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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시장 붕괴의 역사

금융시장 붕괴의 역사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유럽에 국가부채 위기를 초래했다. 사진은 경제난으로 반정부 시위에 나선 그리스 시민들.
지난 8월 24일 상하이종합지수가 8.5% 하락해 3209포인트로 마감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하루 최대 낙폭이었다. 과대평가된 중국 주식의 고통스런 추락은 자유방임적인 시장과 계획경제 기반 전략이 엇박자를 낸 상징적 사건으로 기억될 성싶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주식시장 문제에 개입해 미봉책으로 땜질하려 했다. 일차적으로 중국 우량주에 많은 자본을 쏟아부어 시장을 떠받치려 했다. 그 뒤에는 투자자들이 하락 종목을 팔지 못하도록 했다.

이는 또한 과열되고 규모가 커진 그림자 금융(shadow banking, 엄격한 규제를 받지 않는 비제도권 금융) 활동의 위험성을 부각시킨다. 중국의 개인 투자자는 약 9000만 명에 달한다. 그들 중 다수가 각종 융자와 신용 혜택을 주식거래에 이용했다. 그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려면 필시 일단 출혈이 멈춰진 뒤 근본적인 규제제도의 개혁이 필요할 듯하다. 이번의 ‘블랙 먼데이’ 외에 기억할 만한 몇몇 금융위기를 돌아본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우리는 2007/2008년 금융위기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대공황 이후 최악의 시장붕괴로 간주되는 사건이다. 공식적으로 2008~2012년까지 이어진 글로벌 불황을 촉발하고 유럽에 국가부채 위기를 초래했다. 특히 그리스가 여전히 그 어디쯤에 발목 잡혀 있다.

이 같은 잇따른 사건의 원인은 복잡다단하다. 그러나 은행과 헤지펀드들이 파생상품 등을 섞어 유통시킨 구조화 채권 상품(structured debt products)이 주범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진다. 2004년 절정에 달한 미국 주택시장의 과열에서 비롯됐다. 이는 복합적으로 구성돼 재포장된 수많은 비우량주택담보채권상품이 금융 시스템에 만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주가폭락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결국에는 각국 정부가 구제금융을 쏟아부어 전체 금융 시스템의 붕괴를 막아야 했다.

은행가와 투자금융가들이 막대한 보너스를 받아 흥청망청했다는 사실은 이어진 내핍기간 동안 보통 사람들에게 쓰디쓴 입맛을 남겼다. 아마도 금융 시스템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가 이때 완전히 무너졌을 성싶다.
 2000/2001 닷컴 거품붕괴
새 천년에 접어들 즈음 TV를 틀면 프로그램 틈틈이 나오는 광고는 모두 예외 없이 이런저런 닷컴 기업들이었다. 그들은 회사명 앞에 ‘E’자를, 뒤에는 ‘닷컴’을 붙였다. 투자자들은 주가수익비율(PER) 같은 전통적인 기업 가치분석 척도 따위에는 완전히 흥미를 잃은 듯했다.

2000년 3월 10일 나스닥 주가가 5132.52 포인트로 천장을 쳤다. 온라인 기업들의 막연한 수익 모델이 무선기술에 대한 확신으로 날개를 달았다. 인터넷을 모바일 기기 시대로 이끌 차세대 기술로 각광받았다. 이 같은 점에서 이어진 주가폭락의 원인은 성급한 시장 기대와 어긋난 타이밍으로 귀결될 수 있다.

몇몇 기업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시가총액의 태반을 잃고도 여전히 안정성과 수익성을 유지한 기업도 있었다(시스코 시스템스의 주가는 86%나 하락하기도 했다). 한편 이베이와 아마존 같은 기업은 그 뒤로도 닷컴 거품 고점을 여러 차례 뛰어넘었다. 개인간 융자(P2P lending)처럼 새로 유행하는 분야에 집중된 오늘날의 수십억 달러 규모 신생벤처 그룹(일명 ‘유니콘’)이 새겨둬야 할 교훈이다.
 블랙 먼데이(1987)
문제가 발생한 정확한 날짜는 1987년 10월 19일이다. 홍콩에서 시작된 시장붕괴가 유럽과 미국으로 확산됐다. 주가는 빠르고 큰 폭으로 떨어졌다. 다우존스는 508포인트 하락해 1만7387.74포인트로 22%가 빠졌다. 월스트리트의 컴퓨터 프로그램 매매 시스템 전환이 최대 원인으로 지목됐다.

주가가 하락하는 동안에도 프로그램 매매 시스템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식 매도를 계속해 하락세를 부채질했다. 그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절망에 빠진 일반대중에게 전달됐다. 주가폭락을 초래한 투기 붐의 배후에 컴퓨터 매매 시스템이 있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주가가 폭락했지만 사실상 정상을 되찾는 과정이었다.
 일본 자산가격 거품(1986~2003)
일본은 20세기에 자타가 공인하는 경제강국이었다. 자동차 생산과 소비가전에서 세계를 이끌었다. 그러나 1986~1991년 경제에 거품이 잔뜩 올랐다. 뜨겁게 달아오르며 하루가 다르게 뛰어오르는 부동산 시장 전반의 자산가격과 주가 덕분이었다. 이 거품이 터지면서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 도래했다.

1990년에는 일본 니케이 지수가 고점 대비 반토막 나고 일본은행은 거듭 통화긴축을 실시했다. 일본 경제는 향후 10년 동안 하락세를 계속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부실채권의 무거운 짐에 헐떡여야 했다.
 1929년 월스트리트 주가폭락과 대공황
1929년 10월 24일 시작된 주식시장 붕괴는 ‘검은 화요일’로도 알려졌다. 미국 역사상 가장 참담한 피해를 초래한 사건이었다. 10년에 걸친 대공황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모든 선진공업국에 여파가 미쳤다.

월스트리트 주가폭락 이전의 10년은 ‘광란의 20년대’로 알려졌다. 무수한 탐욕과 과잉으로 점철된 전후 낙관주의의 시대였다. 대도시로의 이동이 이를 더욱 부채질하면서 모두가 산업화로 쏠렸다. 이촌향도 현상으로 농업이 크게 쇠퇴했다. 이는 훗날 대공황의 한 요인이 됐다. 많은 사람이 주가가 무한정 상승하리라고 기대하면서 월스트리트에 투기열풍이 불어닥친 시기이기도 했다.

1929년 3월 25일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경보를 발동했다. 많은 투자자가 일시에 주식 매도에 나서면서 짧은 폭락이 발생한 뒤였다. 그러나 내셔널 시티뱅크의 찰스 E 미첼 은행장의 약속이 이 같은 허약한 토대를 떠받치는 버팀목 역할을 했다. 2500만 달러의 신용을 제공해 또 다른 주가급락을 막겠다는 약속이었다.

저리신용을 남발하고 철강생산이 감소하는 등 불길한 조짐이 나타났지만 주가 상승세는 꺾이지 않았다. 활황세가 9년간 이어지면서 다우존스지수가 10배나 뛰었다. 1929년 6~9월에는 약 20% 상승했다.

그해 9월 20일 런던 증시가 공식적으로 폭락했다. 영국인 투자자 클래런스 해트리와 그의 측근들이 사기와 문서위조 혐의로 수감된 뒤였다. 이 사건으로 미국의 해외시장 투자가 감소했다.

- IAN ALLISON IBTIMES 기자 / 번역 차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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