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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풀이되는 그리스의 비극

되풀이되는 그리스의 비극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옛 유럽중앙은행(ECB) 앞에 세워진 유로화 조각상이 보수 공사에 들어갔다
그리스의 인기 배우 안토니스 카페트조풀로스(63)는 아테네 중심가의 테크노폴리스 문화센터의 카페에 앉아 그리스가 겪는 역경의 역사를 간략하게 짚었다. “그리스는 실패한 국가다. 1830년대 독립 직후부터 그랬다. 우리가 원했던 나라를 건설하지 못했다. 프랑스에는 혁명과 계몽주의가 있었지만 그리스는 그런 게 없었다. 우린 언제나 구식 오스만 제국과 현대 유럽 사이에서 타협하려고 했다.”

모더니즘과 고색창연한 신화가 충돌한 싸움에서 늘 신화가 승리했다. 카페트조풀로스는 “우리의 담론은 국가 자체가 아니라 국가로서 갖는 가치와 고대 역사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물론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도 이유가 된다. 개혁을 시도할 때마다 새 정부는 이전 정부가 문제를 방치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스에서 어떤 일이든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새로운 규정 아래 구체제의 층이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카페트조풀로스는 아테네 부시장으로 시정에 참여했다. 변화를 이끌어내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스가 유럽연합(EU)에 가입했을 때 돈이 엉뚱한 사람들에게 흘러 들어가 졸부 엘리트층이 등장했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운 계층이 등장했다. 부패하지 않았고 개혁을 원하며 그리스가 국가로서 기능할 수 있기를 바라는 계층이다. 그들이 아직 뭉치진 않았지만 각박한 현실에 직면해 앞으로 단합할 것이다.”

그리스는 지난 7월 5일 국민투표에서 국제채권단이 추가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긴축안을 거부했다. 그러나 곧바로 냉혹한 현실에 부닥쳤다. EU 지도자들이 추가 구제금융보다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가 더 낫다고 판단하면 ‘그렉시트’는 현실화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만약 추가 구제금융이 합의된다면 일부 부채의 탕감과 긴축 프로그램의 완화가 포함될지 모른다.

어느 쪽이든 새로운 그리스의 건설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 고역이 될 것이다. 그리스 위기는 역사적인 뿌리가 깊다고 그리스 일간지 카티메리니의 야니스 팔라이오로고스 기자가 지적했다. “그리스인은 서방을 두려워하고 의심한다. 세계화와 변화를 겁낸다. 우리의 허세 이면에는 열등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린 고대 세계에서 많은 것을 물려받았지만 현대화를 이루지 못했다. 우리는 자신의 결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이제 그 결점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른 사람을 탓한다.”

그리스는 수세기 동안 외부 세력의 지배를 받으면서 국민과 국가 사이의 유대가 끊어졌다. 탈세하고 국가를 속이는 전통이 애국적인 의무가 됐다. 그리스는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다가 1829년 독립했다. 초대 행정수반이던 이오아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는 중앙집권식 현대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막강한 지방 군벌들이 반발하면서 그는 결국 1831년 암살당했다. 다음해 그리스 최초의 현대 국왕 오토가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독일 바이에른 출신의 왕자였다.

아테네의 한 은행 앞에서 예금을 인출하기 위해 기다리다가 지쳐 은행 직원과 언쟁하는 고령자들.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1923년 터키에서 그리스인 수십만 명이 추방됐고 터키인은 그리스를 떠나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리스인은 나치에 점령당해 갖은 고초를 겪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로 ‘위험한 국민(Dangerous Citizens: The Greek Left and the Terror of the State)’의 저자인 네니 파누르기아는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된 잔해 위에 그리스가 세워졌다”고 말했다. “철도도 도로도 없었다. 다리는 폭파됐다. 사회기반 시설이 완전히 무너졌다. 전쟁과 기아, 보복 행위로 40만 명이 희생됐다. 재정적으로 완전히 파괴된 상태에서 내전까지 겪었다.”

그리스 공산당이 일으킨 내전은 1945년부터 거의 5년 동안 지속됐다. 그 내전의 심리적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다. 1967∼1974년 미국의 지지를 받는 군사정권이 그리스를 통치했다. 이제 그리스는 부채 위기를 ‘트로이카’로 알려진 국제채권단[국제통화기금(IMF), EU, 유럽중앙은행(ECB)]과 특히 독일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트로이카에 맞서는 싸움은 역사적인 독립 투쟁의 맥락으로 이어졌다. 그리스 역대 정부의 잘못이 무엇이었든 대다수 그리스인에겐 긴축정책이 원수였다. 실업률과 빈곤률이 치솟았다. 지중해의 쾌활함 이면엔 암울한 절망감이 흐른다.

컬럼비아대학 교수로 ‘꿈의 나라(Dream Nation: Enlightenment, Colonization and the Institution of Modern Greece)’의 저자인 스타티스 구르구리스는 “강대국들이 다른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상황으로 되돌아간 느낌이 팽배하다”고 말했다. “그리스가 부채를 갚지 않으려 한다는 주장은 과장됐다. 부채를 상환하고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모든 문제는 외부의 강요 탓이다. 긴축정책은 그리스인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겼다. 그러나 긴축 프로그램이 시행되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그 결과 부당하다는 느낌이 커졌다. 그들은 우리가 무모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은 독일이 그리스를 무모하게 대한다.”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았고 또 다시 포위당했다고 느끼는 그리스인으로선 음모론에 빠져들기 쉽다. 그리스의 유대인은 홀로코스트 당시 대부분 희생돼 이제 몇 천명만 남았다. 그런데도 반인종주의연맹(ADL)에 따르면 그리스인의 69%는 반유대인 감정을 갖고 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비율이다.

아테네의 투자은행 그룹 악시아 캐피털 마켓츠의 콘스탄티노스 쿠포폴루스 대표는 “전 세계가 우리를 적대시하며 파괴하려 한다는 음모론이 성행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리스의 경제적 무기력을 외세 탓으로 돌리는 사고방식에 강한 반감을 가진 신세대 사업가다. “그리스인에겐 유대인, 미국인 등 늘 잘못을 탓할 상대가 있다. 지금은 독일인이다. 그리스인은 열등감을 우월의식으로 포장한다. 우리는 세계가 우리에게 빚졌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사실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뭔가 해야 한다.”

사회주의 정당 파소크와 보수 정당 신민주당이 수십 년 동안 권력을 나눠가진 결과 서로 뒤를 봐주고 눈 감아주는 문화가 생겼다고 팔라이오로고스 기자가 말했다. “두 정당이 번갈아 권력을 잡고 특권을 누리다 보니 그리스인이 국가에 충성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들은 ‘정부가 사복을 채우는데 왜 내가 세금을 내야 하나’라고 생각한다.”

지난 7월 5일 국민투표에서 국제채권단의 긴축 요구안이 거부됐다는 결과에 지지자들이 환호했다.
부패한 지배 계층을 향한 분노가 고조되면서 지난 1월 급진좌파연합 정당 시리자가 급부상해 우익 독립그리스당과 손잡고 새 정부를 탄생시켰다. 아테네에서 가까운 피레우스항 부근의 빈곤 지역 드라페트소나에서 시의원으로 활동하는 엘레니 키라마르기우(34)는 “시리자 정치인은 구식 정치인과 다르다”고 말했다. “이전 정부들은 민생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시리자는 빈곤과 실업에 신경 쓴다. 그들은 실업자와 빈민층의 구직 프로그램도 실시한다.” 드라페트소나에선 그런 관심이 절실하다. 이전에 일자리가 많았던 가죽·시멘트·비료 공장이 문을 닫았다. 실업률이 높고 사회적 박탈감이 팽배하며 이민자도 많다.

그런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공동체 의식은 여전히 강하다고 키라마르기우 의원은 말했다. “학교 공동체가 서로 돕는다. 좀 더 여유 있는 가정이 가난한 가정에게 베푼다.” 그는 이번 국민투표 결과에 만족한다. “재정 문제만이 아니라 미래까지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다. 강대국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 재정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아테네 북부 교외 도시 키피시아는 드라페트소나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조용하고 가로수가 늘어선 거리엔 고급 아파트와 우아한 빌라가 즐비하다. 2009∼2011년 총리를 지낸 게오르기우스 파판드레우 같은 정·재계 엘리트가 사는 곳이다. 파판드레우 전 총리는 노련한 정치인으로 정권을 잡았지만 그 역시 국가의 낭비벽에 충격 받았다. “공무원이 몇 명이나 되는지 물었는데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고 그는 말했다. 알아본 결과 인구 1100만 명인 나라에 공무원이 71만6000명이었다. 그에 비해 인구 6400만 명인 영국에는 공무원이 44만7000명이다. 파판드레우 전 총리는 집권 2년만에 공무원을 56만 명으로 줄였다. 아직도 많은 편이지만 이젠 매년 정확한 인원수가 집계된다.

정치가 불안정하지만 좌익과 우익은 현 상태를 지속하긴 어렵다는 데 동의한다. 파판드레우 전 총리는 “우리가 원하는 변화를 이루려면 근본적인 구조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금이 실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세제를 고쳐야 한다. 부패와 높은 세금이 더 많은 부패를 부른다. 재산세와 사치세를 도입했지만 충분치 않았다.”

유로존을 떠나선 안 된다는 점엔 그리스인 모두가 동의한다. 옛 통화 드라크마로 돌아가면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큰 재앙이 닥친다. 통화의 급격한 평가절하가 뒤따를 것이라고 파판드레우 전 총리는 지적했다. “5년 전에 드라크마화로 돌아갔다고 해도 엄청난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지금은 훨씬 더 하다.”

그러나 관광객에겐 그리스는 여전히 휴가의 천국이다. 쾌청한 날씨와 낭만적인 해변에다 문화와 역사가 풍요롭다. 사람들이 정이 많고 친절하다. 그들은 현실에 적응해간다.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선 광경을 제외하고는 아테네의 삶은 이전처럼 계속된다. 기오르고스 카미니스 아테네 시장은 “누구도 지금의 상황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이다. 하지만 시민들이 잘 대처하고 있다. ATM에서 한도액 60유로를 출금하려고 인내심 있게 줄 서서 기다린다. 아테네엔 아직도 관광객이 보고 체험할 게 숱하다.”

- ADAM LEBOR NEWSWEEK 기자, 번역 이원기
 [박스기사] 독일은 그리스 훈계할 처지 아니다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 피케티 교수가 지난해 9월 방한해 강연했다.


‘21세기 자본’의 피케티 교수, 역사상 외채 갚지 않은 대표적 국가라고 지적해부와 소득 불균형을 비판한 2013년 저서 ‘21세기 자본’으로 세계적인 스타 경제학자로 부상한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학 교수가 그리스 부채 위기에서 독일의 역할을 이야기했다. 그는 독일 주간신문 디자이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독일이 유럽과 유럽의 이상을 파괴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놀라울 정도로 역사에 무지한 결과다. 사실 독일은 다른 나라를 훈계할 입장이 아니다.”

그는 독일이 그리스에 IMF가 제공한 차관을 상환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독일은 역사상 외채를 갚지 않은 대표적인 국가였다. 이런 측면에서 독일의 과거는 현재의 독일인에게 매우 중요하다.” 또 독일이 그리스의 재정위기에서 득을 보고 있다고도 비난했다. “현재 독일은 그리스에 상대적으로 높은 금리로 차관을 제공하면서 이득을 챙긴다.”

그리스는 최근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국제채권단의 추가 긴축 요구를 거부했다. 국제채권단과의 협상에서 마찰을 빚어온 강경파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재무장관은 자신이 원한 투표 결과가 나왔음에도 정부의 협상력 강화를 위해 사임했다. 그는 “이번 국민투표가 유럽의 소국이 부채의 굴레에 대항해 분연히 일어선 유일무이한 순간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피케티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경제기적’이 부채 탕감을 기반으로 이뤄졌다고 지적했다. “독일은 다른 나라에 부채를 갚으라고 자주 강요했다. 예를 들면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후 프랑스에 거액의 전쟁 배상금을 요구해 받아냈다. 프랑스는 그 부채로 수십 년 동안 고통 받았다.”

피케티 교수는 부채를 상환하는 방법은 많다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해결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리스를 유로존에서 내쫓으려는 사람은 역사의 쓰레기 더미에 오를 것이다. 메르켈 총리가 독일 통일을 이룬 헬무트 콜 전 총리처럼 역사책에서 자리를 확보하려면 그리스 문제의 해법을 강구해야 한다.”

이전에도 그리스의 부채 위기가 역사와 비교된 적이 있다. 그리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점령에 따른 배상금 2787억 유로를 지불하라고 독일에 거듭 요구했다. 그러나 독일 정치인들은 “터무니없다”며 일축했다.

한편 에마누엘 마크롱 프랑스 경제장관은 제1차 세계대전 종식 후 패전국 독일처럼 그리스를 처벌해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독일에 가혹한 배상 책임을 물었던 1919년의 베르사이유 조약 사례를 경계해야 한다.” 역사학자들은 승전국들이 베르사이유 조약에 따라 독일에 거액의 전쟁배상금을 요구했다가, 삶이 궁핍해진 독일인의 분노를 불러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정권을 탄생시켰다고 지적했다.

― FELICITY CAP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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