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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파워피플[75] 기 랄리베르테 | 태양의 서커스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 - 서커스+거리공연으로 세계적 창의산업 일궈
- 글로벌 파워피플[75] 기 랄리베르테 | 태양의 서커스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 - 서커스+거리공연으로 세계적 창의산업 일궈

태양의 서커스 올해로 창립 30주년
CT 세미나에서 김 대표가 창조경제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한 ‘태양의 서커스’는 지난 1984년 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얼에서 20명의 거리공연으로 조그맣게 시작했다. 씨앗은 소박했으나 그 열매는 창대했다. 올해로 창립 30년을 맞는 ‘태양의 서커스’ 공연은 이제 현재 전 세계 50여개국 출신의 공연자 1300여명을 포함한 5000여명의 직원이 10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세계적인 문화산업 아이템으로 성장했다. 지금까지 6개 대륙, 40 개국, 300여 도시에서 1억5000만명이 경이와 환호 속에 ‘태양의 서커스’ 공연을 즐겼다.
‘태양의 서커스’을 기획해 대표적인 글로벌 고품격 예술 공연의 하나로 키운 주인공이 바로 기 랄리베르테(55)다. 그가 1984년 캐나다 몬트리얼에서 ‘태양의 서커스’를 설립하기 전까지 서커스는 말 그대로 서서히 몰락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커스를 진부하고 단조로우며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구시대의 유물 정도로 여겼다. 바보스러운 광대의 몸짓에 인간의 옷을 입은 곰의 춤, 그리고 사자의 입에 머리를 집어넣는 일련의 사람들로 이뤄진 뻔한 공연이었다. 이를 지루하고 권태롭게 여긴 관객들은 서커스를 멀리했다. 진부함 앞에 지갑을 여는 사람은 없다. 랄리베르테는 추억 마케팅이나 하면서 서커스의 명맥이나 유지하는 대신 대대적인 혁신을 통해 사람들이 찾아오는 공연으로 탈바꿈 시키는 쪽을 택했다.
랄리베르테는 모든 것을 바꿨다. 그는 고답적인 동물 공연을 완전히 배제했다. 관리 비용이 확 줄었다. 대신 감동적인 스토리와 공연자의 운동 능력을 앞세운 화려한 서커스 공연을 선보였다. 보는 이의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아슬아슬한 고난도 서커스가 ‘태양의 서커스’의 핵심이 됐다. 서커스를 보면서 아름다운 육체로 엄청난 운동능력을 가진 멋진 공연자를 만나는 것은 물론 하나의 완성된 ‘셰익스피어극’ 수준의 스토리를 함께 접할 수 있도록 했다. 연극적인 감동, 뉴에이지의 감수성, 그리고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고난도 서커스가 융합된 것이다. 이런 ‘태양의 서커스’의 등장에 관객은 태양처럼 뜨겁게 열광했다.
관객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공연이 몬트리올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랄리베르테는 곧바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진출했다. 물 들어올 때 바로 배를 띄운 것이다. 한물 간 유명 가수, 엘비스 등을 흉내 내는 모창 가수, 현란한 공연으로 유명한 쇼걸들이 득실거리는 쇼의 본고장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새로운 볼거리를 고대했던 관중들은 기꺼이 ‘태양의 서커스’ 앞에 지갑을 열었다. 랄리베르테는 현재 전 세계에 걸쳐 9개 팀을 운영하고 있다. 5개 팀은 전세계 순회공연을 하러 다니고 있으며 4개는 상주 서커스단이다. 거의 매년 새로운 이름의 공연을 선보이면서 인기 있는 공연은 레퍼토리로 계속 돌리고 있다. ‘태양의 서커스’ 공동설립자이자 최고경영자로 활동하고 있는 랄리베르테 자신은 26억 달러의 재산을 모았다. 포브스는 그를 캐나다 11위, 전 세계 459위의 부자로 올려놨다.
랄리베르테의 시작은 초라했다. 실패도 잦았다. 하지만 항상 관객을 중심에 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그를 역경에서 구했다. 랄리베르테는 1959년 캐나다의 프랑스어권 지역인 퀘벡주의 퀘벡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비교적 어린 시절부터 쇼 비즈니스에 관심이 많았다. 어려서 부모와 함께 보러 간 서커스 공연이 계기였다. 당시 북미 여기저기에서 공연을 하고 있던 미국 순회 서커스단 ‘링글링 브러더스 앤드 바넘&베일리 서커스’였다. P.T. 바넘과 제임스 엔서니 베일리라는 공연자가 창단한 서커스단이 1919년 링글링 브러더스라는 서커스단에 합병되면서 생긴 전통의 서커스단이었다. 그 공연을 보고 감동한 랄리베르테는 서커스단 창립자의 한 명인 P.T. 바넘의 전기를 구해 읽기도 했다. 바넘은 미국의 서커스 단원이자 서커스 경영자로 명성을 얻었다. 관객의 눈길을 사로 잡은 공연을 기획해 돈을 벌어 공연자의 생계를 책임지고 자신의 지갑도 두둑하게 해야 한다는 지론을 편 인물이다. 서커스에 경영 개념을 도입한 주인공이다. 원래는 서커스 공연 중 짓궂은 장난으로 관객들을 웃기는 역할이 전문이었다. 서커스 종사자 중 드물게 자서전과 서커스와 관련한 책을 펴낸 작가이자 출판인, 자선사업가이자 때때로 정치분야에서 일하기도 했다.
학창 시절 부모와 함께 관람한 서커스와의 강렬한 만남

1979년 고향인 몬트리얼로 돌아온 그는 불 먹기 쇼를 배웠다. 그러던 중 랄리베르테는 안정적인 직장을 구했다. 수력발전소 직원이었다. 하마터면 이 재주꾼이 댐에서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을 받으며 일생을 조용히 살 뻔했다. 하지만 전환의 기회는 의외의 곳에서 찾아왔다. 취직을 한 지 사흘 만에 벌어진 수력발전소 직원들의 파업이었다. 이를 계기로 직장을 잃은 랄리베르테는 다시 거리로 나왔다. 그는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다시는 공연이 아닌 다른 직업을 찾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실업수당을 받으며 생활하게 된 그는 친구인 질 생트크루아와 다니엘 고티에와 함께 여름 시즌에 몬트리얼 교외의 배생폴이라는 곳에서 순회 축제공연을 기획했다. 르발콩베르(녹색 발코니)라는 이름의 공연단용 유스호스텔을 운영하던 생트크루아와 고티에는 유스호스텔을 활용해 지역의 재능 있는 공연자들을 모아 공연단을 구성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퀘벡주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으며 생트크루아는 배생폴에서 죽마를 타고 90㎞를 걸어서 퀘벡시청까지 가는 퍼포먼스를 했다. 그 덕분에 세 사람은 퀘벡 정부의 지원을 받아 ‘레 제샤시에 드 베생폴(베생폴의 학다리들)’이라는 이름의 공연단을 설립할 수 있었다. 이들은 수많은 지역 공연자를 고용하고 1980년 여름 시즌에 퀘벡지역을 순회 공연했다.
해마다 새로운 공연 창안
기회는 더 큰 기회를 낳는 법이다. 본격적인 기회는 1983년에 찾아왔다. 퀘벡 정부가 이듬해에 있을 캐나다 발견 450주년 기념 공연을 위해 그에게 150만 달러의 자금을 교부한 것이다. 1984년은 프랑스인 탐험가이자 항해가인 자크 카르티에가 서양인으로선 처음으로 캐나다 서부 세인트로렌스 만과 세인트 로렌스 강을 발견해 이 지역에 캐나다라는 이름을 붙인 지 450년이 되는 해였다. 이에 따라 캐나다 문화예술위원회는 이를 축하하기 위해 다양한 문화예술 집단에 보조금을 지급해 공연이나 전시를 하게 하는 프로젝트를 주관하고 있었다. 보조금을 받을 문화인이나 집단의 선택은 주정부가 맡고 있었다.
랄리베르테는 1984년 한 해 동안 진행될 이 기념 공연을 ‘르그랑 투르 드 시르크 뒤 솔레유(태양의 대순회공연)’이라고 이름 붙였다. 태양의 서커스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태양의 서커스라는 말은 그가 따뜻한 남쪽 나라인 하와이에 있는 동안 생각해 둔 것이었다. 태양이 에너지와 젊음을 상징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르 그랑 투르 드 시르크 뒤 솔레유’는 원래 퀘벡주에 한정된 1년짜리 한시적 기획이었다. 하지만 공연이 대성공하자 퀘벡 정부는 이를 문화상품으로 키우기로 하고 공연단에 캐나다 전역을 돌며 순회 공연을 할 것을 제안했다. 이후 태양의 서커스는 캐나다를 넘어 세계로 뻗어갔다. 라스베이거스에 이어 전 세계로 진출했다. 한국에서도 볼 수 있다. 랄리베르테는 이후 매년 새로운 공연을 창안했으며 성공적인 공연은 이를 레퍼토리로 만들어 장기 공연을 했다. 그는 태양의 서커스를 융복합문화산업의 대표적인 사례로 키웠다. 거리공연에 서커스는 물론 여러 민족이나 종족의 고유문화와 스토리를 담은 민속공연, 그리고 대중 연극, 대중음악, 춤, 그리고 첨단기술로 이뤄진 비주얼 아트를 결합했다. 과거와 현대, 과학과 문화를 결합해 흥행 성공을 거둔 CT산업의 선구자가 됐다.
랄리베르테는 2007년 10월 자선단체인 ‘원 드롭 재단’을 설립했다. 전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을 충분히 공급하는 것이 설립 목표였다. 그는 자선단체의 모금 활동에 문화예술 공연을 결합했다. 청소년을 모아 ‘시르크 뒤 몽드(세계의 서커스)’라는 공연단을 만들고 이들을 모금 활동의 주역으로 활용했다. ‘태양의 서커스’를 경영하면서 공연을 통한 문화적 감동이 주는 힘을 잘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는 2009년 캐나다인 최초로 우주관광객이 됐다. 이 역시 물 재단 홍보를 위한 이벤트였다. ‘가난한 공연계’ ‘몰락하는 서커스’라고 한탄할 필요는 없다. 랄리베르테는 우리에게 ‘나라 탓, 남 탓, 시류 탓 하지 말고 창의적 열정으로 이순신이 되라’고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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