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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식민지배의 추억

아프리카 식민지배의 추억

2013년 2월 말리 팀북투를 방문한 올랑드 대통령이 ‘프랑스, 고마워요!’를 외치는 주민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2013년 1월 말리 내전에 개입한 프랑스군은 팀북투에서 반군을 몰아냈다)
지난 5월 코르시카섬 칼비의 캠프 라팔리에서 프랑스 외인부대 하사관 마르셀 칼라푸트(26)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그는 말리 북부에서 비밀 작전을 수행하던 중 지뢰 폭발로 사망했다. 장-이브 르 드리앙 프랑스 국방장관은 이 젊은 하사관이 “프랑스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말하며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그에게 프랑스의 최고 영예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추서했다.

칼라푸트는 2013년 1월 프랑스군이 말리 내전에 개입한 이후 말리에서 전사한 여덟 번째 프랑스 군인이다. 아홉 번째 전사자 역시 외인부대 소속으로 지난 7월 사망했다. 칼라푸트의 장례식에서 르 드리앙은 말리에 1000명, 사헬-사하라 지대에 3000명의 프랑스 병력이 “필요한 만큼 오랫동안” 머무를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는 식민 제국의 독립을 승인한 지 50년 이상이 흐른 지금도 아프리카에 대한 간섭을 그만둘 수 없는 듯하다. 프랑스의 아프리카 군사 개입은 말리의 이슬람 반군을 상대로 한 싸움에 그치지 않으며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프랑스군은 아프리카 내의 적어도 10개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난 5월 프랑스 정부는 차드와 부르키나파소, 말리 북부, 코트디부아르를 거점으로 파견 병력을 증강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혼란에 빠진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질서 회복을 돕기 위해 파견한 2000명 외에 무장 테러 단체와의 전투, 정보 수집, 현지 군대 훈련, 신속대응군 제공 등의 임무를 맡고 파견된 병력이 5500여 명에 이른다.

프랑스 상원의 한 기밀보고서는 특수병력의 규모를 3000명에서 4000명으로 25% 증강할 것을 제안했다. “그 정도면 프랑스가 향후 10년 동안 직면할 가능성이 있는 물리적 충돌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그 보고서는 결론 내렸다. 여기서도 초점은 아프리카에 맞춰져 있다.

‘보 제스트’(동명의 모험소설을 원작으로 한 1939년작 영화로 주인공 보 제스트를 비롯한 프랑스 외인부대 병사들의 명예롭고 영웅적인 면모를 다뤘다)의 21세기판 리메이크작처럼 들린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 영화에서 봤던 것과 똑 같은 사막, 똑 같은 모래, 똑 같이 따분한 전초기지의 이야기다. 심지어 적군까지도 똑 같은 경우가 있다. 지금도 여전히 자치를 요구하며 투쟁하는 말리의 투아레그족 반군이 대표적인 예다.

프랑스 정부는 이번 군사 개입이 궁지에 몰린 말리 정부의 요청을 받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 하에 이뤄진 것이라고 자국의 입장을 정당화했다. 프랑스의 군사 개입은 말리 북부 지방이 투아레그 반군과 마그레브(알제리·튀니지·모로코 등 아프리카 북서부) 지역 알카에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연합에 장악된 뒤에 이뤄졌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투아레그 반군의 자치권 획득 노력을 좌절시키기보다는 이슬람 과격분자들을 견제하는 데 더 초점을 맞췄다. 사헬 지대가 알카에다 테러의 온상이 될 것이며 그 여파가 프랑스와 나머지 유럽 국가에까지 미치리라는 우려 때문이다.

2013년 프랑스의 국방 전략은 “유럽의 이웃(Europe’s neighborhood)”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모리타니아(아프리카 북서부의 공화국)부터 아프리카의 뿔(아프리카 대륙 북동부)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그 전략 보고서를 보면 아프리카 국가들은 자국의 영토를 스스로 통제하는 “능력이 부족하며(have a low capacity)”, 취약한 나라들은 테러리스트들의 피난처가 될 위험이 있다고 쓰여 있다.
 아프리카 시장 쟁탈전
지난 7월 아프리카 순방 길에 오른 올랑드 대통령이 코트디부아르의 수도에 도착해 알라산테 우아타라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10년 전에는 미국이 이와 흡사한 말을 했었다. 9·11 테러 이후 미국 정부는 ‘사하라 횡단 대테러 작전(the Trans Saharan Counter-Terrorism Initiative)’에 착수해 사하라 사막 주변 9개국에서 현지 병력을 훈련시키고 각국에 반영구적인 미군 기지를 설립했다. 그 후 아프리카 군사 개입에 대한 미국 정부의 관심은 차츰 줄어들었다. “미국은 아프리카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칠 의사가 별로 없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리비아 사태 개입은 오바마 대통령이 아프리카에 대한 병력 파견을 꺼린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워싱턴 DC에 있는 브루킹스 연구소의 분석가 아마두 시가 뉴스위크에 말했다.

미국은 아프리카 군사 개입 문제에서 프랑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만족스럽게 여기는 듯하다. 지난 2월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미국을 국빈방문 했을 때 그와 오바마 대통령은 워싱턴포스트에 공동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새로운 동반자 관계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곳은 아프리카다. 우리는 다른 국가들과 협력해 사헬 지대 전역에서 알카에다의 새로운 기반 마련을 막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프랑스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공격적인 이슬람주의를 우려한다. 무엇보다 자국 내에 무슬림 인구가 많은 데다 지리적으로 아프리카에 가까이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의 적극적인 아프리카 개입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 동안 프랑스가 막대한 금전적 이득을 얻어 온 그 지역에서 자국의 우위를 강화하고 앞으로도 계속 그런 이득을 얻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현재 프랑스 경제는 침체된 반면 아프리카 경제는 대체로 건전하게 성장하고 있다. 프랑스는 석유와 광물 자원, 사회기반시설 프로젝트, 통신, 공익사업, 금융, 보험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아프리카와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중국과 브라질, 인도 같은 나라들과의 경쟁으로 프랑스의 시장점유율이 줄어들고 있다.

21세기의 아프리카 시장 쟁탈전은 지난 8월 미국 정부가 아프리카 지도자 50명과 3일 동안 경제 정상회담을 열면서 한층 더 가속화하기 시작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아프리카 지도자들에게 “미국은 아프리카 성공의 동반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하고 공공과 민간 부문에서 33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프랑스도 2013년 그와 유사한 계획에 착수했다. 2013년 프랑스 경제재정산업부(MINEFI)가 발표한 문건 ‘미래를 위한 동반자 관계(A Partnership for the Future)’에서는 프랑스가 경쟁력을 키울 방법이 제시됐다. 올랑드는 2013년 향후 5년 안에 대아프리카 교역을 배로 늘리고 프랑스에서 일자리 20만 개를 창출하겠다고 말했다.

이 문건의 작성을 지휘한 위베르 베드린(1997~2002년 프랑스 외무장관을 지냈다)의 말을 들어보자. “아프리카인들이 중국인들만 원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중국인들을 두려워한다. 따라서 프랑스인들이 하기 나름이다. 프랑스인들은 경쟁력을 키우고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야 한다. 프랑스는 아프리카가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 이후 아프리카를 저버리지 않은 유일한 국가다. 프랑스는 당시 위대한 지도자들의 요청으로 아프리카의 안보 보장을 위해 그곳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건 프랑스의 공식 입장이고 그 뒷이야기는 좀 다르다.
 프랑스의 ‘문명화 사명(Civilizing Mission)’
아프리카가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 뒤 프랑스의 대통령들은 그곳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아프리카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해 왔다. 거기엔 자국의 경제적 이득을 챙기려는 속셈도 깔려 있었다. 2011년 사르코지 대통령과 오마르 봉고 가봉 대통령.
1950년대 말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채택한 이 계획은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 아프리카 24개국(대체로 프랑스어를 주 언어로 사용한다)과 긴밀한 유대를 유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프랑스는 전쟁을 방지하고 쿠데타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개입했다. 여기엔 당연히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프랑스 정부의 속셈도 들어 있었다. 일례로 프랑스에서 사용되는 전력의 4분의1이 나이지리아산 우라늄을 이용해 생산된다.

게다가 아프리카에서의 지속적인 영향력은 세계 강국으로서 프랑스의 불안정한 지위를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 아프리카가 아니라면 어디서 프랑스가 그런 영향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른바 ‘프랑사프리크[Françafrique, 불어 단어 France(프랑스)와 Afrique(아프리카)의 합성어로 아프리카 식민지 독립 이후 옛 식민지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샤를 드골 대통령의 정책을 뜻한다]’는 엘리제궁(프랑스 대통령궁)에서 직접 관리했다. 이 정책은 의회의 감독이나 승인을 받지 않고 엘리제궁 내에서 비밀리에 움직이는 ‘아프리카 조직(Africa cell)’을 주축으로 개인적인 접촉과 비밀첩보원 조직, 군대, 대기업, 코르시카 마피아, 외국인 용병 등을 통해 시행됐다.

지금까지 프랑스가 아프리카 군사 개입에 공개적으로 나선 횟수만 40회가 넘는다. 주로 프랑스가 지지하는 아프리카 지도자를 보호하고 그들이 좋아하지 않는 지도자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일부 아프리카 지도자들에게 엘리제궁과의 좋은 관계는 생명 보험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많은 지도자들이 프랑스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어 했으며 다음에 프랑스의 도움이 필요할 때 그들이 꼭 나타나 주기를 바랐다.

세네갈 태생의 프랑스계 레바논인 변호사 로베르 부르지는 거의 30년 동안 엘리제궁과 아프리카 지도자들 간의 비공식적 중개자 역할을 했다. 그는 아프리카 지도자들이 프랑스 정치인들에게 보내는 현금 가방을 자신이 운반했다고 주장했다. 그 정치인 중에는 2007년 퇴임한 자크 시라크 대통령등 최고위급 인사들도 포함됐다.

수많은 관련 스캔들이 터진 후 최근에 와서 프랑스 대통령들은 프랑사프리크 정책을 종식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엘리제궁의 아프리카 조직을 폐쇄했다. 하지만 그는 부르지를 포함한 고문들을 통해 아프리카 정책을 계속 관리했으며 아프리카에 병력을 네 차례나 배치했다. 2012년 10월 올랑드 대통령은 프랑사프리크를 종식시키고 아프리카와 투명하고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겠다고 맹세했다.

올랑드 임기 첫 2년 동안의 4차례 군사개입은 과거에 비해 투명하게 이뤄졌다. 프랑스 정부는 아프리카 우방국들과 유엔(UN), 유럽연합(EU)과 상의하고 그들의 참여를 요청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병력은 훈련과 장비가 미흡하고 대체로 비효율적이다. 또 유엔은 몸집이 크고 행동이 느리며 유럽의 우방국들은 간신히 명분을 내세울 수 있을 정도의 병력만 파견한다.

프랑스 정부는 과거에 자국이 내키는 대로 운영했던 프랑사프리크 정책과 지금의 대아프리카 정책은 엄연히 다르다고 주장한다. 현재 프랑스 병력은 다른 나라들이 나서기를 꺼리거나 해결할 능력이 없는 문제에 신속히 대응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지난 30년 동안 프랑스가 아프리카에서 저지른 악행에 초점을 맞춰 온 프랑스 비정부기구 쉬르비(Survie)는 프랑스 정부의 주장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 파브리스 타리트 쉬르비 대표는 뉴스위크에 이렇게 말했다. “요즘 프랑스가 유엔의 승인을 기다리는 건 맞다. 하지만 그건 자기 정당화의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프랑스는 결의안을 작성하고 제출한다. 게다가 프랑스의 활동은 유엔이 승인한 범위를 뛰어넘는다.”
 ‘썩은 생선처럼 악취를 풍긴다’
2007년 시라크 대통령과 앙드레 밀롱고 콩고 총리.
올랑드는 취임한 지 두 달도 안 된 2012년 7월 가봉의 알리 봉고를 필두로 엘리제궁에서 아프리카 독재자들을 줄줄이 영접해 비난을 샀다. 그들에 대한 환대는 비판가들의 눈에 프랑스가 비민주적 정권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비쳐졌다. 런던대 동양·아프리카학 대학원의 제레미 키난 교수는 그렇게 확신한다. “프랑사프리크는 건재하다”고 그는 말했다. “프랑스 정부는 그것이 사멸했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썩은 생선처럼 악취를 풍긴다.”

올랑드의 최측근 중 한 명인 베누아 퓌가 대통령 비서실장은 아프리카 최전선의 전투를 포함해 수십 년 동안 아프리카 관련 경험을 지닌 베테랑이다. 프랑사프리크에 관한 책을 펴낸 장-피에르 바트는 뉴스위크에 이렇게 말했다. “올랑드는 말리에서 지상전을 펼치기를 원치 않았다. 하지만 퓌가가 ‘빨리 말리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2013년 1월 말리에서의 프랑스 군사작전은 빠르고 성공적이었다. 수도 바마코로 진격해 오던 이슬람주의자들과 투아레그족 반군을 저지했고 팀북투 등 북부 도시에서 반군을 몰아냈다. 한 달 후 말리를 방문한 올랑드는 “내 정치 인생 중 가장 중요한 날”이 막 지나갔다고 말했다. 그 즈음 프랑스에서 실시된 여러 여론조사에서 올랑드는 50여 년 만에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프랑스 여론조사기관 브륄레 빌 에 아소시에(BVA)의 한 조사에서는 프랑스인 4분의3이 말리 군사개입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올랑드에겐 수개월 만에 듣는 최고의 뉴스였다.

부르지는 한 웹사이트에 이렇게 말했다. “몇 년 전 프랑수아 올랑드는 프랑사프리크 정책을 맹렬히 공격했다. 하지만 말리에서 그는 아프리카를 좋아하게(사실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됐다.” 올랑드가 아프리카에 열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여지가 없다. 그는 아프리카를 자주 방문할 뿐 아니라 2013년 5월에는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린 아프리카연합(AU) 정상회담에 서방 지도자로서는 유일하게 참석했다.

또 지난 5월 나이지리아 여학생 200여 명이 이슬람 극단주의 집단 보코하람에 납치되자 올랑드는 서방 지도자 중 제일 먼저 아프리카 지도자들과 정상회담을 열었다. 올랑드에게는 세계 언론이 주목하는 사건에서 아프리카에 대한 자신의 결단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다. 프랑스 등 여러 국가의 협조에도 불구하고 납치된 여학생 대다수가 여전히 실종 상태다. 하지만 파리 정상회담에서 보코하람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고 곧 이어 유엔과 유럽연합은 보코하람을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규정했다. 7월에는 나이지리아와 카메룬, 차드와 니제르의 국방장관들이 보코하람을 상대로 싸울 2800명 규모의 지역 병력 창설을 서두르기로 약속했다. 각국이 700명의 병력을 지원하게 된다. 이 네 나라는 자금 지원과 병력의 지휘를 누가 맡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일부 아프리카 지도자는 정신분열증 환자처럼 어느 순간 프랑스와의 관계 단절을 원하다가 금세 프랑스의 지원을 요청하곤 한다.” ‘프랑스-아프리카 아웃 나우(France-Africa - Out Now)?’의 저자 프랑시스 라루포의 설명이다. 하지만 불안한 독재자들과 종신 대통령들은 대체로 역내 문제와 관련한 프랑스의 역할에 만족한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효율적인 군대를 보유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아프리카 문제에 외부 세력이 개입하는 것을 불안하게 여긴다. 일각에서는 아프리카의 프랑스어 사용 지역 일부가 여전히 프랑스에서 독립하지 못했다고 본다.”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남아공 국제문제연구소의 알프레도 치우리모 헹가리가 말했다. “남아공이 ‘아프리카의 문제는 아프리카인의 손으로’를 주장하는 이유는 프랑스가 아프리카에서 경찰 역할을 하며 계속 남아 있으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헹가리는 아프리카의 병력이 지금처럼 무능력한 상황에서는 “프랑스가 아프리카 분쟁에서 경찰관 같은 역할을 계속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또 런던의 정책연구소 채텀 하우스의 폴 멜리는 “아프리카는 프랑스가 주된 역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보 제스트는 아프리카를 떠난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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