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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정장의 변천사 - 더 가볍고 더 산뜻하게

남성 정장의 변천사 - 더 가볍고 더 산뜻하게

1960년대 뉴욕 광고업계를 배경으로 한 TV 드라마 ‘매드멘’ 시리즈는 정장을 차려 입은 남자 주인공들의 멋진 모습으로 정장의 인기몰이에 한몫 했다. 사진은 브룩스 브러더스의 전통적인 정장을 입은 주인공 돈 드레이퍼(존 햄).
우선 남성 정장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라는 점부터 고백해야겠다.

난 스포츠 전문 작가이며 편안한 스포츠웨어를 즐겨 입는다. 내 옷장 속에 있는 정장은 네 벌도 안 된다. 유감이다. 정장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성들이 입는 최고로 멋진 의상이기 때문이다. 영화배우 케리 그랜트, 블루스 뮤지션 제이크와 엘우드 블루스, 코미디언 폴 루벤스가 연기한 코믹캐릭터 피-위 허먼 등이 정장을 즐겨 입었다. 정장은 당신을 영화 <오션스 일레븐> 에 나오는 조지 클루니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다. 이와 달리 바람막이와 카키바지는 영화 <시리아나> 에 나오는 클루니 같은 분위기를 풍기게 한다. 스위스계 프랑스인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정장은 사람이 들어가 사는 기계이며 편안한 갑옷”이라며 “지금까지 고안된 패션의상 중 가장 성공적이고 오래 가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정장은 멋지지만 때로는 너무 덥게 느껴질 수도 있다.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오래된 남성 의류업체 브룩스 브러더스가 ‘쿨슈트(Cool Suit)’ 라인을 선보인 이유다. “보통 정 장보다 무게가 30% 덜 나가며 통기성이 아주 좋다”고 브룩스 브러더스의 홍보담당자 데이너 실러가 말했다. 실러는 TV 드라마 ‘매드멘’의 주인공 돈 드레이퍼가 입고 나오는 정장을 코디네이트하는 임무도 맡았다. 드레이퍼의 의상은 큰 인기를 얻었다. “정장은 당신이 일을 잘 처리할 준비가 돼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크레이 그 토머스와 함께 TV 시트콤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How I Met Your Mother)’를 공동 제작한 카터 베이스의 말이다. 이 시트콤에는 정장 입기를 매우 좋아하는 캐릭터 바니스틴슨이 나온다. “정장은 자신이 하는 일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인상을 준다. 취업 인터뷰를 하러 갈 때나 교회에 갈 때 사람들은 정장을 입는다. 두 경우 모두 그곳에서 만날 사람들에게 자신이 빈둥거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요즘 남성들 사이에 정장이 인기다. USA 네트워크의 법정 드라마 ‘슈츠(Suits)’ 시즌4가 방영 중인 TV에서 특히 그렇다. 이 드라마의 작가 겸 제작자인 아론 코시(47)는 지금은 반바지와 샌들 차림의 전형적인 ‘할리우드가 이’다. 하지만 한때는 매일 정장을 입고 출퇴근하는 뉴욕의 헤지펀드 매니저였다. “대학 시절 봄방학 때 영화 <월 스트리트> (1987)를 봤다”고 코시는 말했다. 그는 “그 영화를 보면서 거기 나오는 주인공처럼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덧붙였다. 영화의 주인공은 날렵한 정장을 차려 입은 남자였다.

코시는 애당초 법률회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드라메디(dramedy, 코미디가 곁들여진 TV 드라마) ‘슈츠’를 헤지펀드 소개용으로 집필했다. “하지만 ‘슈츠’에는 사무실에서 입는 ‘정장’이라는 의미와 ‘법률 소송(lawsuits)’이라는 이중적 의미가 있었다”고 그가 말했다. 또 올 봄 미국인들은 매주 일요일 밤 ‘매드멘’(시즌 7-1부)에서 돈 드레이퍼(존 햄)와 로저 스털링(존 슬래터리)이 브룩스 브러더스의 정장을 차려 입고 나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여성 시청자들은 그들의 멋진 모습에 밤잠을 못 이뤘다. 그런가 하면 코미디언 존 멀레이니는 자신의 이름을 딴 폭스 TV 의 시트콤 ‘멀레이니’에서 늘 정장을 입고 연기한다. 멀레이니는 “변호사인 내 아버지는 직장에 갈 때 정장을 입는다”며 “내가 이 프로그램에서 정장을 입는 이유는 이곳이 내 일 터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장은 사람이 들어가 사는 기계”
잘생긴 남자가 ‘새빌로우(Savile Row, 맞춤 양복으로 유명한 런던의 거리)’에서 정장을 입은 모습은 매혹적이다. 케리 그랜트는 맞춤 양복만 입었으며 영화에 출연할 때도 빌리거나 협찬 받은 의상이 아니라 자신의 옷만 입기로 유명했다. 1959년 알프레드 히치코크 감독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에서는 경량 소모사로 짠 청색과 회색 격자 무늬 원단의 정장을 입고 나왔다. 이 옷은 그랜트를 제치고 영화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눈길을 끌었다.

뉴욕 패션스쿨(FIT)의 스콧 스토다트에 따르면 그랜트가 이 작품에서 끝까지 이 양복 한 벌만 입고 나오는건 우연이 아니다. 악당과 정부 요원들에게 쫓기는 주인공이 다른 남자들 속에 섞여서 눈에 잘 띄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스토다트는 이보다 몇 년 앞서 나온 영화 <회색 양복의 사나이> (1956)에 대해서도 “회색 양복의 의미는 남들과 구분이 안 되는 평범함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1960년대 말 정장은 ‘고지식한 사람들(squares)’의 옷이 됐다. 1970년대에는 ‘레저 슈트(leisure suit, 같은 천으로 만든 바지와 셔츠로 된 캐주얼복)’가 유행했다. ‘여가’를 뜻하는 레저와 ‘정장’을 뜻하는 슈트의 결합은 의상의 천치들을 위한 모순어법(oxymoron, 의미상 양립할 수 없는 말을 함께 사용하는 수사법)이다.

1980년대에는 1950년대 할리우드의 또 다른 주연 남자 배우 한 명이 정장을 사람들 옷장속의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로널드 레이건이다. 레이건은 언제나 말쑥한 차림새를 유지했다. 대통령 재임 당시 그의 높은 인기는 <월 스트리트> 를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영화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1990년대에 닷컴 골드러시가 시작되면서 버튼다운(깃 끝을 단추로 채워 고정시키게 돼 있는) 셔츠 등 단정한 옷차림으로 유명한 금융업계 종사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자본주의의 거물들이 갑자기 검정색 터틀넥 셔츠나 모자 달린 T셔츠 등 독특한 복장으로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브룩스 브러더스의 글로벌 판촉 부사장 가에타노 볼리노는 “2001년 브룩스 브러더스에 처음 왔을때 정장 사업은 위축돼 있었는데 원래의 위치로 되돌려놓는 게 우리의 목표”였다며 “정장을 입지 않으면 단정하지 못하다고 느끼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고 말했다.

2004년부터 20 11년까지 HBO의 ‘앙투라지(Entourage)’보다 더 대담한 TV 프로는 없었다. 남성들을 위한 ‘섹스 앤 더 시티’라고 부를 만한 드라마다. 이 드라마의 부차적 줄거리 중 하나는 할리우드 스타 빈센트 체이스의 절친이자 매니저인 에릭 ‘E’ 머피와 변덕스럽지만 가끔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 영화감독 빌리 월시의 삐걱거리는 관계다. 월시는 예술과 상업성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E를 경멸한다. ‘예술은 타협을 모른다’고 믿는 월시는 E를 ‘슈트’라고 부른다. 한 에피소드에서는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슈츠는 형편없어 (SUITSSUCK)’라고 쓰인 T셔츠를 입고 그를 조롱했다.
 프랑스 혁명은 패션 역사의 전환점
톰 브라운의 ‘스키니 슈트’. 헐렁한 기존의 남성 정장에 불만을 품은 브라운은 독자적인 스타일을 개발해 젊은이들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여기서 ‘슈트’는 경멸하는 의미로 쓰인 게 분명하다”고 코시는 말했다. 당시는 코시가 금융 관련 일자리와 핀스트라이프 정장을 떨쳐버리고 TV 드라마 시리즈 ‘내 사랑 레이몬드’ 촬영장의 인턴으로 커피 심부름을 할 때였다. 어떻게 보면 정장 생활에 대한 코시의 저항은 그가 드라마 ‘슈츠’를 제작하게 된 밑바탕이 됐다. “이 용어에는 ‘당신은 회사원이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남성 패션 월간지 GQ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짐 무어는 이렇게 말했다. “결국 중요한건 ‘정장은 유니폼’이라는 사실이다. 매일 회사 생활에 나설 때 입는 갑옷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현대 정장은 저항에서 탄생했다. 사실 다소 역사적인 저항이다. <패션의 역사(a history of fashion)> 의 세 저자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은 패션 역사의 진정한 전환점이었다”고 썼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 이후 호화로운 옷차림은 단두대 처형을 부르는 좋은 방법이었다. 세계 패션의 중심인 프랑스에서 오트 쿠튀르의 이 극단적인 변화는 영국에까지 파급효과를 미쳤다. 나중에 조지 4세 영국 국왕이 된 웨일스공은 당시 이튼 스쿨에서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한 친구를 사귀었다. 카리스마 있는 그 친구는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었지만 조지 4세의 결혼식에서 신랑 들러리를 설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 그는 세계 최초의 메트로섹슈얼(도시에 살면서 패션·쇼핑 등에 관심이 많은 이성애자 남자)이자 현대 정장의 아버지인 조지 브라이언 ‘보’ 브러멜이다.

1778년생인 브러멜은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명문가 출신(high-born)’이라고 불릴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잘 생기고 사람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으며 몸단장에 탁월한 감각을 나타냈다. 그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21세라는 젊은 나이에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뒤 호화로운 생활로 주목을 끌었다. 사람들이 목욕을 자주 하지 않던 당시 브러멜은 매일 우유와 물로 목욕을 했다. 그는 또 몸의 털을 면도하고 피부의 각질을 벗겨냈다. 그의 아침 세정식은 최장 5시간까지 걸렸다. 극소수의 특권층이 그의 드레싱 룸에 초대돼 그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다.

브러멜은 근대에 들어 마음 내키는 대로 옷을 입은 최초의 남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입을 옷을 직접 디자인했다. 일례로 그는 당시 남자들이 입던 반바지 대신 긴 바지를 입었다. 긴 바지에 조끼와 코트를 갖춰 입는 패션을 유행시켰다. 그리고 극도의 쾌락을 추구하는 생활을 했다.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탄생시킨 비극적인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는 브러멜을 모델로 했다. 브러멜은 세기말적 퇴폐와 향락에 젖은 파티를 즐겼지만 패션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진지했다. 그는 “길 가던 사람들이 뒤돌아볼 정도면 옷을 잘 입은 게 아니다”고 말했다. 또 “너무 경직되거나 몸에 꼭 끼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유행을 따른 옷을 입었다는 표시”라고 덧붙였다.

브러멜은 이전에 어느 누구도 하지 않았던 독창적인 방식으로 몸단장을 했다. 그의 방식을 따르는 패션 제자들이 많이 생겼다. 브러멜이 영국 궁정의 남녀들을 매혹시키는 동안 조면기(면화에서 솜과 씨를 분리하는 기계, 1793)와 재봉틀(1829)이 발명됐다. 19세기 초 미국 남부에서는 노예제도 덕분에 면 생산이 1000% 이상 증가해 직물 제조비가 말도 안 될 정도로 낮아졌다.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라도 좋은 옷을 사 입을 수 있게 됐다. 19세기 초 ‘신사복(lounge suit)’이라고 불리는 남성 정장이 나왔고 이것이 곧 오늘날의 정장(suit)이다.
지금도 여전히 고급 남성 맞춤복의 중심지로 통하는 런던의 새빌로우도 이때 탄생했다. 대서양 건너편에서는 1818년 헨리 샌드 브룩스가 뉴욕 맨해튼의 로워 이스트 사이드에 미국 최초의 남성복 전문점을 열었다. 그의 세 아들이 상호를 브룩스 브러더스로 바꿨으며 이 회사는 오늘날 6대륙에 250여 개의 매장을 두고 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44명 중 현직 오바마 대통령을 포함해 39명이 브룩스 브러더스의 정장을 입었다. 에이브러 햄 링컨은 취임식 때와 암살당할 당시에 이 회사의 정장을 입었다. “우리는 최고 수준의 전통적인 회사”라 고 볼리노가 말했다. “하지만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정장이 헐렁한 스타일밖에 없었다. 주 고객층이 50세 남성이었다.”

이때쯤 톰 브라운이 등장한다. 1980년대 중반 노터 데임대(미국 인디애나주 소재)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던 브라운은 거의 매일 슈트를 입었다. 스윔슈트(swimsuit, 수영복)였다. 대학 대표 수영팀 선수였던 그는 군살 없는 탄탄한 몸매를 자랑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 비즈니스 정장을 입었을 때 마치 낡고 덩치 큰 뷰익 자동차를 운전하는 기분이었다. 브라운은 “시중에 나와 있는 정장은 우리 아버지 세대가 입던 스타일이었다”며 “그래서 그 옷을 입기 싫었다”고 말했다.

2002년 랠프 로렌의 패션 디렉터 겸 모델로 활동하던 브라운은 보 브러멜의 정신을 구현했다. 기존의 남성 정장에 불만을 품은 그는 독자적인 스타일을 개발했다. 그는 “9개월 정도 시간이 소요됐다”고 말했다. 바로 그가 원하던 스타일이었다. 뉴욕 퀸스의 한 재단사와 함께 정장 다섯 벌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스키니 슈트(Skinny Suit)’가 탄생했다.

곧 브라운의 친구와 지인들이 어디 가면 그런 정장을 구할 수 있느냐고 묻기 시작했다. 얼마 뒤 브라운은 뉴욕 트리베카 지역에 매장을 열었다. ‘최고의 스타일을 몸에 잘 맞게(a classic ideal with a fitter proportion)’라는 브라운의 의상 철학은 그를 남성 패션계에서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로 만들어줬다. 브라운의 아버지가 정장을 사 입던 브룩스 브러더스는 요즘 톰 브라운 정장 라인을 구비하고 있다.
 가벼운 원단에 단순한 디자인
최근 브룩스 브러더스는 유행을 선도하는 업체들로부터 구애를 받고 있다. 스케이트보 더 들을 위한 의상 등 스트리트 패션으로 큰 인기를 얻은 슈프림은 고리타분한 브룩스 브러더스에 정장 아이템의 제휴를 제안했다. 볼리노는 “그들은 검정색과 흰색의 시어서커(물결 무늬가 있는 얇은 무명천) 정장을 원했다”며 “협상을 통해 짙은 회색과 흰색으로 조정했다”고 말했다. 슈프림-브룩스 브러더스의 스케이터 라인은 큰 인기를 얻어 출시 후 몇 주 안에 매진됐다.

브룩스 브러더스는 이제 ‘쿨슈트’와 ‘쿨러슈트(cooler suit, ‘더 멋진 정장’이라는 뜻)’를 모두 갖추고 있다. 쿨슈트는 원단이 가벼울 뿐 아니라 디자인도 매우 단순하다. 영화 <앵커맨> 의 주인공론 버건디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양복의 안감 8분의 3을 잘라냈다. 쿨슈트의 가격은 698달러로 보통 브룩스 브러더스의 정장보다 약간 더 비싸다. 옷감은 더 적게 드는데도 말이다. 어차피 패션이란 그런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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