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한 원화 환율은? - 폭우 쏟아져도 물 새는 저수지 신세
적정한 원화 환율은? - 폭우 쏟아져도 물 새는 저수지 신세
원화 환율은 높은가 아니면 낮은가? 가계·기업·정부를 막론하고 환율의 적정 수준에 대해서는 누구도 확실하게 답하지 못한다. 한쪽에서는 환율이 낮아 수출 경쟁력이 저하되고 경제 성장의 장애가 된다고 불평한다. 또 다른 편에서는 높은 환율 때문에 수입물가가 높아 성장 과실이 각 분야에 골고루 미치지 않는다고 걱정이다.
하지만 어느 쪽도 환율이 왜 높은지 또는 낮은지에 대한 판단 기준이 없이 개인이나 집단의 입장에서 주먹구구식으로 환율이 많이 오르거나 내렸다고 주장할 뿐이다. 국내외 경제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환율과 같은 금융가격지표의 적정 수준을 가늠하지 못하면 공공 부문이든 민간 부문이든 경제적 판단을 그르치게 된다. 환율은 국가경쟁력이 종합적으로 반영된 결과물이다.
그런데 적정 환율 수준에 대한 기준 없이 심정적 판단에 따라 끌어올리거나 내리려고 하면 부작용이 커진다. 그렇게 되면 성장·물가·국제수지 같은 거시경제 변수에 나쁜 영향을 미쳐 경제를 불균형 상태로 몰고 가기 쉽다. 불균형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다시 균형 상태로 돌아가는 복원력이 상실되는 것이 세상 이치다. 비정상이 계속되면 비정상을 정상으로 착각하게 되는 무서운 일이 일어난다.
환율의 높낮이를 가늠하는 기초 판단자료는 실물 부문 경쟁력의 결과로 나타나는 경상수지다. 최종 판단자료는 대외 투자를 포함해 종합적 국가 경쟁력의 결과로 나타나는 국제투자대조표(IIP, International Investment Position)의 순국제투자 수지다. 자칫 혼동하기 쉬운 경상수지와 국제투자수지의 관계를 간략하게 들여다보자.
경상수지는 일정 기간 중에 발생한 국가 간 실물 부문 경제적 거래의 내역을 집계한 유량(flow) 개념의 통계다. 상품·서비스 수지, 거주자와 비거주자의 임금, 급료의 차이인 소득수지와 기부금, 무상원조 같은 이전수지를 포괄한다. 순국제투자수지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투자거래를 포함한 모든 경제적 거래의 결과인 저량(stock) 개념의 통계로 일정시점의 대외지급 능력을 나타낸다. 경상수지와 국제투자수지의 관계는 저수지로 말하면 강우량 (경상수지)과 저수량(순국제투자 잔액)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다. 비가 내릴 만큼 내려야 저수지에 물이 고여 농업용수를 제때 공급할 수 있다. 저수지에 물이 충분히 차 있다면 웬만한 가뭄도 이겨낼 수 있지만, 저수지가 메말라 있다면 웬만큼 비가 내려도 해갈되기 어렵다. 그리고 저수지가 모래 바닥이거나 제방에 새는 구멍이 있다면 비가 많이 내려도 소용없는 일이 된다. 이와 달리 오랜 장마로 물이 넘친다면, 저수지가 무너지지 않도록 적기에 수문을 열어야 한다. 경상수지 흑자폭이 지나치게 커지면 환율이 내려 흑자를 줄이는 자동조절 장치가 작동해야 경제가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자본시장이 개방되지 않은 폐쇄경제를 가정하면, 경상수지가 균형을 이루는 상태에서 정해지는 시장 환율이 적정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재화와 서비스의 대외거래 결과로 나타나는 경상수지 흑자 지속은 실물 부문의 경쟁력 상승을 의미하므로 환율 하락(원화 평가절상)이 이어져야 된다. 적자 지속은 실물 부문의 경쟁력 저하를 의미하므로 환율 상승(평가절하)이 불가피하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가 시현한 무려 5000억 달러에 육박하는 경상수지 흑자를 감안한다면, 원화 환율이 적어도 1993년 수준인 800원대 이하로 떨어져야 마땅하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장기간 대규모 경상수지를 기록하고 올 9월 말 현재 3540억 달러에 이르는 외환보유액을 갖고 있으면서도 원화 절상(환율 하락)은커녕 만성적 적자시대보다 환율이 높은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는 언제 닥칠지 모를 ‘달러 부족’ 사태에 대비해 이웃 나라와 통화스와프 협정까지 맺어야 한다. 이 같은 현상들은 대외지급 능력이 겉보기와 다르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개방경제 체제에서 경상수지는 국민경제의 중간 성적표다. 포트폴리오 투자 결과를 포함하는 순국제투자수지 잔액은 최종 성적표가 된다. 중장기 환율을 좌우하는 요소는 말할 것도 없이 경제의 중간 성적인 경상수지보다는 최종 성적인 순국제투자수지 잔액이다. 국제투자대조표를 관찰하면 준비자산(외환보유액)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모든 대외금융자산(대외 투자)에서 대외금융부채(외국인 투자)를 제외한 순국제투자 잔액은 만성 적자다. 올 6월 말 현재 마이너스 110억 달러에 이른다. 국제투자대조표로 미뤄보면, 우리나라의 대외지급 능력은 충분한 여력이 없으며 현재의 원화 가치가 과대평가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가 대규모의 외환보유액를 자랑하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증권시장에 투자하기 위해 환전한 외화를 임시로 보관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다.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와는 반대로 순국제투자수지 잔액이 마이너스라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한국 경제가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를 했음을 시사한다. 실물 부문에서는 커다란 흑자를 기록했지만, 금융과 부동산, 기타 투자거래에서 그 이상의 손실을 기록했다는 얘기다. 강우량이 많았어도 저수지에 물이 차지 않은 것은 어딘가 물이 새고 있음을 의미한다. 말할 것도 없이 약삭빠른 외국인들이 한국 시장에서 막대한 수익을 실현했지만 한국인들은 외국 시장에서 엄청난 손실을 냈기 때 문이다. 믿어지지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금리·주가·환율 같은 금융가격지표가 경제 상황을 적정하게 반영하지 못하면 가치투자에 익숙한 외국인 투자자들은 수지를 맞는다. 금융가격지표들이 본질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면, 현물과 선물시장 간 또는 역내외 시장 간에 균형을 깨트린다. 실물 부문과 금융 부문의 불균형은 누군가에게는 초과 수익의 기회를 제공하고 다른 누군가에는 초과 손실의 위험을 안긴다. 예컨대, 최근 수년간 우리나라 채권시장에 핫머니가 몰린 까닭은 대내외 금리 차이와 함께 환차익까지 이중으로 노렸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이 초과 수익을 올리는 대가는 국민경제가 최종적으로 부담한다. 더구나 차익거래를 노린 외국인 투기자금 유출입을 유발시켜 금융시장은 물론 실물시장까지 교란시키는 부작용 또한 컸음을 되새겨 봐야 한다. 한국 경제는 지금까지는 비가 많이 와도 물이 고이지 않는 구멍 뚫린 저수지와 흡사하다고도 할 수 있다.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도 환율은 이상하게 오르는 기현상은 실물경제의 성장 과실이 어디론가 흩어졌다는 뜻이다. 높은 원화 환율이 수출과 내수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고물가로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폐해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수출만 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며 ‘환율 주권’이라는 구호 아래 펼쳐졌던 고환율 정책의 결과다. 세계에서 가장 긴 근로시간을 기록하며 땀 흘려 일했어도 대다수 국민의 후생과 복지는 그만큼 향상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그동안의 엄청난 국제투자수지 손실을 분석해 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고환율·고물가를 무릅쓰고 벌어들인 그 많은 외화가 다 어디로 갔는지 생각해 본 일이 있는지 모르겠다.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와 국제투자수지 적자 내역을 밝히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최근 글로벌 시장은 유동성 완화와 이에 따른 유동성 흡수 문제가 맞물리는 혼돈 속에 있다. ‘수퍼 달러’와 ‘엔저’ 사이에서 우리나라 외환·주식·채권시장이 동요하고 있다. 외국인 포트폴리오 투자 비중이 크고 외환보유액이 충분하지 못한 나라에서 외국인 자금이 유출되기 시작하면 주식과 채권 가격이 하락하고 환율이 오르는 일은 불가피하다. 주가 폭락과 환율 급등으로 외국인 보유 금융자산의 가치도 급격하게 준다. 그렇게 되면 외국인들은 한국에서 빼내갈 자산 가치가 줄어들고 결과적으로 외국인들의 탈출을 시장 기능으로 자연스럽게 막는 효과가 있다. 또한 국제 금융위기 같은 비상사태가 벌어질 때, 급격한 주가 하락과 환율 상승은 외국인 보유 주식과 채권의 달러 베이스 평가액을 줄어들게 만들어 그만큼 우리나라의 대외지급 능력은 개선된다. 국제투자수지가 그만큼 개선되는 효과를 가진다.
그런데 외국인 투자자들이 보유 주식과 채권을 팔아 떠나려 할 때, 정부가 허둥지둥 내놓는 부양 대책은 이중삼중으로 국민경제를 멍들게 할 수 있다. 위기 상황에서 증시 부양조치는 외국인들이 보유한 주식이나 채권을 국민연금 같은 연기금에 비싼 값에 떠넘기는 수단을 제공하는 일이다. 그리고 사실상 모자라는 외화를 풀어 원화 환율 상승을 억제하는 조치는 보유 외환을 헐값에 팔아넘기는 어리석은 일이다.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증시 부양이나 환율 안정 조치는 외국인이나 특정인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하지만 결국 국민경제를 멍들게 하는 일임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핫머니가 대량으로 빠져나가면 당장은 금융시장 혼란으로, 기업 자금 조달 곤란과 부의 효과 감소로 소비 둔화 같은 어려움이 닥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대외지급 능력이 보다 건실해져 급기야는 불안심리가 해소되고 중장기 주가와 환율은 오히려 탄력을 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우리나라가 상당기간 엄청난 경상수지 흑자를 이룩하고도, 울며 겨자 먹기로 체결한 통화스와프 협정에 매달릴 필요도 없어진다. 일시적으로 벌어질 신용경색 상황은 채무보증 같은 간접금융 기능을 확충해 시장의 충격을 줄일 수 있다.
이 같은 시장 기능을 무시하고 외국인들이 빠져나가려는 시점에서 섣불리 시장에 개입하면 그들에게 우산을 씌어 주고 안전한 탈출구를 제공하는 것과 다름없다. 외국인 투매로 추락하고 있는 주가를 떠받치고, 치솟는 환율을 억누르면 외국 투자자들은 한국 시장에서 노다지로 벌어들인 돈을 힘들이지 않고 빼내 갈 수가 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환율 방어선을 달러당 850원에서 1300원까지 후퇴하며 환율을 억지로 누르려다 얼마 되지 않는 외화를 탕진하고 백기를 들었다. 경제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그저 대증적 묘수만 찾다가 앞을 내다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도 주가와 환율을 안정시키겠다며 쓸데없이 힘을 낭비했다. 우리나라가 외국 투자자들에게 ‘ATM 코리아’라는 평을 들으며 언제든 손쉽게 돈을 빼내갈 수 있는 국가라는 평을 듣는 건 앞뒤를 가리지 못한 정부의 시장개입 때문이었다. 외국 투자자들에게는 고마운 나라가 되겠지만, 한국 경제는 실물 부문에서 땀 흘려 벌어들인 외화를 그들에게 빼앗긴다. 강조하건대, 외국인 증권 투자 비중이 큰 나라일수록 외국인들이 떠나려 할 때는 안절부절 말고 시장 기능에 맡겨야 한다. 가능하다면 투자자들은 외국인들이 떠나면서 값싸게 팔아넘긴 금융상품을 사들이고 시간을 벌어야 한다. 불확실성이 해소되기 시작하면 주가와 환율이 본질가치를 회복하게 마련이어서 초과 수익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지금 꿈틀거리는 국제 금융시장 난기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하고 확대될지 아무도 모른다. 한국 경제를 더 어렵게 할 가능성도 있다. 가계와 기업은 외국인 포트폴리오 자금이 빠져나가려고 할 때, 정부가 시장개입을 통해 환율을 내리고 주가를 떠받치려고 하면 더 큰 위기가 도래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 경제 운용은 아무리 급하더라도 묘수보다는 기본 원칙을 그리고 단기 효과보다는 중장기 효과를 고려해야 한다. 응급처방도 기본 원칙을 벗어나지 않아야 더 큰 부작용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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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느 쪽도 환율이 왜 높은지 또는 낮은지에 대한 판단 기준이 없이 개인이나 집단의 입장에서 주먹구구식으로 환율이 많이 오르거나 내렸다고 주장할 뿐이다. 국내외 경제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환율과 같은 금융가격지표의 적정 수준을 가늠하지 못하면 공공 부문이든 민간 부문이든 경제적 판단을 그르치게 된다. 환율은 국가경쟁력이 종합적으로 반영된 결과물이다.
그런데 적정 환율 수준에 대한 기준 없이 심정적 판단에 따라 끌어올리거나 내리려고 하면 부작용이 커진다. 그렇게 되면 성장·물가·국제수지 같은 거시경제 변수에 나쁜 영향을 미쳐 경제를 불균형 상태로 몰고 가기 쉽다. 불균형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다시 균형 상태로 돌아가는 복원력이 상실되는 것이 세상 이치다. 비정상이 계속되면 비정상을 정상으로 착각하게 되는 무서운 일이 일어난다.
환율의 높낮이를 가늠하는 기초 판단자료는 실물 부문 경쟁력의 결과로 나타나는 경상수지다. 최종 판단자료는 대외 투자를 포함해 종합적 국가 경쟁력의 결과로 나타나는 국제투자대조표(IIP, International Investment Position)의 순국제투자 수지다. 자칫 혼동하기 쉬운 경상수지와 국제투자수지의 관계를 간략하게 들여다보자.
경상수지는 일정 기간 중에 발생한 국가 간 실물 부문 경제적 거래의 내역을 집계한 유량(flow) 개념의 통계다. 상품·서비스 수지, 거주자와 비거주자의 임금, 급료의 차이인 소득수지와 기부금, 무상원조 같은 이전수지를 포괄한다. 순국제투자수지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투자거래를 포함한 모든 경제적 거래의 결과인 저량(stock) 개념의 통계로 일정시점의 대외지급 능력을 나타낸다.
순국제투자수지는 일정 시점의 대외지급 능력
자본시장이 개방되지 않은 폐쇄경제를 가정하면, 경상수지가 균형을 이루는 상태에서 정해지는 시장 환율이 적정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재화와 서비스의 대외거래 결과로 나타나는 경상수지 흑자 지속은 실물 부문의 경쟁력 상승을 의미하므로 환율 하락(원화 평가절상)이 이어져야 된다. 적자 지속은 실물 부문의 경쟁력 저하를 의미하므로 환율 상승(평가절하)이 불가피하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가 시현한 무려 5000억 달러에 육박하는 경상수지 흑자를 감안한다면, 원화 환율이 적어도 1993년 수준인 800원대 이하로 떨어져야 마땅하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장기간 대규모 경상수지를 기록하고 올 9월 말 현재 3540억 달러에 이르는 외환보유액을 갖고 있으면서도 원화 절상(환율 하락)은커녕 만성적 적자시대보다 환율이 높은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는 언제 닥칠지 모를 ‘달러 부족’ 사태에 대비해 이웃 나라와 통화스와프 협정까지 맺어야 한다. 이 같은 현상들은 대외지급 능력이 겉보기와 다르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개방경제 체제에서 경상수지는 국민경제의 중간 성적표다. 포트폴리오 투자 결과를 포함하는 순국제투자수지 잔액은 최종 성적표가 된다. 중장기 환율을 좌우하는 요소는 말할 것도 없이 경제의 중간 성적인 경상수지보다는 최종 성적인 순국제투자수지 잔액이다. 국제투자대조표를 관찰하면 준비자산(외환보유액)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모든 대외금융자산(대외 투자)에서 대외금융부채(외국인 투자)를 제외한 순국제투자 잔액은 만성 적자다. 올 6월 말 현재 마이너스 110억 달러에 이른다. 국제투자대조표로 미뤄보면, 우리나라의 대외지급 능력은 충분한 여력이 없으며 현재의 원화 가치가 과대평가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가 대규모의 외환보유액를 자랑하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증권시장에 투자하기 위해 환전한 외화를 임시로 보관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다.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와는 반대로 순국제투자수지 잔액이 마이너스라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한국 경제가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를 했음을 시사한다. 실물 부문에서는 커다란 흑자를 기록했지만, 금융과 부동산, 기타 투자거래에서 그 이상의 손실을 기록했다는 얘기다. 강우량이 많았어도 저수지에 물이 차지 않은 것은 어딘가 물이 새고 있음을 의미한다. 말할 것도 없이 약삭빠른 외국인들이 한국 시장에서 막대한 수익을 실현했지만 한국인들은 외국 시장에서 엄청난 손실을 냈기 때 문이다. 믿어지지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금리·주가·환율 같은 금융가격지표가 경제 상황을 적정하게 반영하지 못하면 가치투자에 익숙한 외국인 투자자들은 수지를 맞는다. 금융가격지표들이 본질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면, 현물과 선물시장 간 또는 역내외 시장 간에 균형을 깨트린다. 실물 부문과 금융 부문의 불균형은 누군가에게는 초과 수익의 기회를 제공하고 다른 누군가에는 초과 손실의 위험을 안긴다. 예컨대, 최근 수년간 우리나라 채권시장에 핫머니가 몰린 까닭은 대내외 금리 차이와 함께 환차익까지 이중으로 노렸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이 초과 수익을 올리는 대가는 국민경제가 최종적으로 부담한다. 더구나 차익거래를 노린 외국인 투기자금 유출입을 유발시켜 금융시장은 물론 실물시장까지 교란시키는 부작용 또한 컸음을 되새겨 봐야 한다.
앞으론 남기고 뒤로는 밑진 한국 경제
이는 수출만 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며 ‘환율 주권’이라는 구호 아래 펼쳐졌던 고환율 정책의 결과다. 세계에서 가장 긴 근로시간을 기록하며 땀 흘려 일했어도 대다수 국민의 후생과 복지는 그만큼 향상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그동안의 엄청난 국제투자수지 손실을 분석해 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고환율·고물가를 무릅쓰고 벌어들인 그 많은 외화가 다 어디로 갔는지 생각해 본 일이 있는지 모르겠다.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와 국제투자수지 적자 내역을 밝히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정부 개입에 외국인은 환호
그런데 외국인 투자자들이 보유 주식과 채권을 팔아 떠나려 할 때, 정부가 허둥지둥 내놓는 부양 대책은 이중삼중으로 국민경제를 멍들게 할 수 있다. 위기 상황에서 증시 부양조치는 외국인들이 보유한 주식이나 채권을 국민연금 같은 연기금에 비싼 값에 떠넘기는 수단을 제공하는 일이다. 그리고 사실상 모자라는 외화를 풀어 원화 환율 상승을 억제하는 조치는 보유 외환을 헐값에 팔아넘기는 어리석은 일이다.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증시 부양이나 환율 안정 조치는 외국인이나 특정인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하지만 결국 국민경제를 멍들게 하는 일임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핫머니가 대량으로 빠져나가면 당장은 금융시장 혼란으로, 기업 자금 조달 곤란과 부의 효과 감소로 소비 둔화 같은 어려움이 닥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대외지급 능력이 보다 건실해져 급기야는 불안심리가 해소되고 중장기 주가와 환율은 오히려 탄력을 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우리나라가 상당기간 엄청난 경상수지 흑자를 이룩하고도, 울며 겨자 먹기로 체결한 통화스와프 협정에 매달릴 필요도 없어진다. 일시적으로 벌어질 신용경색 상황은 채무보증 같은 간접금융 기능을 확충해 시장의 충격을 줄일 수 있다.
이 같은 시장 기능을 무시하고 외국인들이 빠져나가려는 시점에서 섣불리 시장에 개입하면 그들에게 우산을 씌어 주고 안전한 탈출구를 제공하는 것과 다름없다. 외국인 투매로 추락하고 있는 주가를 떠받치고, 치솟는 환율을 억누르면 외국 투자자들은 한국 시장에서 노다지로 벌어들인 돈을 힘들이지 않고 빼내 갈 수가 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환율 방어선을 달러당 850원에서 1300원까지 후퇴하며 환율을 억지로 누르려다 얼마 되지 않는 외화를 탕진하고 백기를 들었다. 경제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그저 대증적 묘수만 찾다가 앞을 내다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도 주가와 환율을 안정시키겠다며 쓸데없이 힘을 낭비했다.
ATM 코리아 오명 벗으려면
지금 꿈틀거리는 국제 금융시장 난기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하고 확대될지 아무도 모른다. 한국 경제를 더 어렵게 할 가능성도 있다. 가계와 기업은 외국인 포트폴리오 자금이 빠져나가려고 할 때, 정부가 시장개입을 통해 환율을 내리고 주가를 떠받치려고 하면 더 큰 위기가 도래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 경제 운용은 아무리 급하더라도 묘수보다는 기본 원칙을 그리고 단기 효과보다는 중장기 효과를 고려해야 한다. 응급처방도 기본 원칙을 벗어나지 않아야 더 큰 부작용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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