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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역사의 메아리

HISTORY - 역사의 메아리

사이공 함락 전날인 1975년 4월 29일 제럴드 포드 당시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백악관에서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과 사태를 논의하고 있다.
지난 9월 초 응우엔 땀 찌엔(66) 전 주미 베트남 대사가 워싱턴에 DC에 있는 우리 집에 묵었다. 찌엔은 45년 전 베트남전 당시 모스크바에서 훈련받은 전기·기계 기사로 러시아제 SAM 미사일 전문가였다. SAM 미사일은 북베트남에서 미군 전투기 수백 대를 격추시켰다. 당시 나는 남베트남에서 미군 정보원으로 일했다. 나중에 난 군대를 떠나 대학원에 진학했고 찌엔은 외교관이 돼 모스크바에서 일했다. 그후 찌엔은 하노이의 베트남 외무부를 거쳐 일본과 미국 워싱턴에서 근무했다. 그는 9·11 테러가 일어나기 며칠 전 주미 대사로 발령받아 워싱턴에 파견됐다. 그리고 현재는 호찌민시 공상당위원회의 외교정책 기구인 베트남-미국 친선협회 회장이다.

우리는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모스크바 시절 인상 깊었던 경험들과 하노이에서 미군 공습을 가까스로 피한 일화 등을 들려줬다. 급성장하는 미국과 베트남의 경제·군사 관계와 서방에 대한 이슬람 광신도들의 도전도 화제에 올랐다.

찌엔은 비대칭전에 대해 잘 안다. 약소국이 초강대국과 맞서 싸우는 일이 어떤 것인지 말이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사이 내가 과거의 적을 집에 초대해 친구로서 담소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 묘한 감흥이 일었다. 내가 언젠가 수니파 급진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의 지휘관과 맥주를 한잔 마신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찌엔이 떠나고 난 뒤 로리 케네디의 흥미진진한 새 다큐멘터리 영화 ‘베트남의 마지막 날들’이 워싱턴에서 개봉됐다(로리 케네디는 끔찍했던 베트남전의 첫 장을 지휘한 존 F 케네디 전 미 대통령의 조카다). 찌엔과 함께 이 영화를 보지 못한 게 정말 아쉽다. 만약 그가 이 영화를 봤다면 북베트남의 탱크들이 도망치는 남베트남인들의 뒤를 쫓으며 사이공으로 진군하는 모습을 담은 장면을 보면서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숨기려 애썼을 게 분명하다. 난 베트남에서 복무한 대다수 재향군인처럼 우리가 그곳에 남겨두고 온 사람들의 극심한 고통에 충격과 함께 깊은 슬픔을 느꼈다.

2011년 미군이 이라크에서 철수할 당시 그런 광경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무패의 군대가 과거 어느 때보다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그곳을 떠났다. 아프간에서도 카불 공항을 이륙하는 미군 비행기의 바퀴 홈에 매달려 탈출하려는 아프간인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케네디의 다큐멘터리에서 보여주듯이 베트남인들이 떠나가는 미군 비행기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던 1975년 미군의 베트남 철수 당시와는 대조적이다. 대다수 아프간인들은 오히려 미군이 떠나가는 걸 보면서 안도하는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 세 전쟁에는 공통점이 있다. 미국이 지원해온 부패한 현지 정권의 한심한 군대가 적으로부터 미국인을 지켜주리라는 환상이다. 극한 상황에 몰릴 때 미국인들이 의지할 데라곤 자국 대사관 경비와 군사고문들 밖에 없으며 거의 혼자 힘으로 난관을 헤쳐나가야 한다.

‘베트남의 마지막 날들’은 언젠가 바그다드와 카불에서 일어남 직한 일을 미리 보여주는 듯하다. 1975년 3월 북베트남의 보병과 포병, 탱크들이 대거 국경을 넘어 남베트남군을 물리치며 진격했다. 미군이 훈련시키고 장비를 지원한 남베트남군 대다수는 적군이 공격해오자 도망쳤다(지난 6월 IS가 이라크를 공격했을 당시 이라크 정부군이 도주한 것과 매우 흡사하다).

베트남 민간인 수만 명이 남쪽으로 필사적으로 도망치면서 인간 쓰나미 물결을 이뤘다. 하지만 당시 사이공 주재 미국 대사 그레이엄 마틴은 실제 상황이 보기만큼 나쁘진 않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인의 질서 있는 탈출 승인을 거부했다. 그는 미국인의 탈출이 큰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지만 혼란은 이미 극에 달해 있었다. 그런데도 마틴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몇몇 미국인이 독자적으로 탈출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비밀리에 베트남인 친구들과 종업원들을 사이공 탄손누트 공항까지 데려갈 탈출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탈출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고 미 국무부 간부 출신의 조셉 맥브라이드가 회상했다. 탈출 작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그는 5인승 밴에 9명을 태우고 또 다른 베트남인 친구를 태우려고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길거리에서 가족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그 친구는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을 태운 자동차를 보고는 맥브라이드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표시를 한 뒤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밴은 그 자리를 떠났다.
1975년 4월 29일 USS 커크호의 선원들이 치누크 수송헬기를 향해 승객들을 내려 보내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당시 미 해군 간부들은 해외로 탈출하려는 베트남인들을 수백 명씩 배에 태워 필리핀으로 실어 날랐다.

“누가 탈출하고 누가 뒤에 남느냐가 정말 큰 문제였다.” 케네디의 다큐멘터리 중 한 흥미진진한 에피소드에서 퇴임한 군 정보장교 스튜어트 헤링턴이 말했다. “그 문제는 누구에게나 아주 끔찍한 도덕적 딜레마였다.” 전쟁 막바지에 북베트남군이 탄손누트 공항을 폭격하자 헤링턴은 이제 더는 베트남인 친구들을 탈출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헬리콥터로 탈출시켜주겠다고 약속하고 데려온 친구들에게 그는 “한 사람이라도 이곳에 남겨두고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헤링턴은 어두운 밤을 틈타 대사관으로 갔다. “ ‘이건 정말 잘못됐다’고 생각했다”고 그가 케네디에게 말했다. “아주 심각하고 지독한 배신이었다.”

헤링턴은 영화 후반부에서 이렇게 말한다. “전쟁 막바지의 상황은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 당시 전반적인 분위기를 축소해서 보여준다. 확고한 믿음으로 맺어진 약속이 깨졌고 사람들이 상처를 받았다. 미국이 일관성 있게 행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전 내내 이런 식이었다.”

한편 바다에서는 미 해군 간부들이 명령을 어기고 해외로 탈출하려는 베트남인을 수백 명씩 배에 태워 필리핀으로 실어 날랐다. (베트남전 막바지에 약 13만 명의 남베트남인이 국외로 탈출했다.)

이런 내용 대부분은 오래 전부터 알려졌다. 하지만 USS 커크호에서 복무했던 해군 승무원 한 명이 이 비공식적 탈출을 기록한 슈퍼-8 칼라 필름 자료를 케네디에게 제공했다. 케네디는 그 자료를 건네 받고 나서야 제대로 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네디는 “그 이전에는 새롭게 알려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사실 이 다큐멘터리의 내용 대부분이 이전에 보거나 들은 것들이다. 헤링턴과 프랭크 스넵(사이공에서 CIA 정보 분석가로 일했다)의 책에 나온 내용도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들과 다른 많은 사람들의 고뇌에 차고 죄책감 가득한 회상이 케네디의 다큐멘터리를 신선하고 고통스러우며 실감나게 만든다.

남베트남의 붕괴를 지켜보면서 우리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현재의 전쟁들 역시 이 다큐멘터리를 한층 더 실감나게 한다. 케네디는 한 보도자료에서 “미국 정부에 고용됐던 이라크인들이 어떻게 암살의 표적이 됐는지에 관한 뉴스 보도를 보고 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결심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미군이 철수하면서 미국 역사상 최장기간의 군사 개입이 종지부를 찍게 됐다”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명확히 정의된 출구전략 없이 전쟁에 개입했을 때의 인적 희생이 얼마나 큰지 다시 한번 깨닫고 있다.”

케네디의 출구전략 발언은 최근 IS에 대한 오바마 대통령의 전면전 선포 이전에 나왔다. 지금 미국은 차츰 전쟁의 늪 속으로 다시 빠져들고 있다. 역사의 기괴한 재연처럼 느껴진다. 케네디의 말이 맞다. “역사가 되풀이되진 않을지 모르지만 메아리 치는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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