 나라 영사관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다”고 푸가 돌이켰다. “매번 거절당했다. ‘가정교회’가 무엇인지 아는 외국 외교관들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전부 다 설명해야 했다. 긴장의 연속이었다.”
홍콩의 중국 반환 전에 망명이 승인되지 않았다면 그는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이 막후에서, 또 미국에서 발 벗고 나서서 망명 승인을 호소했다. 마지막 순간 그들은 미국 망명을 승인 받고 영국령 홍콩 자치정부의 마지막 근무일인 6월 27일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꾀꼬리’ 조직원들은 홍콩에 남아 있던 반체제인사들을 그 시한 이전에 탈출시키려고 전력을 다했다. 그들은 결국 임무를 완수했다. 이제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대탈출이 없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톈안먼 시위를 지지하고 자금을 댄 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운동연합회(홍콩 지련회)의 리줘런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꾀꼬리’는 홍콩 특유의 역할을 잘 보여준다. 그 역할은 1911년 멸망한 중국 최후의 왕조 청나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도 박해 받는 중국인들은 홍콩으로 피신했다. 중국 본토인들에게 홍콩은 등대요, 피난처요, 민주화 투쟁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뒤로는 그 역할이 끝났다.”
‘꾀꼬리 2.0’지금은 홍콩으로 피신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불의의 희생자들은 계속 중국을 탈출한다. 더욱 최근의 구출 임무는 ‘꾀꼬리’의 화려한 전성기에 비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시대에 따라 탈출 경로와 방법, 심지어 탈출하는 사람의 면면도 변했다.
요즘 그런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걸기보다 종교적 박해와 인종차별을 비난하거나 개인적인 불만을 표할 가능성이 크다. 기술이 발전하면서(요즘은 모두가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탈출 수단도 진화했다. 일부는 중국의 허술한 서남부 국경을 걸어서 빠져나가 인도차이나 반도로 가거나 허위 목적으로 발급 받은 여권을 사용해 비행기를 타고 중국을 탈출한다.
그러나 은밀하게 탈출시키는 능력과 기술은 1989년 톈안먼 사태 이래 계속 대물림됐다. 2009년 인권변호사이자 정치범인 가오즈성의 아내 겅허는 일거수일투족이 노골적으로 감시되는 가택연금을 당했다(가오는 노동운동가와 부패한 관리들에게 토지를 빼앗긴 농민, 파룬궁 수련자, 지하교회 신도 등 사회적 약자의 인권보호에 앞장섰으며 여러 차례 감옥을 들락거렸다). 겅허는 집 부근의 노점상에게 가족의 고역을 이야기했다. 다음 날 과일을 사려고 했을 때 그 노점상은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잔돈과 함께 구겨진 종잇조각을 건넸다.
그 종이에는 탈출 방법이 적혀 있었다. 겅허와 두 자녀는 2주에 걸친 탈출 길에 올랐다. 그들은 익명의 인물이 전해준 기차표, 위조 신분증, 휴대전화, 여러 SIM 카드를 사용했다. 그들이 중국 남서부에 도착한 후 가오의 두 자녀는 산악지대 소수민족의 어린이로 위장하고 국경을 넘어 이웃나라로 갔다. 그들이 모두 방콕에 도착하자 밥 푸가 가오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그는 크게 안도했다”고 푸가 말했다. 곧 가오가 다시 실종됐다. 현재 그는 신장위구르 자치구에서 3년 징역형을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푸가 알게 됐듯이 어린이들을 탈출시키는 일은 매우 까다롭다. 푸의 차이나에이드는 5년 전 인권변호사이자 가오의 동료인 궈페이슝의 가족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푸는 궈의 두 자녀가 여권을 발급 받지 못하자 자기 자녀의 여권을 내줬다. 궈의 자녀들은 푸의 자녀인 체하고 미국 댈러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푸의 조직 규모는 크지 않다. 2002년 이래 열두어 명을 중국에서 탈출시켰다. 조직원들의 출신도 다양하다. 개신교 가정교회 지도자들, 파룬궁 수련자들, 인권운동가 판사, 정치범 가족들, ‘한 자녀 정책’에 반대하는 여성(그녀는 임신 말기에 위험하게 강제로 낙태수술을 받아야 했다). 일부 사례는 아직도 망명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기서 밝힐 수 없다.
밥 푸는 특히 아버지나 남편이 구속된 반체제인사 가족들을 돕기 위해 나섰다고 말했다. “정치범의 주택 거실에서 공안 요원들이 죽치며 24시간 포커를 친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가슴이 너무도 아팠다. 우리 지하조직은 가오와 궈 같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 가족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1997년 이래 육상 탈출로의 대부분은 중국 서남부의 산과 강으로 옮겨졌다. 북한을 탈출하는 사람들은 지난 수년 동안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간 뒤 다른 나라로 향했다. 최근에는 중국의 서북부 끝에 위치한 신장위구르 자치구에서 소요와 폭력사태가 급증하면서 무슬림 위구르족들이 중국 정부의 탄압을 피해 탈출하고 있다. 캄보디아와 라오스 당국은 월경하는 위구르족들을 붙잡아 중국으로 돌려보냈다. 지난해 10월 위구르족 약 100명이 라오스로 넘어가려다가 중국 당국에 체포됐다.
중국 정부의 지속적인 탄압으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질 듯하다. 당국은 위구르 분리독립 운동가들이 촉발시킨 폭력사태의 확대를 막으려고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위구르족 3명이 차를 타고 톈안먼 광장의 군중을 향해 돌진해 그들 전부와 다른 2명이 사망했다. 또 위구르 성전주의자들의 소행으로 알려진 윈난성 기차역 무차별 테러 공격으로 29명이 흉기에 찔려 숨지는 사건도 발생했다.
지난 4월 말에는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수도 우르무치에서 대규모 연쇄 폭탄테러가 발생해 43명이 목숨을 잃고 94명이 부상했다. 홍콩의 출판업자 바오푸는 “그런 사건은 전부 독재 치하의 삶이라는 똑 같은 담론의 일부”라고 말했다. “불행하게도 그런 불만이 때로는 인종이나 종교적 문제로 표면화된다. 그러나 근본 원인은 체제 그 자체다. 사람들이 절망하고 있다.”
‘컴백 키드’‘꾀꼬리’의 전성기 이후 망명에 관한 중국인들의 태도도 조금씩 달라졌다. 정치범 석방 운동을 벌이다가 1989년 이후 네 차례나 투옥된 허우샤오텐은 요즘 중국인 반체제인사들은 서방의 삶을 그리 동경하지 않으며 망명 생활을 “길고 고통스럽고 외로운 여정”으로 인식한다고 말했다(허우는 왕쥔타오의 전처다).
허우는 1993년 합법적으로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서 월스트리트에서 10년을 일한 뒤 중국 당국과 협상해 사업에 전념하기로 서약하고 귀국을 허락 받았다. “5년 동안 민주화운동을 했고 10년 동안 월스트리트에서 일했다. 이젠 내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 때가 됐다.”
역설적이지만 학생운동 지도자 출신인 우얼카이시는 중국으로 돌아가 체포되려고 애썼다. 지난해 11월 그는 네 번째로 귀국을 시도했다. 대만에서 비행기로 홍콩에 도착하자 홍콩 당국은 곧바로 그를 다시 대만행 비행기에 태워 보냈다.
“중국의 감옥으로 직행하고 싶다”고 우얼카이시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중국 정부가 톈안먼 사태에 관해 나를 공개 재판하는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이는 걸 보고 싶다.”
그 순간에 우얼은 젊은이의 허세를 드러냈다. 톈안먼 사태 당시 내가 만났던 21세의 이상주의 청년으로 돌아간 듯했다. 일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 내가 물었다. ‘꾀꼬리’가 지금도 대안 중 하나인가?
우얼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꾀꼬리’는 지금도 있다. 물론 과거처럼 활발하진 않다. 필요할 때만 작동한다. 하지만 난 망명을 했을 때 이미 자유를 잃었다.”
마치 25년 전 톈안먼 사태 때처럼 용감한 발언이다. 어쩌면 운이 따르고 도와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다시 도피해 숨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가 좀 더 용감해진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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