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한 끝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맨해튼을 떠날 수 없었다. 일종의 항복처럼 느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야나기하라가 최근 소호의 초밥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내게 말했다. 그녀가 사는 맨해튼 남부 동네다. 그녀의 신작 소설 ‘작은 삶(A Little Life)’의 주요 무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가 ‘우리 가공육 대성당(일명 카츠 조리식품점)’에서 10㎞이상만 벗어나면 완전히 길을 잃고 말겠구나 속단해선 안 된다. 세상과 등진 신경증 환자는 결코 아니다. 여행잡지 ‘콘데 나스트 트래블러’의 편집자인 그녀는 빈번히 그 도시를 벗어나 여행을 떠난다. 지난 3월 초 우리가 만났을 때도 오만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다. 언젠가는 아시아, 특히 도쿄에서 살고 싶다고 한다. 오랜 전통을 가진 믿음과 초현대적인 감수성이 어우러져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도시라는 설명이다.

상상력이 딸리는 많은 소설가들은 자신이 아는 것에 관해 쓴다. 익숙함의 바닷가 가까이 접근해 일상생활의 조류를 타고 떠돈다. 야나기하라는 인간 심리의 어두컴컴한 후미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다. 우리 대다수가 피해가고 싶어하는 깊이 모를 초호다. 첫 소설에선 이부이부라는 먼 태평양의 섬에서 한 인류학자가 생물학적 불멸의 비밀을 발견하는 듯하다. 노벨상을 받지만 자신이 입양했던 수십 명의 이부이부 아이들 중 일부를 성추행한 죄로 징역살이를 하면서 그의 경력은 불명예스럽게 끝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어린 소년을 강간한다. 험버트 험버트와 롤리타(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에 등장하는 의붓아버지와 딸)가 찾아가는 342개 호텔과 모텔에서 그들 사이에 일어나는 무엇보다도 섬뜩한 장면이다.
소설은 바이러스 학자 칼턴 가주섹의 실제 사건을 토대로 했다. 가주섹은 의사들인 그녀 아버지와 숙부의 친구였다. 한 남자의 파멸을 그린 이야기이면서 또한 서방의 과학과 그에 따른 기업들에 지상낙원 같은 한 섬이 약탈되는 스토리다. 야나기하라는 자기 가족의 뿌리가 있는 하와이를 배경으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식민지화 반대 논문’을 쓰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16년 간 초조와 불안에서 우러나오는 상상력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창조했다. 그런 상상력이 자아내는 변덕과 가공의 지식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Pale Fire)’을 연상케 한다.
“우리 부모는 밭에 나가 일한 마지막 세대였다”고 야나기하라가 말했다. 증조부 대에 하와이로 이주해 정착했지만 그녀는 로스앤젤레스(LA)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운전, 태양광선’ 때문에 그곳을 싫어한다. 그녀의 가족은 혈액학자·종양학자인 아버지 때문에 뉴욕시·볼티모어·텍사스·하와이 등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 온갖 찬란한 공포를 자랑하는 오렌지 카운티. 그 뒤 들어간 스미스 칼리지도 LA 만큼이나 끔찍했다.
대학 졸업 후 야나기하라는 뉴욕으로 이주해 여러 출판사에서 홍보담당자로 일하다가 잡지계로 뛰어들었다. 한때 보수 높고 일 많던 잡지 편집자 일을 아직도 계속한다. ‘콘데 나스트 트래블러’의 기사작성과 편집 작업이 “마음에 안식을 주고 보람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종종 떠나는 해외 출장이 특히 만족스럽다. 서비스 저널리즘(소비자 지향적 기사와 정보 매체)이지만 그녀로선 전혀 불만이 없다. “시작과 끝이 있는 일”이라고 그녀가 말했다. 따라서 소설 작업을 할 시간과 정신적 여력이 충분하다.
야나기하라의 둘째 작품은 첫째와는 전혀 다르다. 우선 분량이 730쪽으로 두 배에 가깝다. ‘숲 속’의 배경은 가공의 섬이지만 ‘작은 삶’은 실재하는 맨해튼 섬이다. 야나기하라가 고향으로 부르는 구체적인 성지다. 소설은 친구 4명의 삶을 수십 년에 걸쳐 따라간다. 대학 때부터 함께 어울렸으며 모두 맨해튼에 정착했다. 3명은 예술계에 종사하고 중심인물인 주드는 성공한 기업 변호사다. 어렸을 때 심한 학대를 받아 줄곧 신체적·정신적 상처로 고통 받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첫 소설은 세부묘사가 지나칠 정도로 섬세했지만 두 번째 작품은 “동화 같은 수준”이라고 야나기하라는 평한다. 톰 울프의 ‘허영의 불꽃(The Bonfire of the Vanities)’ 같은 몇몇 뉴욕 테마 소설들은 도시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구두 브랜드와 레스토랑 이름들이 줄거리를 떠받치는 힘이다. ‘작은 삶’은 그 배경에 깊게 뿌리를 내렸지만 거기에 예속되지 않는다. 뉴욕의 이미지를 담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보기 드문 뉴욕 소설이다. “책이 약간 시대와 어긋나게 느껴지기를 바란다”고 그녀가 말했다.
아동 추행 테마가 두 소설을 하나로 묶어준다. 실제로 그것은 두 소설의 유일한 표면적 교차점일지도 모른다. 첫 소설에선 주인공이 성추행을 한다. 둘째 소설에선 피해자가 무대 한가운데 선다. 야나기하라는 ‘작은 삶’을 시작할 때 “첫 소설에 대한 답안”으로 구상했다고 한다. 두 작품 모두 성행위를 가리켜 필요하지만 소름 끼치는 것으로 묘사한다. 소름 끼치는 건 바로 필요하긴 하지만 쾌감은 순간이고 고통은 오래 남는다는 점 때문이다.
주드의 섹스에 대한 두려움은 중서부 등지의 수도원에서 겪었던 성폭력을 감안할 때 이해할 만하다. 자신의 고통을 마주하지 못하는 무기력, 그것을 침묵으로 억누르려는 그릇된 욕구가 독자에게 더 끔찍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폭력. “섹스에 대한 보상행위로 하는 자해가 갈수록 심해진다. 수치심을 덜고, 자신이 느끼는 분노를 자책하려는 목적”이라고 야나기하라는 썼다. 주드의 몸은 이미 학대자들에게 망가진 상태였다. 필라델피아의 자칭 구원자가 자동차로 그를 치어 두 다리가 부러졌다. 뉴욕의 폭력적인 동성 친구는 그를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렸다. 이미 상처투성이인 그의 몸은 자해로 더 큰 상처를 입는다.
야나기하라의 소설 두 편 모두, 특히 ‘작은 삶’에는 비중 있는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다. 의도적인 설정이었다. 야나기하라는 독신이며 가족을 꾸릴 생각도 없다. ‘남자에게는 감정을 표현하는 어휘가 훨씬 적게 주어졌다’는 이론을 탐구하고 싶었다고 한다. 여성의 감정은 훨씬 더 풍부하고 친숙했다. 따라서 남이 가지 않은 길에 더 관심이 많은 소설가에게는 덜 매력적이다. 그녀는 남자 심리의 음습하고 어두컴컴한 비좁은 통로를 더듬어 나가고자 했다. 그 제한된 어휘로 극도의 정신적 충격에 어떻게 대처할까? 그 다락방에서 어떻게 빠져 나올까? “이런 충격은 회복이 불가능한 종류일까?”
야나기하라 책의 출판사 더블데이 편집자 게리 하워드가 걱정하는 문제는 따로 있었다. 수백 쪽에 달하는 주드의 성적·육체적·정신적 박탈을 독자들이 참고 읽어주지 않으리라는 우려였다. “누구라도 받아들이기가 너무 어려운 내용”이라고 그가 야나기하라에게 말했다고 서평지 ‘커커스 리뷰스’가 최근 프로필 기사에서 전했다.
그 결과 종종 여러 해, 여러 생애를 빠르게 넘나드는 속도감 있는 소설이 탄생했다. 그러나 그것은 종종 자세하고 장황한 설명으로 느려지거나 평범한 언어로 무뎌진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 존 밴빌(‘신들은 바다로 떠났다’)과 문장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아직 멀었다고 주저 없이 시인한다. “나는 절대 그런 작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현재의 작가 야나기하라도 상당히 흥미롭다. 그것은 일정 부분 특정 주제에 관해 특정한 방식으로 글을 쓰도록 문예창작학계의 강압이나 부추김을 받은 적이 없었다는 행운에서 기인할지 모른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모르면 상당히 자유롭다.” 끝없는 여행벽도 있다. 그녀가 “한자리에 안주하지 못하도록” 하는 흥미로운 기질의 힘이다. 그것은 다른 작가들에게서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성향이기도 하다.
점심식사가 끝날 무렵이 되자 레스토랑 손님들이 빠져나가고 오후의 자몽 빛 햇살이 실내를 채운다. 그제야 기본적인 의문이 마침내 머리에 떠올랐다. 소설 제목을 왜 ‘작은 삶’이라고 했는가? 어쨌든 그녀가 기술하는 삶(즉 주드의 인생)은 문학적 성취의 어떤 직유적 또는 비유적 잣대에 비춰봐도 결코 작지 않다. 그것은 소품이 아니라 벽화다. 아이러니를 의도한 건가?
그렇지 않다. “모든 삶은 작다”고 그녀가 단언한다. 그녀는 본질적으로 인생의 근본적인 허무에 경도된 비극 작가다. 하지만 그녀는 그 무상함에 문예의 옷을 입혀 솔깃할 뿐 아니라 빠져들게 만든다. “삶은 모두 죽음과 불행으로 끝을 맺는다. 그래도 어쨌든 우리는 살아간다”고 그녀가 말했다. 이는 ‘숲 속’에서 불운한 주인공이 하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매번 끝은 있었다. 하지만 행복한 끝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동화는 마더구스(Mother Goose, 영국 전승동요)라기보다는 전도서(Ecclesiastes,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의 색깔이 더 짙다.
이제 레스토랑이 거의 비어간다. 우리도 끝을 맺을 때가 왔다. 맨해튼의 미디어 업계 가십 몇 가지를 주고받는다. 드라마 ‘걸스(Girls, 20대 젊은 여성들 이야기)’가 걸작 드라마라는 데 의견을 같이 한다. 젊음의 공포를 솔직히 다뤘다고.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늙었다는 의미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 모두 죽는다. 야나기하라도, 한나 호바트(‘걸스’ 캐릭터)도, 나도, 그리고 지금은 하릴없이 생선 살점을 내려다 보고 있는 초밥 요리사도 모두. 세상은 어려운 진실들로 가득하다. 야나기하라는 그것들을 피하지 않고 맞선다. 하지만 마침내 계산서가 나오고, 농담, 이어 시간이 얼마나 늦었는지 깨달음이 찾아온다. 우리의 삶은 작지만 충만하다. 우리는 맨해튼으로, 흠잡을 데 없는 오후 햇살의 끝자락 속으로 되돌아간다.
- 번역 차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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