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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ISCOPE GEOPOLITICS - ‘세계의 왕따’ 자초하는 푸틴

PERISCOPE GEOPOLITICS - ‘세계의 왕따’ 자초하는 푸틴

우크라이나 친러시아 반군의 말레이시아 민항기 격추 사건으로 그의 국제적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7월 21일 MH17편 격추와 관련해 국영 TV로 연설하고 있다. 그는 반군과 전투를 계속하는 우크라이나 정부를 비난했다.



푸틴의 ‘로커비 모멘트’라고 할만하다(Call it Putin’s Lockerbie moment). 지난주 러시아 지도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 대한 세계의 태도가 경계와 불신에서 노골적인 적대감으로 변했다. 가파른 추락이었다. 몇 달 전만 해도 푸틴은 소치동계올림픽을 개최하고, 자신의 체제에 도전한 신흥재벌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와 펑크 그룹 푸시 라이엇을 석방하면서 최고조에 이른 자신의 국제적 위상을 만끽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크림공화국 합병으로 그의 평판이 하향 활강을 시작했다. 이제 말레이시아 항공 MH17편이 격추된 비극과 푸틴의 이름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굳어지면서 그의 이미지는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뉴욕대의 국제문제 전문가 마크 갤리오티 교수는 “정치는 가상의 상황을 통제하는 행위인데 이제 MH17 사건은 그보다 더 깊은 무엇을 상징하게 됐다”고 말했다. “푸틴의 러시아가 본질적으로 공격적이고 파괴적이며 불안정화를 부추기는 나라임을 부인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사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일이었다. 크렘린은 이번 재난을 자신의 일로 인정할 필요가 없었다. 리비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1988년 그의 수하들이 팬암 103편을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의도적으로 폭파했다)와 달리 푸틴은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 부근의 분리주의 반군에게 민항기를 미사일로 격추시키라고 명령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수집된 증거에 따르면 제대로 훈련되지 않았고 고삐가 풀린 민병대가 저지른 비극적인 실수라는 점이 명확히 드러난다(물론 러시아가 그런 반군에게 성급하게 치명적인 지대공 미사일을 제공한 책임은 있다).

따라서 푸틴은 다음과 같이 해야 마땅했다. 도네츠크의 반군 소행을 비난하고 국제 조사에 협조하기로 동의하며 이번 사건에 책임 있는 자들을 심판 받도록 하는 데 국제 지도자들이 힘을 합치자고 촉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푸틴의 행동은 그와 정반대였다. 이번 비극이 발생한 직후 며칠 동안 크렘린은 진상을 오도하거나 우크라이나 정부를 비난하면서 도네츠크 분리주의 반군의 황급한 은폐 작전을 눈감아 주었다. 그들은 미사일 파편에 의한 상처가 뚜렷한 시신들을 숨기려 했고, 그 공격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러시아제 BUK 방공 미사일 발사대를 서둘러 러시아 국경 너머로 이동시켰다(그 작전은 현지 주민과 우크라이나 정부 첩보원들이 휴대전화 카메라에 그대로 포착됐다).

푸틴 자신도 러시아 국영 TV에 두 번이나 출연해 이번 사건을 두고 페트로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반군과 휴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극이 발생한 듯이 모호하게 이야기했다. 싸운 뒤 ‘난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저 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he made me do it)’라는 어린 아이들의 흔한 주장을 약간 복잡하게 비튼 변명일 뿐이다.

KGB에서 훈련 받은 대로 모든 책임을 부인하려는 푸틴의 본능 때문에 MH17의 비극은 세계 대다수 사람들의 눈에 푸틴의 소행으로 비치게 됐다. 러시아 언론인 올레그 카신은 “이제 서방 세계의 대중은 푸틴을 무아마르 카다피나 사담 후세인과 동급으로 인식하게 됐다(For the Western public, Putin has come to occupy the same place as Muammar el-Qaddafi or Saddam Hussein)”고 말했다. “푸틴은 비행기들을 격추시키는 닥터 이블(영화 ‘오스틴 파워’에 등장하는 악당) 같은 이미지로 전락했다.”

일반인들만 그런 게 아니다. 서방 지도자들, 특히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새로 임명한 각료들은 지금까지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과 카다피 리비아 지도자 같은 인물에게 사용했던 표현을 동원해 푸틴을 비난하고 나섰다. 마이클 팰런 영국 국방장관은 푸틴을 “테러 후원자”로 부르며 “우크라이나에서 떠나라”고 말했다. 필립 해먼드 영국 외무장관은 “러시아가 올바로 행동하지 않으면 ‘왕따 국가’가 될지 모른다(Russia risks becoming a pariah state if it does not behave properly)”고 경고했다.

캐머런 총리도 이제 서방이 “러시아를 대하는 접근법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푸틴에게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 분리주의 반군에 압력을 가해 그들의 행동을 제어하라고 촉구했다(독일은 러시아의 최대 무역 파트너이자 러시아 국영 에너지회사 가스프롬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MH17 사건 전엔 서방 세계 대부분에서 푸틴의 평판이 여전히 논란 거리였다. 진보파에게 푸틴은 언론의 자유를 압살한 독재자요, 러시아의 피를 빨아먹고 중소기업을 옥죄며 러시아 경제의 미래를 망치는 부패 관료들의 대부(godfather)였다. 반면 다른 많은 사람들(예를 들어 푸틴을 2007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시사주간지 타임의 편집자들)은 푸틴이 옛 소련 붕괴 후 러시아의 재건을 이끈 강한 지도자라고 생각했다.

미국 대선 후보로 출마한 적 있는 논객 패트릭 뷰캐넌 같은 보수파는 동성애자와 서방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푸틴의 입장을 옹호했다. 프랑스의 마린 르펜이나 영국의 나이젤 파라지 같은 유럽의 극우파 지도자들도 같은 입장이었다. 파라지는 지난 5월 푸틴을 가장 존경하는 국제 지도자로 꼽았다. 그에 따르면 푸틴은 시리아 위기를 “기막히게 잘(brilliant)” 다루고 있다.

그러나 지금 독일인들이 말하는 ‘푸틴 페어슈테어(Putin-versteher, 푸틴을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라는 뜻)’들은 이상할 정도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 갤리오티는 “자신이 당당하게 나서거나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간주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그들도 깨닫고 있다”고 말했다.

할리우드와 패션계는 올해 초 푸틴이 동성애 ‘선전(propaganda)’을 불법화한 새 법을 제정한 직후부터 이미 크렘린에 등을 돌렸다. 심지어 푸틴의 연예계 친구들도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 1980년대의 액션스타 스티븐 시걸은 에스토니아의 뮤직 페스티벌에 참가하려다가 푸틴의 크림공화국 합병을 지지했던 발언이 문제가 되면서 초청인사에서 제외됐다.

호주 시드니에서 말레이시아 항공 MH17편 격추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는 동안 한 여성이 푸틴을 비난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겉보기에 푸틴은 강인하고 독립심 강한 인물이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지난 14년 동안 그는 유독 세계인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면서 러시아와 러시아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일에 몰두했다. 200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호화판 G8 정상회의(올해 상반기에 이 선진국 모임에서 러시아가 제외됐기 때문에 그런 잔치가 재연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부터 500억 달러를 쏟아 부은 소치 동계올림픽, 2018년 월드컵 유치까지 푸틴은 러시아의 평판을 높이는 데 거액을 뿌렸다.

아울러 푸틴은 외국 정책입안자들을 상대로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파리와 워싱턴의 여러 연구기관에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 학자들과 언론인들에게 크렘린 정책의 현명함을 홍보할 목적으로 세계의 러시아 전문가들을 호화판 연례 대회에 초청했다. MH17 사건, 아니 그보다는 크렘린의 사후 처리 방식이 수년간 공들여 일으킨 ‘소프트파워’를 단숨에 망쳐 놓았다. 푸틴처럼 지위에 집착하는 인물에겐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러시아로선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런 국가홍보 대실패는 현실적인 문제를 초래한다. MH17편이 공중에서 폭파되기 몇 시간 전 미국은 추가적인 러시아 경제제재를 발표했다. 이번 제재는 러시아 석유회사들이 국제 시장에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게다가 MH17 사건이 발생하자 제제를 한층 더 강화하라는 압력이 급격히 강해졌다. 그런 제재가 실행되면 머지않아 러시아 경제가 무너질지 모른다.

푸틴이 취임한 후 처음 지명한 총리였던 미하일 카샤노프는 7월 21일 블룸버그 통신에 이렇게 말했다. “경제 전반을 대상으로 하는 제재의 위협이 피부에 느껴지기 시작했다. 업계가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다. 금융부문 전반에 제재가 가해지면 6개월 안에 경제가 붕괴할 것이다.”

유럽연합(EU)은 푸틴 측근들과 그들 기업체의 자산을 대상으로 제재를 한층 더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EU의 제재는 미국이 요구하는 수준보다는 덜 가혹하겠지만 러시아의 위태로운 경제에 더 큰 압력이 가해질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럽의 경제가 러시아에서 분리될 수는 없다. 특히 에너지 공급의 25%를 러시아의 국영기업 가스프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현실적인 이유에서라도 유럽은 푸틴과 계속 타협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MH17 사건이 러시아 이외의 에너지 공급처를 찾는 노력을 가속화시킬 것이다. 아울러 러시아와 중부 유럽을 잇는 ‘사우스 스트림’ 파이프라인 같은 가스프롬의 초대형 프로젝트에 반대가 더 심해질 것이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가장 중대한 결과는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 새로운 철의 장막(Iron Curtain)이 구체화되는 것이다. 2008년 러시아의 조지아 침공(곧 철수했다) 이래 그 장막이 생기기 시작했다. 갤리오티는 “발트해에서 우크라이나까지 경계선에 대한 인식이 더 확실해지면서 그 경계를 지켜야 할 필요성도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말레이시아 항공 MH17편의 추락 현장에서 친러시아 반군이 경계를 펼치는 가운데 우크라이나 응급구호대원들이 희생자 시신을 옮기고 있다.
그 말은 곧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 반군 격파에 유럽이 지원해야 한다는 뜻이다. “MH17편의 격추로 우크라이나는 완전히 유럽의 품에 안기게 됐다”고 갤리오티는 말했다. “푸틴에게 공격 행위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최선의 길은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지원하는 것이다.”

친러시아 반군의 MH17 격추가 그들의 패배를 앞당길 가능성도 크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맹공격을 퍼부어 그들을 패주시킬 용기를 낼만 한 상황이 됐다. 게다가 세계의 이목이 우크라이나의 분쟁 현장에 쏠려있기 때문에 러시아가 항공기나 로켓 시스템 같은 중화기를 반군에 계속 제공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다. 반군이 전술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려면 그런 무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결국 러시아는 자신이 놓은 덫에 스스로 걸려들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분리주의 반군이 패배하도록 푸틴이 그냥 내버려 둔다면 국내적으로 푸틴의 위상이 크게 손상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 언론인 카신은 “푸틴이 요정을 병에서 나오게 풀어줬지만 결국 그 자신이 요정에게 잡아먹히게 되리라는 게 도네츠크의 분리주의 반군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농담(The popular view of the Donetsk separatists is that Putin has let a genie out of its bottle which will eventually eat him)”이라고 말했다.

카신은 반군이 우크라이나 정부군에게 궁극적으로 패하면 “러시아 출신의 자원병들이 도네츠크에서 러시아로 돌아가 크렘린에 대항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푸틴이 반군 지원을 계속하면 더 심한 국제 제재를 받게 된다.

푸틴은 지금까지 대부분 운이 좋은 편이었다. 무명에서 옐친 대통령 일가에게 발탁돼 노력하지도 않고 옐친의 후계자로 지명됐다. 임기 초기 러시아의 최대 수출품목인 석유 가격이 배럴당 19달러에서 100달러로 치솟아 계속 그 수준을 유지해 주었다. 체첸 반군들의 저항운동은 내분으로 피비린내 속에서 막을 내렸다. 푸틴의 정적들은 오일머니가 풍부한 크렘린에 편승하는 편이 저항하기보다 훨씬 이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런 푸틴의 운이 이제 다한 듯하면서 그가 허둥거린다. 2001년 우크라이나군이 실수로 러시아 민항기를 격추했을 때 레오니드 쿠치마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계면쩍은 표정으로 “나쁜 일은 일어나게 마련(Bad things happen)”이라고 힘없이 말했다. 그렇다. 나쁜 일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문제에서 푸틴은 스스로 그런 나쁜 일의 볼모가 됐다. 아주 나쁜 정치다.

은폐는 성공하는 경우가 드물다. 곧잘 면전에서 폭로된다. 예를 들어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미군의 포로학대 사건이 발생했을 때, 또 1988년 로커비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5개월 전 페르시아만 상공에서 미군이 이란 민항기를 격추시켰을 때 미국이 깨달았듯이 그런 실수의 재난을 수습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한 후 책임자를 확실히 처벌하는 것이다(the smartest way to deal with such a disaster is to accept, apologize and conspicuously punish the guilty).

올해 푸틴은 보란 듯이 크림반도를 손에 넣었지만 그와 동시에 전략적으로 훨씬 더 중요한 우크라이나를 잃었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푸틴은 MH17 사건을 잘못 다룬 나머지 얼마 남지 않은 국제적 위신마저 잃을 처지다. 사실 그건 범할 필요가 없는 실수였다. 그 실수 때문에 푸틴과 러시아는 앞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That was an unnecessary mistake that will cost him — and Russia

— dear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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