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의사(義士)냐 테러리스트냐?
HISTORY - 의사(義士)냐 테러리스트냐?
사라예보 교외의 세르비아계 지역에 있는 한 모텔. 잘 생긴 외모의 모텔 주인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대리석으로 된 카페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불거져 나온 광대뼈와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그의 종조부 가브릴로 프린치프(19세이던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를 총으로 쏴 암살했다)를 닮았다.
황태자의 암살은 세계 열강을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4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160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4개의 제국이 몰락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오스만 투르크, 독일 제국이다. 종조부 프린치프가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한 지 100주년을 앞둔 지난 6월 초 종손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미안하지만 가봐야겠어요.” 그는 영어로 이렇게 말하면서 모텔 앞의 주유소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키가 훤칠한 그는 다림질이 잘 된 청색(그의 눈빛과 잘 어울렸다) 데님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배우 크리스토퍼 플러머와 약간 닮아 보였다.
“이 모두가 지긋지긋하다”고 가브릴로가 내 통역사에게 말했다. “지난 100년 동안 아무도 우리를 귀찮게 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모두가 우리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우리 가족은 우리의 역사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가족은 그에게 가브릴로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하지만 그는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페이스북에는 가브릴로 프린치프라는 인물이 53명이나 더 있다.
그 다음 몇 주 동안 사라예보에서 그의 유명한 조상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그뿐일 듯했다. 지난 6월 초 사라예보의 분위기는 마치 파티를 시작하는 여주인 같았다. 사라예보는 보스니아 전쟁(1992~95년) 당시 3년 반 동안 포위됐고 주민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이곳에서 일어난 가장 유명한 역사적 사건의 100주년을 맞이해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하지만 1991년 유고슬라비아가 붕괴한 후 보스니아의 모든 것이 그랬듯이 가브릴로 프린치프 역시 윤리적·정치적 논쟁의 희생양이 된 듯하다. “프린치프는 테러리스트였다고 생각한다.” 보스니아계 여행 가이드 에네스 포파라(26)가 라틴스키 다리 옆에서 자신이 인솔하는 관광단을 향해 우산을 흔들며 말했다. 페르디난트 대공이 최후를 맞이했던 곳이다.
“과거 정권에서 우리는 프린치프를 애국자로 생각했다. 보스니아에 살았던 우리 모두가 그랬다.” 콤시치가 말했다. “무슬림이건 세르비아계이건 크로아티아계이건 상관 없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점령국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우리는 프린치프가 총을 쐈던 지점의 시멘트 보도 위에 그의 발자국을 찍어 놓았다.” 그 발자국은 보스니아 전쟁 당시 사라예보에 떨어진 세르비아계 보스니아군의 포탄 수만 개 중 하나에 맞아 자취를 감췄다.
강 건너 언덕 위 동사라예보의 한 카페 벽에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대형 포스터가 붙었다. 1995년 데이턴 평화협정으로 전쟁이 끝난 이후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 위주의 스릅스카 공화국과 무슬림-크로아티아 연합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 두 개의 정치체제로 분리됐다. 이 두 정치 체제의 평화협정 이행 과정을 국제사회고위대표부(OHR)가 감독한다.
“지난해 사람들이 프린치프가 테러리스트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하기에 그의 포스터를 벽에 붙였다.” 카페 주인 조란 골자민이 말했다. “난 그를 영웅으로 생각한다. 전쟁 전에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다. 프린치프는 자유의 투사였다. 조국이 점령당했기 때문에 행동에 나선 것이다. 오늘날에도 보스니아는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에 의해 점령당했다.”
사실 이곳에는 900명의 유럽연합군(EUFOR) 병력이 배치돼 있다. 조란은 그들을 나토군으로 혼동했다. 과거에 오스트리아 식민주의자들과 군인들로 가득하던 사라예보 거리가 지금은 유럽연합군과 국제 구호요원, OHR의 외교관들로 득실댄다.
“가브릴로 프린치프에 관한 이야기 대부분이 잘못됐다.” ‘방아쇠: 세계를 전쟁으로 이끈 암살자를 찾아서(The Trigger:Hunting the Assassin who Brought the World to War)’의 저자 팀 버처가 말했다.
버처는 사라예보 포위 당시 영국 일간지 텔리그래프 기자로 4년 동안 사라예보 관련 보도를 했다. “프린치프는 한심하고 무기력한 인물로 비쳐지며 웃음거리가 됐다”고 버처는 말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 농부의 아들로 강인한 인물이었다. 깊은 생각 끝에 급진적인 경향을 띠게 됐다. 프린치프가 학교 때 쓴 리포트를 보면 1908년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를 공식 합병한 뒤 그의 분노가 서서히 타오르는 과정을 볼 수 있다. 그때까지 그는 A학점만 받던 우등생이었다. 하지만 합병 이후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 무단결석이 잦아졌다.”
흔히 제1차 세계대전은 인명의 낭비였다고 일컬어진다. 하지만 프린치프에게, 그리고 유럽 남부와 중부 및 동부 사람들에게 이 전쟁은 수세기 동안 그들을 지배해 오던 제국들을 무너뜨린 중요한 사건이었다. 오스트리아는 1908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빼앗아 합병했다. 사실상 1878년 베를린 회의(오스트리아가 투르크로부터 보스니아의 통치권을 넘겨 받았다) 이후 지속돼 오던 상황을 공식화했을 뿐이다.
프린치프는 윤리적·종교적 신념을 초월한 슬라브족 청년운동 단체 “믈라다 보스나(‘젊은 보스니아’라는 뜻)”에 입단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식민지배 세력의 타도를 목표로 한 단체다. 프린치프와 믈라다 보스나의 단원들은 시위를 벌일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부인 조피가 사라예보를 공식 방문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황태자 부부는 사라예보의 동맥인 밀야츠카강의 둑을 따라 늘어선 관중의 환호를 받으며 자동차 행렬을 벌였다. 프린치프의 동료 한 명이 그들을 향해 폭탄을 던졌지만 빗나갔다. 그 폭탄을 한 오스트리아 장군이 집어서 암살범에게 다시 던지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다. 황태자 부부는 무사했다. 암살범은 강물로 뛰어들었지만 붙잡혔고 황태자 부부는 계획대로 사라예보 시청까지 행렬을 계속했다.
황태자 부부는 황족의 위엄과 침착함을 보여주려고 돌아갈 때도 같은 길을 택하기로 했다. 그들은 부상당한 장군이 입원한 병원을 방문할 생각이었다. 믈라다 보스나는 첫 번째 계획이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 ‘플랜 B(제2안)’를 준비해 두었다. 황태자 부부를 태운 차가 라틴스키 다리에서 방향을 바꾸려고 멈춰 섰을 때 프린치프가 군중 속에서 걸어 나와 황태자의 목에 총을 쐈다. 거리가 2m밖에 안 됐다.
프린치프는 권총을 또 한 발 쐈지만 빗나가 황태자비 조피의 복부에 맞았다. 당시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알려졌다. “조피, 죽지 마오.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 하지만 몇 분 안에 황태자 부부는 사망했고 프린치프는 청산가리 캡슐로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후 붙잡혔다.
그로부터 80년 후인 보스니아 전쟁 당시까지도 페르디난트 대공은 사라예보 사람들이 즐기는 농담 속에 등장했다. 무요(보스니아 농담에 자주 등장하는 농부)가 낚시를 하러 가서 금 물고기를 잡는다. “난 마술 물고기야.” 물고기가 말한다. “날 놓아주면 소원 한 가지를 들어줄게.”
“왕자가 되고 싶어.” 무요가 말한다. “나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공주와 결혼해 궁궐에서 살고 싶어.” 그러자 물고기가 말한다. “소원대로 이뤄질 거야.” 다음날 아침 무요가 잠에서 깨어보니 낯설고 호화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의 옆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그의 눈을 바라본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전하.” 시종이 말한다. “사라예보로 행차하실 시간입니다.”
최근 보스니아의 현대판 황실 대표들은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의 암살 10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했다.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자유의 투사든 테러리스트든, 그는 공산주의와 전쟁이 남긴 경제적 혼란을 극복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 나라에 관광객을 끌어들일 기회를 제공한다.
“이건 내 아이디어가 아니었다”고 이보 콤시치가 말했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 먼저 서둘렀다. 프랑스가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처음엔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의 인명피해가 가장 컸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납득이 갔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인 2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역사적 의미가 큰 사건이다 보니 기념행사 중에 학술회의도 포함됐다. 그 회의를 조직한 베라 카츠 박사는 프린치프의 종손 가브릴로와 생각이 비슷하다. “가브릴로 프린치프라면 신물이 난다.” 카츠 박사가 말했다. “요즘은 모두가 그의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이 회의를 3년 전에 조직했다. 유럽과 미국, 그외 26개국의 51개 도시에서 학자들을 초청했다. 그 중에는 세르비아계 학자들도 있다. 베오그라드에 있는 세르비아 역사연구소의 협조를 많이 받았다.”
좀 더 가까이 있는 세르비아인들(보스니아 전쟁을 일으킨 세력)은 어떠냐고 물었더니 카츠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반야루카에서는 아무도 초청하지 않았다. (반야루카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지역인 스릅스카 공화국의 수도다.) 세르비아인들은 이곳에 오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회의를 연다.”
“아무도 나를 초청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몇 ㎞ 떨어진 동사라예보(세르비아계 통치 지역)의 역사학 교수 드라가 마스틸로비치가 말했다. 동사라예보는 전쟁 당시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들의 수도였으며 유고슬라비아 왕실의 스키 리조트가 있던 곳이다.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들은 그들 나름의 100주년 기념 계획을 세웠다.
이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실제 장소는 무슬림-크로아티아 연합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속해 있지만 세르비아계는 그들 나름대로 기념 공원을 건설했다. 동사라예보에 건설 중인 가브릴로 프린치프 공원에는 4만5000유로의 예산을 들여 높이 2m짜리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세르비아계 미술가 블라디미르 마지스토로비치의 작품이다. 또 다른 동상 하나는 베오그라드에 세워졌다.
동사라예보의 동상은 6월 28일 한 기념식에서 제막됐다. 같은 날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들이 비셰그라드(사라예보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세르비아계의 근거지)에 모여 기념행사를 열었다. 비셰그라드는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들에게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곳이다. 보스니아 전쟁 당시 세르비아군은 이곳에서 약 3000명의 무슬림을 처형해 다리 아래로 버렸고 나머지는 쫓아냈다. 한때 여러 민족이 모여 살던 번화한 도시였지만 지금은 무슬림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믈라다 보스나의 단원이었던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보스니아의 민족주의자였다. 그리고 그 민족주의적 신념에 목숨을 바쳤다. 당시 19세였던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법으로는 처형하기에 너무 어린 나이였다. 프린치프는 1918년 5월 테레지엔슈타트(지금은 체코 공화국에 속해 있다)의 감옥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는 그 감옥의 독방에 4년 동안 갇혀 있었는데 책이나 펜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감방 벽에는 뭔가로 긁어서 쓴 글이 남아 있다. “우리의 유령들이 비엔나 곳곳을 걸어다니고, 궁전을 배회하며, 귀족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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