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출 PG홀딩스그룹 회장
박기출 PG홀딩스그룹 회장
메르스가 한국을 강타하던 지난 6월 23일. 공항도 시내도 한적한 이날 16개국 20여 명의 마케터가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박기출 회장이 이끄는 세계한인무역협회, 월드옥타의 회원들이었다. 자동차부품 제조 회사인 PG그룹 박기출(59) 회장은 40대 중반에 대기업 지사장 자리를 마다하고 말레이시아에서 사업을 시작해 베트남, 한국, 러시아에 공장을 세운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성공한 한상(韓商) 중에서도 톱 클래스에 꼽히는 기업인이다.
박기출 회장의 성공 스토리는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 World Federation Of Overseas Korean Traders Associations)와 함께한다. 그는 지난해 10월 월드옥타 회장에 당선됐다. 월드옥타는 국내 기업의 해외지사를 자처하며 비즈니스를 연결해주는가 하면, 모국 청년들의 해외 취업을 돕고 있다. 실례로 지난 6월 입국한 한상 마케터들은 수출 기업들이 몰려있는 부산 지역 중소기업들의 해외마케터로 활동했다. 올 상반기에 해외 기업의 인턴으로 진출한 한국 청년 36명도 월드옥타 네트워크를 활용했다. 2012년부터 지금까지 73명의 한국 청년들이 월드옥타를 통해 해외 기업에 취직하는 성과도 올렸다. 이처럼 70~80년대에 이민을 떠나 세계를 무대로 사업을 하며 기반을 잡은 한상들은 월드옥타를 중심으로 모국과 세계를 잇겠다는 포부를 잊지 않고 실행으로 옮기고 있다. 박 회장은 “한상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민 1세대와 이민 2·3세대, 한국 기업과 해외 시장, 한국 청년들과 해외 기업을 잇는 가교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상들이 경제 한류의 첨병에 서겠다는 것이다. 박기출 회장과의 인터뷰는 그가 중국 심천을 거쳐 일본 동경과 오사카에서 입국한 7월 초, 서울 무교동에서 이뤄졌다. PG그룹의 한국 회사인 셀맥인터내셔날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박 회장은 월드옥타의 주요 프로그램인 ‘차세대무역스쿨’ 참석차 6월부터 8월까지 해외 출장이 줄줄이 계획돼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일정을 마치고는 7월 중순에 미국 LA와 브라질 상파울루에 들렀다 뉴욕을 거쳐 스톡홀름으로 떠난다고 했다. 인터뷰 중간 중간 월드옥타를 이야기할 때 박 회장의 눈빛은 빛났다. 그는 “세계 곳곳에 한상들이 자생적으로 조직을 만들어 고국인 대한민국과 상생하겠다는 조직이기 때문에 우리 조직을 홍보하는 일은 언제나 신난다”고 말했다. 바쁜 일정 중에도 포브스코리아가 박 회장을 만났을 수 있었던 이유다. 대신 그는 자신의 성공담을 보도하겠다는 모 방송프로그램의 출연 제의는 정중히 거절했다. 한국에는 큰 기업인이 많은데 자신이 기업인으로 나서기는 민망한 일이라고 일축했다. 그의 남다른 겸손함과 애국심이 읽혀졌다.
그는 우선 중국 심천과 일본 도쿄와 오사카를 다녀온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안타까움과 감동이 교차하는 출장이었다.” 일본에서 한류가 한풀 꺾이면서 막걸리 열풍을 일으켰던 ‘이동재팬’의 매출이 30% 줄었다. 김덕홍 대표가 운영하던 10여 개의 한류백화점도 파산했다. 한류 붐을 타고 승승장구하던 한상들이 한일관계가 경색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더라는 얘기였다. 박 회장은 반대로 “가슴 뭉클한 감동도 안고 돌아왔다”라며 일본 후쿠오카와 고베, 오사카 지역을 아우르는 관서 지역의 월드옥타 차세대 무역스쿨에서 보고 들은 바를 얘기했다. 한국말도 잘 못하는 교포 3세대, 4세대들이 애국가를 따라 부르고 ‘차세대 무역스쿨’에 오기를 잘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박 회장은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부모님의 나라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흩어져 살고 있지만 동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을 때, 공감하는 재외동포 청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세계 곳곳에 사는 동포 기업인들이 한국 중소기업의 수출을 돕고, 대한민국의 상품을 세계에 파는 비즈니스 관계를 맺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박 회장이 요즘 자주 하는 생각이다. 그는 “애국이 따로 있나? 월드옥타가 하는 일은 교포 3, 4세대에 대한민국을 알리는 일이 된다. 이들과 대한민국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거듭 말했다.
박 회장의 성공스토리는 2000년, 싱가포르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시작된다. 그 전에 그는 기업체의 상사원이었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쌍용건설에 입사한 그는 1985년 말레이시아 지사로 발령이 났다. 이후 8년 동안 싱가포르 주재원으로 일하며 57층 높이의 센텍시티 건설에 참여했다. 능력을 인정받아 이탈리아 건축회사인 퍼마스트리사의 지사장으로도 일했다. 하지만 뭔가 가슴에 꿈틀거리는 게 있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후회도 많이 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를 간절히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보자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기자가 보기에 그저 사람 좋은 학자 풍의 박 회장에게서 기업가의 기질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첫 사업 아이템은 컴퓨터 부품회사였다. 사업이 잘 될 것이라는 싱가포르 친구의 말을 듣고 작은 컴퓨터 부품 회사를 인수했다. 하지만 경험 부족으로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사업 자금을 날리고 그는 좌절했다. 하지만 돌아갈 곳은 없었다. 재기해야겠다는 일념으로 해외 생활을 처음 시작한 말레이시아로 떠났다고 했다. 알고 지낸 지인의 사무실 한쪽에 달랑 책상 한 개와 전화기를 놓아두고 무작정 자신을 믿어줄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어느날, 한 구매 담당자로부터 자동차 시트에 들어가는 스프링을 구해줄 수 있겠느냐는 주문을 받았다. 앞 뒤 재보고 말고가 없었다. 무조건 “할 수 있다”고 했다. 사실 그는 스프링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러나 “예스”라고 답한 순간, 온몸의 세포가 이미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 근거 없는 자신감과 긍정 마인드는 박 회장의 성공 씨앗이나 다름없었다.
첫 주문을 받은 지 이틀 후, 그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천공단, 시화공단, 울산 대불공단을 다 뒤지고 다녔다. 스프링에 대해 까막눈인 그를 상대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묻고 다니는 그에게 드디어 스프링을 공급하겠다는 대표가 기적처럼 나타났다. 그렇게 박 회장은 1달러짜리 스프링을 성공적으로 납품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을 계기로 그의 눈에는 스프링이 아닌 자동차 시트가 눈에 들어오더란다. 1달러의 스프링에만 몰두했던 그가 1500달러의 시트 단가를 확인하고 ‘아차’ 싶었다. 곧바로 자동차 부품 시장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동차 시트를 납품할 회사를 찾아 나섰다. 노력이 헛되지 않아 말레이시아 나자그룹의 부품공급계약서를 받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시트를 공급해줄 공장도, 시트를 생산할 공장 건립에 투자할 투자자도 구할 수가 없었다. 어렵사리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현지 은행을 찾아가 대출을 받았다. 하지만 또다시 문제가 생겼다. 짧은 시간 안에 공장 지을 부지를 확보하고, 생산 설비를 갖추는 등 경영자로서 직원들과 호흡을 맞추는 일이 만만치 않았던 것. 시트 납품까지 주어진 시간은 겨우 5개월. 말레이시아는 무더운 나라였고, 한국 노동자들처럼 우수한 노동자도 드물었다. 그는 현장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공장 설립에 매진했다. 그런 노력 끝에 구매담당자와 약속을 지켜냈다.
“쌍용건설에서 근무했을 때의 경험이 두려움을 없애 주더라” 박 회장의 회고다. “그때는 신입사원 시절인데, 용평 스키장 부대 시설을 신축하느라 한겨울에도 밤낮 없이 일을 밀어붙여 프로젝트를 마쳤다.”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기질, 이것은 어쩌면 박 회장의 타고난 성공 DNA였을지도 모른다. 두 차례의 납품을 계기로 박기출은 말레이시아에서 약속을 지키는 사업가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업가에게 신뢰는 곧 기회다. 2003년, 고객사인 나자-기아에 자동차 전선 세트를 공급하는 업체의 부도로 와이어 하네스를 제조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박 회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90일 만에 공장과 기계설비를 완비했다. 그때 세운 회사가 PNA테크놀로지다. 황무지에 세워진 공장에서 와이어하이네스를 생산하게 된 것이다. 그가 또 한 번의 신화를 쓰자 업계 사람들은 그에게 ‘불가능이 없는 Mr.Park’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후 회사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자동차 오디오·비디오를 생산하는 포브스일렉트로닉을 설립하면서 회사는 성장 곡선을 그었다. 6년 만에 종업원 1500명, 매출 1000억 원의 중소기업으로 성장했다.
가파른 성장을 이끈 박 회장은 2009년 금융위기도 정면 돌파하자는 목표로 베트남에 자동차 시트 공장을 새로 세웠다. 연이어 2010년에는 러시아에 시트 공장을 설립한다. 그의 전략은 주효했다. 베트남과 러시아에서 판매 순위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박 회장의 또다른 성공노하우는 ‘현지화’였다. 말레이시아는 이슬람의 나라다. 비즈니스가 느려지는 라마단 기간에 한국식으로 “하면 된다”, “빨리하자”고 하면 일이 될 리 없다는 것이다. “주문은 넘치는데 생산이 늦어 애가 탔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라마단 기간에는 낮에는 자고 밤에 작업하는 것이었다.” 박 회장이 강조한 현지화는 현지 직원을 고용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말이 통해야 하고, 현지 사람의 문화를 잘 이해하는 것이었다.
물론 박 회장의 사업이 탄탄대로만 걸었던 것은 아니다. 현지인 공장장이 박 회장 몰래 사고를 치기도 했고, 2011년에는 공장에 큰 화재가 발생해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누구나 망연자실할 상황이지만 그는 직원들을 위로했다. “불이 났다고 여러분의 기술까지 타버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더 좋은 기계설비로 더 빠르게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라고. 그리고 “회사의 발전이 곧 직원의 부(富)로 이어지도록 경영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있다. 고국의 도움 또한 그는 잊지 않는다. “한국 자동차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자연스레 우리 회사도 성장했다. 기술 또한 한국에서 전수받았다.” 눈코틀 새 없이 바쁜 박기출 회장이 월드옥타 일까지 맡은 이유는 분명해 보였다.
그는 말한다. “돈은 자기가 버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이 벌어주는 것이다”라고.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그에게 주변 사람들은 성공으로 가는 다리를 놓아주었다. 박 회장은 앞으로 동남아시아 전체로 사업 영토를 확장할 계획이다. 이를 바탕으로 싱가포르 증권거래소에 상장하는 것이 목표다. 단지 돈을 벌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사업가로서 본능적인 영토 확장의 꿈이라고 덧붙였다. 현실과 꿈 사이에서 절제하는 것, 이 또한 박 회장 자신에게 늘 주문하는 메시지다.
- 글 김성숙 포브스코리아 기자·사진 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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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출 회장의 성공 스토리는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 World Federation Of Overseas Korean Traders Associations)와 함께한다. 그는 지난해 10월 월드옥타 회장에 당선됐다. 월드옥타는 국내 기업의 해외지사를 자처하며 비즈니스를 연결해주는가 하면, 모국 청년들의 해외 취업을 돕고 있다. 실례로 지난 6월 입국한 한상 마케터들은 수출 기업들이 몰려있는 부산 지역 중소기업들의 해외마케터로 활동했다. 올 상반기에 해외 기업의 인턴으로 진출한 한국 청년 36명도 월드옥타 네트워크를 활용했다. 2012년부터 지금까지 73명의 한국 청년들이 월드옥타를 통해 해외 기업에 취직하는 성과도 올렸다. 이처럼 70~80년대에 이민을 떠나 세계를 무대로 사업을 하며 기반을 잡은 한상들은 월드옥타를 중심으로 모국과 세계를 잇겠다는 포부를 잊지 않고 실행으로 옮기고 있다. 박 회장은 “한상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민 1세대와 이민 2·3세대, 한국 기업과 해외 시장, 한국 청년들과 해외 기업을 잇는 가교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상들이 경제 한류의 첨병에 서겠다는 것이다.
중국과 북남미, 북유럽, 아세안을 누비는 한상
그는 우선 중국 심천과 일본 도쿄와 오사카를 다녀온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안타까움과 감동이 교차하는 출장이었다.” 일본에서 한류가 한풀 꺾이면서 막걸리 열풍을 일으켰던 ‘이동재팬’의 매출이 30% 줄었다. 김덕홍 대표가 운영하던 10여 개의 한류백화점도 파산했다. 한류 붐을 타고 승승장구하던 한상들이 한일관계가 경색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더라는 얘기였다. 박 회장은 반대로 “가슴 뭉클한 감동도 안고 돌아왔다”라며 일본 후쿠오카와 고베, 오사카 지역을 아우르는 관서 지역의 월드옥타 차세대 무역스쿨에서 보고 들은 바를 얘기했다. 한국말도 잘 못하는 교포 3세대, 4세대들이 애국가를 따라 부르고 ‘차세대 무역스쿨’에 오기를 잘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박 회장은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부모님의 나라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흩어져 살고 있지만 동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을 때, 공감하는 재외동포 청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세계 곳곳에 사는 동포 기업인들이 한국 중소기업의 수출을 돕고, 대한민국의 상품을 세계에 파는 비즈니스 관계를 맺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박 회장이 요즘 자주 하는 생각이다. 그는 “애국이 따로 있나? 월드옥타가 하는 일은 교포 3, 4세대에 대한민국을 알리는 일이 된다. 이들과 대한민국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거듭 말했다.
박 회장의 성공스토리는 2000년, 싱가포르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시작된다. 그 전에 그는 기업체의 상사원이었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쌍용건설에 입사한 그는 1985년 말레이시아 지사로 발령이 났다. 이후 8년 동안 싱가포르 주재원으로 일하며 57층 높이의 센텍시티 건설에 참여했다. 능력을 인정받아 이탈리아 건축회사인 퍼마스트리사의 지사장으로도 일했다. 하지만 뭔가 가슴에 꿈틀거리는 게 있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후회도 많이 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를 간절히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보자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기자가 보기에 그저 사람 좋은 학자 풍의 박 회장에게서 기업가의 기질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전 재산을 날리고 싹띄운 성공 씨앗
첫 주문을 받은 지 이틀 후, 그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천공단, 시화공단, 울산 대불공단을 다 뒤지고 다녔다. 스프링에 대해 까막눈인 그를 상대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묻고 다니는 그에게 드디어 스프링을 공급하겠다는 대표가 기적처럼 나타났다. 그렇게 박 회장은 1달러짜리 스프링을 성공적으로 납품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을 계기로 그의 눈에는 스프링이 아닌 자동차 시트가 눈에 들어오더란다. 1달러의 스프링에만 몰두했던 그가 1500달러의 시트 단가를 확인하고 ‘아차’ 싶었다. 곧바로 자동차 부품 시장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동차 시트를 납품할 회사를 찾아 나섰다. 노력이 헛되지 않아 말레이시아 나자그룹의 부품공급계약서를 받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시트를 공급해줄 공장도, 시트를 생산할 공장 건립에 투자할 투자자도 구할 수가 없었다. 어렵사리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현지 은행을 찾아가 대출을 받았다. 하지만 또다시 문제가 생겼다. 짧은 시간 안에 공장 지을 부지를 확보하고, 생산 설비를 갖추는 등 경영자로서 직원들과 호흡을 맞추는 일이 만만치 않았던 것. 시트 납품까지 주어진 시간은 겨우 5개월. 말레이시아는 무더운 나라였고, 한국 노동자들처럼 우수한 노동자도 드물었다. 그는 현장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공장 설립에 매진했다. 그런 노력 끝에 구매담당자와 약속을 지켜냈다.
“쌍용건설에서 근무했을 때의 경험이 두려움을 없애 주더라” 박 회장의 회고다. “그때는 신입사원 시절인데, 용평 스키장 부대 시설을 신축하느라 한겨울에도 밤낮 없이 일을 밀어붙여 프로젝트를 마쳤다.”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기질, 이것은 어쩌면 박 회장의 타고난 성공 DNA였을지도 모른다.
기회를 가능성으로 바꾼 타고난 승부사
가파른 성장을 이끈 박 회장은 2009년 금융위기도 정면 돌파하자는 목표로 베트남에 자동차 시트 공장을 새로 세웠다. 연이어 2010년에는 러시아에 시트 공장을 설립한다. 그의 전략은 주효했다. 베트남과 러시아에서 판매 순위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박 회장의 또다른 성공노하우는 ‘현지화’였다. 말레이시아는 이슬람의 나라다. 비즈니스가 느려지는 라마단 기간에 한국식으로 “하면 된다”, “빨리하자”고 하면 일이 될 리 없다는 것이다. “주문은 넘치는데 생산이 늦어 애가 탔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라마단 기간에는 낮에는 자고 밤에 작업하는 것이었다.” 박 회장이 강조한 현지화는 현지 직원을 고용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말이 통해야 하고, 현지 사람의 문화를 잘 이해하는 것이었다.
물론 박 회장의 사업이 탄탄대로만 걸었던 것은 아니다. 현지인 공장장이 박 회장 몰래 사고를 치기도 했고, 2011년에는 공장에 큰 화재가 발생해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누구나 망연자실할 상황이지만 그는 직원들을 위로했다. “불이 났다고 여러분의 기술까지 타버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더 좋은 기계설비로 더 빠르게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라고. 그리고 “회사의 발전이 곧 직원의 부(富)로 이어지도록 경영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있다. 고국의 도움 또한 그는 잊지 않는다. “한국 자동차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자연스레 우리 회사도 성장했다. 기술 또한 한국에서 전수받았다.” 눈코틀 새 없이 바쁜 박기출 회장이 월드옥타 일까지 맡은 이유는 분명해 보였다.
그는 말한다. “돈은 자기가 버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이 벌어주는 것이다”라고.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그에게 주변 사람들은 성공으로 가는 다리를 놓아주었다. 박 회장은 앞으로 동남아시아 전체로 사업 영토를 확장할 계획이다. 이를 바탕으로 싱가포르 증권거래소에 상장하는 것이 목표다. 단지 돈을 벌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사업가로서 본능적인 영토 확장의 꿈이라고 덧붙였다. 현실과 꿈 사이에서 절제하는 것, 이 또한 박 회장 자신에게 늘 주문하는 메시지다.
- 글 김성숙 포브스코리아 기자·사진 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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