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적인 아이러니, DIY 문신
영구적인 아이러니, DIY 문신
잉크 디자인을 이용한 피부 장식은 오랜 전통을 가진 인간의 관습이다. 1991년 알프스에서 발굴된 ‘얼음인간 미라 외치(Ötzi the Iceman)’는 전신에 50개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근대적인 피부 아트는 미국에서 시작됐다. 1891년 토마스 에디슨의 전동 조각 펜을 개조해 문신 작업이 전동화됐다. 하지만 약 한 세기 동안 재봉 기계나 다름 없었다. 1초에 80~150번 피어싱을 해서 피부 속에 잉크를 주입했다.
문신은 한때 선원·범죄자·마오리족의 문화였다. 서방의 반문화가 그 관습을 받아들여 현대화했다. 지난 한 세대 동안 기술혁신으로 문신의 가능성이 크게 달라졌다. 비가시광선(자외선과 적외선 등)에서만 보이는 동화상 야광 이미지들로 이뤄지는 액정 디자인, 그리고 전자파로 지울 수 있는 잉크가 등장했다. 한편 서방세계 유행 특구의 또 다른 구석에선 ‘DIY 문신(stick and poke, 바늘과 잉크를 이용해 직접 새기는 문신)’이 유행한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가장 초보적인 방식이다. 원시적인 수작업 문신으로 유행의 최첨단 선도자 다수를 ‘외 치 미라’와 별반 다를 바 없이 만들었다. 인터넷에서 40달러 정도에 DIY 문신 세트를 구할 수 있다. 내게는 전혀 새로울 게 없다. 예전에 그런 문신 작업과 그 조잡한 결과 모두 여러번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교도소 밖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감방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기술을 숙련할 시간이 많다. 사람들이 모터만 달려 있으면 무엇으로든 문신 총을 만든다. 이런 까닭에 VCR은 모두 케이스 안에 넣고 자물쇠를 걸어 둔다. 망가진 카세트 데크조차 반납해야 한다. 하지만 반납할 무렵엔 어느샌가 모터가 없어지고 비슷한 무게의 뭔가로 대체된다.
그러나 카운티 교도소에선 ‘DIY’ 방식이 일반적이다. 재봉바늘, 실 그리고 잉크 비슷한 재료로 피를 보며 부리나케 작업을 해치운다. 그런 작업 수십 건에서 나는 망보는 역할을 했다. ‘아티스트’마다 나름의 처방이 있지만 공통분모는 탄소다. 체스 말이나 기타 플라스틱을 태울 때 그 위에 마분지 조각을 갖다 댄다. 마분지에서 검댕을 긁어내 보통 샴푸와 타액을 포함하는 독자적인 혼합물과 섞는다. 그 결과는 사람들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삐뚤빼뚤한 선, 불분명한 글자, 그리고 만인의 감염이다. 하지만 분명 영구적이다.
니콜 웨스트는 Stickand Poke TattooKit.com의 주인 이다. 친절하게도 문신 세트 하나를 내게 보내줬다. 40달러짜리 제품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볼 수 있었다. 사이트를 개설한 지 불과 2년. 정통성을 찾는 최근의 유행을 공략하고 있다. 그 세트는 미국 전역 심지어 멀리 말레이시아까지 팔려나갔다. 그러나 웨스트는 고객들이 모두 어떤 특정한 유형의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DIY 문 신을 하는 사람은 종종 어떤 대의를 주장하는 운동가들 인 경우가 많다. 완전 채식주의자(vegans), 사회정의 광신자, 동성애 전사 등이다. 15세 청소년으로 소년원에서 재봉바늘과 펜 잉크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 세트는 옛날 황금기의 공예품으로 꾸며졌다. 바늘 2개, 약간의 잉크, 다량의 거즈 등 빈약한 내용물을 정성들인 포장으로 보완한다. 사용법이 적힌 종이는 직접 칼로 잘라 목판 인쇄한 듯하다. 추천 디자인(단순해야 한다)은 복고풍 닻과 하트다. 그리고 잉크 소재의 완전 채식주의를 보증한다는 사실이 많은 구매자들에게 중요한 문제다. 대체로 고객 중에 소년원 수감자들은 거의 없다. 대다수가 대졸 학력자다. 하지만 감방 스타일의 문신을 몸에 새긴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어필한다. 그들은 유행을 앞서간다. DIY 문신은 아이러니의 표현이다. 수형자들은 문신을 좋아한다. 따라서 처음 입소 절차를 밟을 때 문신이 없다고 털어놓았더니 거짓말한다고 여겨 간수들이 나를 발가벗겼다. 출판 저작권 에이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중 2년이 채 안 되는 헤로인 중독으로 주머니 칼을 들고 얼뜨기 강도 짓을 했다. 2003년 당시 신문들은 나를 “미안해 하는 강도(the apologetic bandit)”라고 불렀다. 강도 짓을 후회하는 빛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판사는 내게 10년 형을 선고했다. 철창 신세를 지던 10년 동안 12개 교도소를 거쳤다. 문신이 없는 내 피부는 내가 얼마나 이질적인 존재였는지 말해주는 무수한 사례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일부 수형자는 범죄조직의 요구로 문신을 새겨 넣는다. 나머지는 해골·용·단검으로 더 터프한 인상을 주려 한다. 그러나 더 개인적이고 가슴 뭉클한 인간적인 차원에서 수형자들은 외모 변형을 통해 인간성 몰수를 거부한다. 그들은 창고에 보관되는 물건 취급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인간과 문신 그 자체가 되려 한다. 감방 수칙 위반으로 엄한 처벌을 받더라도 말이다. 사람들은 수감의 본질을 이루는 인간성 상실에 싸우기 위해 문신을 이용한다. 감방 입소 절차는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정체성의 외면적 상징을 철저히 벗겨낸다. 먼저 옷을 벗기고 죄수복으로 갈아 입힌다. 이어 머리를 면도칼로 빡빡 민다. 끝으로 번호가 주어진다. 그것이 바로 자신에게 남겨진 정체성이다. 번호와 몸뚱이. 번호는 바꿀 수 없다. 보디빌딩과 문신, 심지어 기본적인 피어싱도 이 같은 정체성 강탈에 대한 작은 반항이다. 어떤 아이러니도 없다.
현대적인 문신은 기본적으로 뉴욕의 바워리 거리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그 기법은 1961~1997년 뉴욕시에선 불법이었다. 세인트마크스 플레이스에 자리잡은 ‘펀 시티 태투스’는 1976년에 문을 열었다. 20년 동안 반 불법적으로 영업해 왔다는 의미다. 문 앞에 잠재 고객이 전화를 거는 부스가 있었다. 검문을 통과하면 커피 숍을 통해 뒤편으로 들어가 아티스트를 만난다. 요즘엔 그냥 안으로 들어가 멜리사 가르시아에게 DIY 키트에 관해 물으면 된다. “1997년 타투샵이 합법화됐기 때문에 DIY 키트로 직접 문신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고 그녀가 말했다. “직접 하는 문신은 쿨해 보이기는커녕 정통성과는 상극이다. 오히려 가식적이다.” 힙스터(인디 음악과 비주류 패션 취향을 좇는 도시 거주 밀레니엄 세대) 하위문화를 비난하는 일반적인 주장이다. 그만한 여유가 생겼을 때 팹스트 블루 리본 맥주를 마신다면 그것도 가식일까? 또는 가볍고 세련된 프레임 대신 두터운 범생이 안경을 고른다면? 아이러니의 명분으로 한다면 가식적이 아니다. 물론 DIY 문신의 경우에는 그 아이러니가 영구적이다.DIY 문신은 정확성이 떨어지는 기술이다. 몇 년 전 뉴욕주 북부에 있는 그린헤이번 교도소 마당에서 ‘재봉바늘과 실’을 이용한 문신 작업 중 망을 봤다. ‘아티스트’ 태투 밥은 도축업자 출신으로 돈만 주면 누구에게나 어떤 문신이든 해줬다. 고가의 마약복용 습관이 있었으며 2연속 종신형(two life sentences)을 받았다. 블러즈 갱단의 한 조직원이 목 뒤에 글자를 새겨 넣고 있었다. 밥은 들킬까 두려워 몹시 서두르고 있었다. 이 작업을 하다가 걸리면 1년 독방신세를 져야 한다. 작업의 대가는 담배 2갑이었다. 젊은 조직원이 내게 어때 보이냐고 물었다. 아주 근사하다고 말해줬다. 하지만 내 목소리에 주저하는 느낌이 있었던지 어떤 글자냐고 재차 물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알 길이 없었다. 다행히 밥이 때맞춰 입 모양으로 ‘G’라고 알려줬다. 거짓말로 그 친구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그의 친구들이 진실을 말해줄 때까지는 말이다.
나는 아내와 DIY 키트를 사용해 봤다. 내 안의 목소리는 이디시어(유대인 언어) 억양으로 하지 말라고 속삭였다. 세계의 많은 문화가 종교적 의미의 상징으로 문신을 이용해 왔다. 문신의 영속성은 영적인 의미로 충만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다른 형태의 외모 변형과 함께 문신을 극히 혐오한다. 유대 정교회에선 하느님 자신이 선택한 사람의 몸에 아무런 장식이 없기를 바란다고 믿는다. 따라서 수세기 동안 잉크로 외모가 변형된 나 같은 사람은 유대인 공동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그와 같은 금지령은 1945년 수정돼야 했다. 팔에 독일 숫자가 새겨진 강제수용소 생존자들 때문이었다. 오늘날의 자가 문신한 유대인들은 이 같은 냉혹한 역사의 수혜자들이다. 문화적인 공기도 바뀌었다. 근대 서방 문화에선 문신이 자기 표현의 한 형태로 받아들여졌다. 더는 범죄나 밑바닥 삶을 연상시키지 않는다. 문신이 더는 반항적이지 않다면 어쩌면 저질 문신(bad tattoos, DIY 작업 결과인 조잡한 문신)이 그런 기능을 할지도 모른다.
콜비 벡이 자신의 자가 문신 사진을 내게 보냈다. 그런 작업을 하게 된 배경 설명을 덧붙였다. “DIY 방식으로 직접 문신할 필요가 있었다. 돈이 많이 드는 유명 아티스트나 작업의 품질은 중요하지 않았다. 세상 속의 내 자화상을 뛰어넘으려는 목적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로 자신을 평가했었다. 터무니 없는 소리 같지만 사실이다. 마침내 내 앞에 다른 사람을 두지 않게 됐을 때 내가 원하는 어떤 문신이든 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을 나 말고 누가 더 잘 새겨 넣겠는가? 사람들이 동네 문신 시술소를 찾아갈 능력이 있으면서도 정통성이나 길거리 유행감각(street cred)을 추구해 DIY 방식을 선택한다고 본다. 내 자신을 말해주는 스토리이기도 하다.” 그 결과는 ‘베키’가 안에 쓰여진 불안정해 보이는 하트다. 뉴욕의 라이커스 아일랜드 교도소에서 쉽게 할 수 있었을 성싶다.DIY 문신을 하는 사람들은 완전 채식주의자 잉크와 DIY 정신을 강조한다. 자신들이 교도소에서 새겨 넣었다고 오인 받을 만한 문신을 하고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필시 의식할 듯하다. 그것을 오히려 즐길지도 모른다. 자가 문신의 본질은 정통성이다. 필시 벡 같은 사람에게는 해방감도 주는 듯하다. 반면 프로들은 그것을 가식적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요즘은 보이지 않는 인터넷이 사방 천지에 소용돌이 치는 시대다. 아바타와 디지털화된 존재가 세상 풍경을 이룬다. 고통과 피를 수반하는 약간의 원시성은 우리가 인간임을 깨닫는 데 필요한 요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매일 보는 일상적인 모습도 아니다. 바늘로 자신의 피부를 찔러 잉크를 주입하는 특별한 유의 자의식을 가진 모험적인 호모 사피엔스다. 아름다움을 원하는 건 아니다. 그건 돈으로 살 수 있다. 스스로 정통성을 부여한다. 영구히.
많은 기회를 흘려 보낸 뒤 이제 나도 문신자 대열에 합류했다. 20년 전 맨하튼 동남부에 있는 내 아파트 거실에서 ‘문신 파티’를 열었다. 펑크 로커들이 서로 문신을 새겨줬다.당시에는 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했다. 감방 생활 10년 동안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내 판화집(아트북 출판사 타센 펴냄)이 다른 사람들의 모델로 사용될 때도 ‘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전의 어느 날 밤 아내가 바늘을 집어 들었을 때 마침내 문신을 받아들이고 아내에게도 똑같이 새겨줬다. 지금은 우리 발에 짝을 이루는 ‘커플’ 점 문신을 갖고 있다. 배경을 모르면 거의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작다. 그러나 우리 사이에 둘 만의 비밀 의식이 치러졌다. 우리의 점 문신을 보여줄 때 우리는 반어적으로 세련됨을 과시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풍자는 포즈에 있다. 우리는 이제 결혼반지와는 달리 변기 속에 쓸려갈 수 없는 뭔가를 공유한다. 아이러니는 눈 녹듯 사라지고 혈거인과 그의 짝이 모습을 드러낸다.
‘얼음인간 외치’의 50개 문신은 그에게는 모두 뭔가를 의미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게 뭔지 결코 모를 것이다. 갱단 조직원 목 뒤의 흐릿한 글자도 의미가 있었다. G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나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아내와 내 왼발의 커플 점 문신도 역시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우리는 안다. 바늘 아래선 문명의 화장이 벗겨지고 민낯이 드러난다. 교도소 마당에서 스스로 바늘을 찌르든 아내가 바늘을 휘두를 동안 어금니를 깨물고 있든 마찬가지다. 정통성을 좇지 않고 우리는 그것을 성취했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완벽한 방식인지 모른다. 우리는 너무 애쓰지 않았고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신은 한때 선원·범죄자·마오리족의 문화였다. 서방의 반문화가 그 관습을 받아들여 현대화했다. 지난 한 세대 동안 기술혁신으로 문신의 가능성이 크게 달라졌다. 비가시광선(자외선과 적외선 등)에서만 보이는 동화상 야광 이미지들로 이뤄지는 액정 디자인, 그리고 전자파로 지울 수 있는 잉크가 등장했다. 한편 서방세계 유행 특구의 또 다른 구석에선 ‘DIY 문신(stick and poke, 바늘과 잉크를 이용해 직접 새기는 문신)’이 유행한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가장 초보적인 방식이다. 원시적인 수작업 문신으로 유행의 최첨단 선도자 다수를 ‘외 치 미라’와 별반 다를 바 없이 만들었다. 인터넷에서 40달러 정도에 DIY 문신 세트를 구할 수 있다. 내게는 전혀 새로울 게 없다. 예전에 그런 문신 작업과 그 조잡한 결과 모두 여러번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교도소 밖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감방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기술을 숙련할 시간이 많다. 사람들이 모터만 달려 있으면 무엇으로든 문신 총을 만든다. 이런 까닭에 VCR은 모두 케이스 안에 넣고 자물쇠를 걸어 둔다. 망가진 카세트 데크조차 반납해야 한다. 하지만 반납할 무렵엔 어느샌가 모터가 없어지고 비슷한 무게의 뭔가로 대체된다.
그러나 카운티 교도소에선 ‘DIY’ 방식이 일반적이다. 재봉바늘, 실 그리고 잉크 비슷한 재료로 피를 보며 부리나케 작업을 해치운다. 그런 작업 수십 건에서 나는 망보는 역할을 했다. ‘아티스트’마다 나름의 처방이 있지만 공통분모는 탄소다. 체스 말이나 기타 플라스틱을 태울 때 그 위에 마분지 조각을 갖다 댄다. 마분지에서 검댕을 긁어내 보통 샴푸와 타액을 포함하는 독자적인 혼합물과 섞는다. 그 결과는 사람들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삐뚤빼뚤한 선, 불분명한 글자, 그리고 만인의 감염이다. 하지만 분명 영구적이다.
니콜 웨스트는 Stickand Poke TattooKit.com의 주인 이다. 친절하게도 문신 세트 하나를 내게 보내줬다. 40달러짜리 제품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볼 수 있었다. 사이트를 개설한 지 불과 2년. 정통성을 찾는 최근의 유행을 공략하고 있다. 그 세트는 미국 전역 심지어 멀리 말레이시아까지 팔려나갔다. 그러나 웨스트는 고객들이 모두 어떤 특정한 유형의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DIY 문 신을 하는 사람은 종종 어떤 대의를 주장하는 운동가들 인 경우가 많다. 완전 채식주의자(vegans), 사회정의 광신자, 동성애 전사 등이다. 15세 청소년으로 소년원에서 재봉바늘과 펜 잉크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 세트는 옛날 황금기의 공예품으로 꾸며졌다. 바늘 2개, 약간의 잉크, 다량의 거즈 등 빈약한 내용물을 정성들인 포장으로 보완한다. 사용법이 적힌 종이는 직접 칼로 잘라 목판 인쇄한 듯하다. 추천 디자인(단순해야 한다)은 복고풍 닻과 하트다. 그리고 잉크 소재의 완전 채식주의를 보증한다는 사실이 많은 구매자들에게 중요한 문제다. 대체로 고객 중에 소년원 수감자들은 거의 없다. 대다수가 대졸 학력자다. 하지만 감방 스타일의 문신을 몸에 새긴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어필한다. 그들은 유행을 앞서간다. DIY 문신은 아이러니의 표현이다.
저질 문신의 미학
일부 수형자는 범죄조직의 요구로 문신을 새겨 넣는다. 나머지는 해골·용·단검으로 더 터프한 인상을 주려 한다. 그러나 더 개인적이고 가슴 뭉클한 인간적인 차원에서 수형자들은 외모 변형을 통해 인간성 몰수를 거부한다. 그들은 창고에 보관되는 물건 취급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인간과 문신 그 자체가 되려 한다. 감방 수칙 위반으로 엄한 처벌을 받더라도 말이다. 사람들은 수감의 본질을 이루는 인간성 상실에 싸우기 위해 문신을 이용한다. 감방 입소 절차는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정체성의 외면적 상징을 철저히 벗겨낸다. 먼저 옷을 벗기고 죄수복으로 갈아 입힌다. 이어 머리를 면도칼로 빡빡 민다. 끝으로 번호가 주어진다. 그것이 바로 자신에게 남겨진 정체성이다. 번호와 몸뚱이. 번호는 바꿀 수 없다. 보디빌딩과 문신, 심지어 기본적인 피어싱도 이 같은 정체성 강탈에 대한 작은 반항이다. 어떤 아이러니도 없다.
현대적인 문신은 기본적으로 뉴욕의 바워리 거리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그 기법은 1961~1997년 뉴욕시에선 불법이었다. 세인트마크스 플레이스에 자리잡은 ‘펀 시티 태투스’는 1976년에 문을 열었다. 20년 동안 반 불법적으로 영업해 왔다는 의미다. 문 앞에 잠재 고객이 전화를 거는 부스가 있었다. 검문을 통과하면 커피 숍을 통해 뒤편으로 들어가 아티스트를 만난다. 요즘엔 그냥 안으로 들어가 멜리사 가르시아에게 DIY 키트에 관해 물으면 된다. “1997년 타투샵이 합법화됐기 때문에 DIY 키트로 직접 문신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고 그녀가 말했다. “직접 하는 문신은 쿨해 보이기는커녕 정통성과는 상극이다. 오히려 가식적이다.” 힙스터(인디 음악과 비주류 패션 취향을 좇는 도시 거주 밀레니엄 세대) 하위문화를 비난하는 일반적인 주장이다. 그만한 여유가 생겼을 때 팹스트 블루 리본 맥주를 마신다면 그것도 가식일까? 또는 가볍고 세련된 프레임 대신 두터운 범생이 안경을 고른다면? 아이러니의 명분으로 한다면 가식적이 아니다. 물론 DIY 문신의 경우에는 그 아이러니가 영구적이다.DIY 문신은 정확성이 떨어지는 기술이다. 몇 년 전 뉴욕주 북부에 있는 그린헤이번 교도소 마당에서 ‘재봉바늘과 실’을 이용한 문신 작업 중 망을 봤다. ‘아티스트’ 태투 밥은 도축업자 출신으로 돈만 주면 누구에게나 어떤 문신이든 해줬다. 고가의 마약복용 습관이 있었으며 2연속 종신형(two life sentences)을 받았다. 블러즈 갱단의 한 조직원이 목 뒤에 글자를 새겨 넣고 있었다. 밥은 들킬까 두려워 몹시 서두르고 있었다. 이 작업을 하다가 걸리면 1년 독방신세를 져야 한다. 작업의 대가는 담배 2갑이었다. 젊은 조직원이 내게 어때 보이냐고 물었다. 아주 근사하다고 말해줬다. 하지만 내 목소리에 주저하는 느낌이 있었던지 어떤 글자냐고 재차 물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알 길이 없었다. 다행히 밥이 때맞춰 입 모양으로 ‘G’라고 알려줬다. 거짓말로 그 친구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그의 친구들이 진실을 말해줄 때까지는 말이다.
나는 아내와 DIY 키트를 사용해 봤다. 내 안의 목소리는 이디시어(유대인 언어) 억양으로 하지 말라고 속삭였다. 세계의 많은 문화가 종교적 의미의 상징으로 문신을 이용해 왔다. 문신의 영속성은 영적인 의미로 충만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다른 형태의 외모 변형과 함께 문신을 극히 혐오한다. 유대 정교회에선 하느님 자신이 선택한 사람의 몸에 아무런 장식이 없기를 바란다고 믿는다. 따라서 수세기 동안 잉크로 외모가 변형된 나 같은 사람은 유대인 공동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그와 같은 금지령은 1945년 수정돼야 했다. 팔에 독일 숫자가 새겨진 강제수용소 생존자들 때문이었다. 오늘날의 자가 문신한 유대인들은 이 같은 냉혹한 역사의 수혜자들이다. 문화적인 공기도 바뀌었다. 근대 서방 문화에선 문신이 자기 표현의 한 형태로 받아들여졌다. 더는 범죄나 밑바닥 삶을 연상시키지 않는다. 문신이 더는 반항적이지 않다면 어쩌면 저질 문신(bad tattoos, DIY 작업 결과인 조잡한 문신)이 그런 기능을 할지도 모른다.
콜비 벡이 자신의 자가 문신 사진을 내게 보냈다. 그런 작업을 하게 된 배경 설명을 덧붙였다. “DIY 방식으로 직접 문신할 필요가 있었다. 돈이 많이 드는 유명 아티스트나 작업의 품질은 중요하지 않았다. 세상 속의 내 자화상을 뛰어넘으려는 목적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로 자신을 평가했었다. 터무니 없는 소리 같지만 사실이다. 마침내 내 앞에 다른 사람을 두지 않게 됐을 때 내가 원하는 어떤 문신이든 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을 나 말고 누가 더 잘 새겨 넣겠는가? 사람들이 동네 문신 시술소를 찾아갈 능력이 있으면서도 정통성이나 길거리 유행감각(street cred)을 추구해 DIY 방식을 선택한다고 본다. 내 자신을 말해주는 스토리이기도 하다.” 그 결과는 ‘베키’가 안에 쓰여진 불안정해 보이는 하트다. 뉴욕의 라이커스 아일랜드 교도소에서 쉽게 할 수 있었을 성싶다.DIY 문신을 하는 사람들은 완전 채식주의자 잉크와 DIY 정신을 강조한다. 자신들이 교도소에서 새겨 넣었다고 오인 받을 만한 문신을 하고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필시 의식할 듯하다. 그것을 오히려 즐길지도 모른다. 자가 문신의 본질은 정통성이다. 필시 벡 같은 사람에게는 해방감도 주는 듯하다. 반면 프로들은 그것을 가식적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요즘은 보이지 않는 인터넷이 사방 천지에 소용돌이 치는 시대다. 아바타와 디지털화된 존재가 세상 풍경을 이룬다. 고통과 피를 수반하는 약간의 원시성은 우리가 인간임을 깨닫는 데 필요한 요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매일 보는 일상적인 모습도 아니다. 바늘로 자신의 피부를 찔러 잉크를 주입하는 특별한 유의 자의식을 가진 모험적인 호모 사피엔스다. 아름다움을 원하는 건 아니다. 그건 돈으로 살 수 있다. 스스로 정통성을 부여한다. 영구히.
많은 기회를 흘려 보낸 뒤 이제 나도 문신자 대열에 합류했다. 20년 전 맨하튼 동남부에 있는 내 아파트 거실에서 ‘문신 파티’를 열었다. 펑크 로커들이 서로 문신을 새겨줬다.당시에는 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했다. 감방 생활 10년 동안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내 판화집(아트북 출판사 타센 펴냄)이 다른 사람들의 모델로 사용될 때도 ‘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전의 어느 날 밤 아내가 바늘을 집어 들었을 때 마침내 문신을 받아들이고 아내에게도 똑같이 새겨줬다. 지금은 우리 발에 짝을 이루는 ‘커플’ 점 문신을 갖고 있다. 배경을 모르면 거의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작다. 그러나 우리 사이에 둘 만의 비밀 의식이 치러졌다. 우리의 점 문신을 보여줄 때 우리는 반어적으로 세련됨을 과시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풍자는 포즈에 있다. 우리는 이제 결혼반지와는 달리 변기 속에 쓸려갈 수 없는 뭔가를 공유한다. 아이러니는 눈 녹듯 사라지고 혈거인과 그의 짝이 모습을 드러낸다.
‘얼음인간 외치’의 50개 문신은 그에게는 모두 뭔가를 의미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게 뭔지 결코 모를 것이다. 갱단 조직원 목 뒤의 흐릿한 글자도 의미가 있었다. G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나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아내와 내 왼발의 커플 점 문신도 역시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우리는 안다. 바늘 아래선 문명의 화장이 벗겨지고 민낯이 드러난다. 교도소 마당에서 스스로 바늘을 찌르든 아내가 바늘을 휘두를 동안 어금니를 깨물고 있든 마찬가지다. 정통성을 좇지 않고 우리는 그것을 성취했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완벽한 방식인지 모른다. 우리는 너무 애쓰지 않았고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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