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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크래시] - 이기주의 철학이여, 안녕!

[수퍼크래시] - 이기주의 철학이여, 안녕!

2008년 10월 9일자 뉴욕타임스에는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 의장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기사가 실렸다. 뉴욕타임스는 1987년부터 20년 가까이 ‘세계 경제 대통령’으로 군림했던 ‘그린스펀의 유산(Greenspan Legacy)’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몰고온 주범이라고 비난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그린스펀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며, 마녀 사냥에 가깝다. 하지만, 그린스펀의 원죄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 역시 2008년 말 미국 국회 청문회에 출석해 유명한 진술을 남겼다. “저는 조직이, 구체적으로 말하면 은행이 이익을 추구하면 자연스럽게 주주와 자본을 가장 효율적으로 보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전제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한 의원이 물었다. “그린스펀씨는 본인의 가치관과 이념이 잘못되었고, 생각대로 작동하지 않았음을 깨달은 것인가요?” 그린스펀은 침통한 표정으로 답했다. “정확히 그 이유 때문에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40년 넘게 제 세계관과 이념이 훌륭하게 작동한다는 상당한 증거를 확보했다고 믿어왔었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그린스펀은 레이건 정부 이래 시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신봉했고, 주도했다. 그 결과가 지난 수년 간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의 세계관과 이념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수퍼크래쉬]는 월스트리트 종사자들의 노골적인 탐욕과 미약한 정부 규제 등이 뒤엉켜 세계 경제를 무너뜨린 과정을 설명하고, 이 과정에서 그린스펀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조명한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득세한 우파·보수주의 이념과 통제받지 않은 시장의 권력이 어떻게 세계를 불평등의 나락으로 빠뜨렸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저자는 지난 30년간 전 세계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의 사상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한 인물에 주목한다. 바로 소설 [아틀라스]를 쓴 작가이자 사상가인 아인 랜드다. 저자는 아인 랜드를 일컬어 “현대 사회에서 자유 무역, 민영화, 규제 철폐, 민간 부문의 역할을 장려함으로써 어떤 식으로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를 승리로 이끌었는지 이해하는 관문”이라고 말했다.

아인 랜드는 1905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알리사 로젠바움이다. 부유층이던 아인 랜드의 집안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몰락했고, 그는 1926년 스물한 살 나이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던 아인 랜드는 첫 장편소설 [살아가는 우리]를 통해 공산주의 치하에서 고초를 겪는 중산층의 현실을 묘사했다. 그는 이 소설에서 공공의 선을 내세워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체제는 반드시 망한다는 신념을 드러냈다. 랜드는 개인의 권리가 가장 중요하고 어떤 경우에도 다수의 이름으로 침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신념은 그의 대표작 [파운틴 헤드]에서 더욱 강렬해지고 뒤틀린다. 랜드는 이 소설에서 하워드 로크라는 인물을 통해 통해 그의 신념을 설파한다.

“타인의 이익을 위해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열등한 인간으로 사는 길이다. 이기심은 인간의 가장 선하고 중요한 미덕이고 이타주의는 개인을 집단의 노예로 전략시키는 책략이다. 진정한 개인은 자기 마음과 정신을 토대로 자신만의 원칙을 지키며 살고, 이타적으로 살아가는 이른바 ‘중고 인생’은 정부의 힘을 등에 업고 남의 능력에 빌붙어 사는 기생충이다.”

이후 랜드를 추종하는 이들이 늘기 시작했다. 랜드는 그들을 모아 ‘집단’이라는 토론모임을 만들었고, ‘객관주의 철학’을 정립했다. 이 철학은 인간이 이성적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독립성과 개인주의가 필요하며, 따라서 이성적 인간에게는 이기주의 윤리가 적합하다는 가치를 담은 것이었다. 그리고 랜드의 철학이 집대성된 것이 그 유명한 소설 [아틀라스]다. [아틀라스]는 미국이 집단주의 때문에 멸망한다는 내용이다. 랜드는 정부를 부정했고, 세금 징수에 반대했다. 랜드는 아무런 제약이 없는 자유시장경제 자본주의가 선이고, 그 과정에서 무능력한 빈곤층은 자신의 게으름이 자초한 결과로 규정했다. 이 토론 모임의 초기 멤버가 바로 앨런 그리스펀이었다. 그린스펀은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된 후 직접 랜드를 언급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1966년 아인 랜드의 선집 [자본주의 : 알려지지 않은 이상]에 에세이 세 편을 실은 바 있다. 주요 내용은 이랬다. ‘정부 규제는 사회 도덕성의 붕괴와 같은 것이다. 모든 규제는 불필요하고 심지어 건축 법규도 필요하지 않다.’ 그가 왜 파생상품을 규제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982년 랜드가 폐렴으로 사망한 후,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그의 사상을 이어받아 규제 없는 자본주의가 가장 바람직하다는 사회적 세뇌에 몰두했고, 자신들의 이기심을 뒷받침하는 철학적·도덕적 근거로 삼았다. 랜드의 사상대로라면, 그들은 자신들보다 기회가 적어 가난한 이들에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정부의 규제가 없는 상황에서 기업가들이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선택을 할 것이라는 아인 랜드와 그린스펀의 믿음은 틀렸다. 그들은 이기심과 탐욕으로 세계를 위험에 빠뜨렸다. 복지를 줄이고, 임금을 낮추고, 정부는 뒤로 빠져야 완벽한 시장경제가 구현된다는 그들의 오랜 믿음은 오늘날 전 세계에 만연한 불평등을 나았다. 그렇게 이기주의의 시대는 세계를 지배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우파와 보수주의를 일방적으로 비판하고 좌파 이념을 설파하지는 않는다. 다만, 기득권이 지배하고 세뇌한 이 세상의 질서를 바꿔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묻고 있을 뿐이다. 만화로 그려진 [수퍼크래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제 우리는 이기주의 철학을 거부할 때가 되었다.’

- 김태윤 기자 kim.taeyun@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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