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분 간의 지적인 쾌감

아니, 생각만 할 필요는 없다. 이미 그런 승부를 벌인 기록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바로 ‘부자가 천국 가는 법’이다. 제목과 달리 천국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부자에게서 세금을 더 거둬야 하는지를 주제로 전문가들이 벌인 토론을 글로 옮긴 책이다. 이 책의 원본인 토론은 저명한 캐나다의 정책토론회 멍크 디베이트(Munk debates)다. 멍크 디베이트란 캐나다의 사업가 피터 멍크가 설립한 오리아재단이 2008년부터 연 2회 주최하는 토론회를 말한다.
멍크 디베이트는 그야말로 토론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우리나라에서도 방송 등에서 토론이라는 이름으로 대담을 종종 진행하지만, 찬성측과 반대측이 명확하게 나뉘지 않거나 논쟁적인 사안은 적당히 피해가는 등 토론이라 보기 힘든 경우가 많다. 멍크 디베이트는 다르다. 예컨대 ‘행복한 사회의 조건은 무엇인가’ 같은 두루뭉술한 주제는 택하지 않는다(사실 이런 것은 토론 주제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정부의 정보 감시는 정당한가’ ‘유럽연합은 실패했는가’ 등 찬성과 반대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만을 주제로 선정한다. 양측을 지지하는 최고 전문가가 토론자로 나서서 약 1시간 30분 정도 치열한 토론을 이어간다.

토론에서 문제로 떠오른 측면은 간단하게 정리하면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도덕적인 측면이다. 부자 증세는 도덕적으로 정당한가? 여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인물은 깅리치다. 그에 따르면 부자라는 이유로 세금을 더 부과하는 것은 “성공하면 벌을 주겠다”는 말이나 다름 없다. 개인의 노력으로 인한 성공의 과실에 국가가 손을 뻗쳐선 안 된다는 전형적인 보수의 논리다.
크루그먼은 미국 저술가 올리버 웬들 홈스의 말을 빌려 세금은 “문명사회의 대가”라고 말한다. 부자가 그처럼 많은 돈을 버는 이유는 앞선 인프라와 사회적인 안전망 덕분이며, “부자는 이를 충당하는 데 돈을 더 낼 수 있기 때문에” 다소 더 큰 몫을 세금으로 부담해야 한다고 크루그먼은 주장한다. 한편 파판드레우는 민주주의 정부라면 마땅히 일부 부자가 아닌 전체 국민의 기회 증진에 앞장서야 하며, 부자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부자 증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둘째 측면은 현실적인 요소다. 과연 부자 증세를 하면 실제로 세수가 증가할 것인가? 이 부분에서 토론자들의 의견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다. 크루그먼은 복지 정책에 부족한 예산을 부자 증세로 충당할 수 있으며, 부유층 세율을 최소 70%까지 올려도 세수가 줄어들거나 경기가 위축되는 일은 없으리라고 말한다. 파판드레우는 “부자도 평등한 사회에서 더 오래 산다”며 복지를 늘리면 부자들도 혜택을 본다고 주장한다.
반면 래퍼는 부유층이 세금을 덜 내는 이유는 세율이 낮기 때문이 아니라 세제에 허점이 많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과세 범위를 넓히고 일률 과세를 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한다. 세제 개혁 없이 세율을 올려도 부유층에겐 이를 피할 수단이 많다는 것이다. 깅리치는 세율이 낮아서가 아니라 비효율적인 일 처리 때문에 정부 예산이 부족하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증세보다 세금이 효율적으로 사용되도록 정책과 시스템을 개혁하는 것이 먼저다. 심지어 그는 강경한 보수임에도 “저렴한 매파”를 자처하며 국방 예산조차도 현대화를 통해 20% 절감 가능하다고 말한다.
토론은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 멍크 디베이트도 마찬가지다. 네 사람이 할 말을 전부 하기에 1시간 30분은 턱없이 짧다. 토론 도중 증세와 세수의 관계를 놓고 래퍼와 의견이 엇갈리자 “우리 둘이 앞에 나가서 데이터 갖다 놓고 결판을 내자”는 크루그먼을 사회자가 말리는 것도 그런 이유다. 세율을 낮추고 과세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래퍼의 주장과 부유층에 높은 세율을 매겨야 한다는 크루그먼의 주장 중 어느 쪽이 옳은지를 따지려면 오랜 시간을 들여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해야 한다. 설령 한쪽이 그렇게 하더라도 반대 진영의 승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과 그 책이 불러 일으킨 논란들을 보라. 토론장에선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멍크 디베이트에 참석하는 청중은 모두 토론 시작 전과 토론이 끝난 후에 자신의 입장을 묻는 설문에 각각 답한다. 큰 변화가 없는 경우도 있지만, 토론 전과 후에 결과가 뒤집히는 경우도 있다. ‘21세기 자본론’이라면 1시간 30분만에 사람의 마음을 바꿔놓기 어렵겠지만, 토론이라면 또는 이 책이라면 가능하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화두를 놓고 최고의 전문가가 설전을 벌이는 멍크 디베이트는 토론의 장점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유럽 연합은 실패했나’를 주제로 2012년 5월 열린 토론에 대한 청중의 의견은 시작 전 찬성 44%, 반대 38%, 미정 18%였지만 토론 후 찬성 45%, 반대 55%로 바뀌었다.
‘부자에게서 세금을 더 거둬야 하는가’에 대한 청중의 토론 전 의견은 찬성 58%, 반대 28%, 미정 14%였다. 토론을 듣고 의견을 바꿀 의향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79%였다. 토론이 끝난 뒤 청중의 의견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이 토론을 접한 여러분의 의견은 바뀔까, 그대로일까? 책 속에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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