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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눈동자에 건배!”

“그대 눈동자에 건배!”

잉그리드 버그만이 1944년 히치콕 감독의 영화 ‘백색의 공포’ 촬영장에서 그레고리 펙과 함께 아이스바를 먹고 있다.
이사벨라 로셀리니(63)는 모델과 배우, 작가, 감독으로서 놀라운 경력을 쌓았지만 그녀를 볼 때 어머니 잉그리드 버그만(1915~1982)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940년대를 주름잡은 스웨덴 출신의 위대한 배우 버그만은 ‘카사블랑카’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오명’ 등 걸작에서 불후의 명성을 얻었다. 한동안 로셀리니와 연인 관계였던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잉그리드 버그만의 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꼭 닮았다”고 말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하지만 로셀리니는 어머니를 도망쳐야 할 그늘로 보지 않고 늘 찬양했다. 올해 그녀는 어머니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일련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로셀리니의 전 남편인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이 야심 찬 국제적 기념사업에 큰 도움을 줬다. 그녀는 지난 8월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농장에서 뉴스위크와 전화 인터뷰를 하던 중 1980년대에 스콜세지가 그 아이디어를 내놓았다고 말했다. “뛰어난 영화역사학자인 스콜세지는 1982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내게 어머니의 작품과 관련된 자료를 모아 기록보관소를 만들라고 강력히 권했다.” 스콜세지는 로셀리니에게 웨슬리안대학 영화기록보관소 설립자이자 큐레이터인 제닌 베이싱어를 소개해줬다. 친지들의 기부로 자금을 모아 버그만 관련 사진과 영화, 편지 등을 수집해서 기록보관소를 만들자는 취지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수집한 자료의 양이 엄청나게 불어났다고 로셀리니는 말했다. 하지만 이 방대한 자료는 오랫동안 웨슬리안대학 기록보관소에 있어 수집가와 역사학자들만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로셀리니는 친구인 독일 출판업자 로타르 쉬르머[그녀는 자신의 회고록 ‘섬 오브 미(Some of Me)’의 독일 내 판권을 쉬르머에게 팔면서 그를 알게 됐다]에게 연락해 어머니의 인생에 관한 책을 펴내자고 제안했다.

지난 7월 말 출판된 ‘잉그리드 버그만: 사진에 담긴 인생(Ingrid Bergman: A Life in Pictures)’은 이 전설적인 여배우를 기리는 매혹적이고도 보물 같은 책이다. 출판된 적이 없는 사진 500여 장이 버그만의 친구와 연인들, 그리고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글 사이사이에 끼여 있다. 작가 존 업다이크와 사진가 로버트 카파의 글도 눈에 띈다. 로셀리니와 쉬르머는 2011년 이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웨슬리안대학에 보관된 자료와 게티 기록보관소의 자료를 샅샅이 뒤졌다. 두 사람은 언젠가 독일 뮌헨에서 책에 들어갈 사진과 자료를 선별해 줄여볼 생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3일 동안 작업하다 보니 양이 처음보다 더 늘어났다. “사진이 565장이나 됐다”고 로셀리니는 말했다. “쉬르머에게 ‘이걸 어떻게 하죠?’라고 물었더니 그가 ‘어떻게 되든 출판합시다!’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이 책에 ‘어머니의 바이블(Mama’s Bible)’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버그만이 두 번째 남편인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과 함께 쌍둥이 딸들의 첫돌을 축하하고 있다.
책은 스웨덴에서 보낸 버그만의 어린 시절 사진들로 시작한다. 카메라를 향해 과장된 몸짓을 하는 표정이 풍부한 어린 버그만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영화광들은 그녀가 할리우드에서 전성기를 맞고 세계적인 스타가 되기까지 무대 뒤편에서 찍은 사진들을 좋아할 듯하다(버그만과 그레고리 펙이 아이스바를 먹고 있는 사진은 가장 매력적인 사진 중 하나다). 책 후반부는 버그만의 영화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로베르토 로셀리니(이사벨라의 아버지)와의 사랑과 이별을 조명했다. 하지만 버그만이 말년에 시도했던 실험적인 프로젝트들도 놓치지 않았다. 책은 그녀가 67번째 생일인 1982년 8월 29일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에서 끝맺는다.

올가을 로셀리니는 버그만의 생애를 기리고 책의 출판을 기념하기 위한 순회여행을 시작한다. 지난 8월 29일에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버그만 회고전이 개막됐다(로셀리니는 2006년 MoMA에서 열린 아버지의 회고전에서 영화 몇 편을 소개했다). 버그만은 일찍이 이런 식의 사후 기념사업을 염두에 뒀던 듯하다. 로셀리니에 따르면 버그만은 오래 전에 4명의 자녀가 각각 어머니의 영화 3편씩을 골라 기념행사에서 소개하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로셀리니의 오빠 로베르토는 행사 참석을 거절했고 로셀리니와 두 자매(버그만이 스웨덴 의사 페테르 린트슈트룀과의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피아와 로셀리니의 이란성 쌍둥이 이소타)가 지난 8월 말 MoMA에서 버그만의 영화 몇 편을 소개했다.

대표작 ‘카사블랑카’는 물론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감독한 ‘불안’(1954)과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염소자리’(1949) 등 비교적 덜 알려진 작품들도 소개해 버그만의 작품 세계를 폭넓게 조명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1941)는 버그만의 ‘착한 여자’ 이미지를 깬 작품이다. “어머니는 이 작품에서 원래 정숙한 여인 역으로 캐스팅됐는데 빅터 플레밍 감독을 설득해 음탕한 매춘부 역할을 맡았다”고 로셀리니는 설명했다. “우리는 어머니의 모험 정신과 실험 욕구를 드러내주는 작품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난 9월 초 로셀리니는 영국 런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제레미 아이언스와 함께 버그만에게 바치는 일종의 연극 작품을 공연했다(두 사람은 최근 뉴욕의 브루클린 뮤직 아카데미에서도 이와 유사한 작품을 공연했다). 로셀리니는 지금은 절판된 버그만의 자서전 ‘마이 스토리(My Story)’(1979)의 일부를 낭독했다. 또 버그만과 그녀가 함께 일했던 유명인사들 사이에 오간 편지도 읽었다. 히치콕 감독과 배우 조셉 코튼(‘시민 케인’) 등이 대표적이다. 유럽 지역의 다음 기념행사는 버그만이 오랫동안 살았던 프랑스 파리에서 펼쳐진다. 로셀리니는 그곳에서 제라르 드파르디유, 파니 아르당 등 배우 친구들과 함께 버그만의 인터뷰를 낭독하고 그녀에 대한 개인적 기억을 나눈다.

로셀리니는 또 버그만의 미공개 영상을 상영할 계획이다.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영화 ‘스트롬볼리’와 ‘잔다르크’ 촬영장에서 찍은 영상과 홈 무비 등이다. “‘치킨(Chicken)’은 ‘우리 여자들(Siamo Donne)’(1953)이라는 영화의 한 에피소드”라고 로셀리니가 말했다. “우리 집에서 찍고 우리 형제들이 엑스트라로 출연했으니 홈 무비나 다름없다.” 그녀는 오는 10월 10일 로마를 마지막으로 공연 시리즈를 끝낼 계획이다. 이탈리아의 배우 겸 감독 크리스티안 데 시카가 특별 게스트로 출연한다.

영화 ‘시간의 문제’ (1975)에 딸 이사벨라 로셀리니(왼쪽)와 함께 출연한 버그만.
로셀리니는 이 공연 시리즈가 장르와 국경을 초월했던 버그만의 걸출한 경력을 기리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5개국어에 능통했다”고 로셀리니는 말했다. “영어와 스웨덴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화에서 각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했다. 매우 보기 드문 경우다. 또 어머니 외에도 베티 데이비스나 캐서린 햅번 등 유명한 여배우가 있었지만 그들은 거의 할리우드에서만 일했다. 유럽에서 어머니처럼 활발한 활동을 펼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공연 시리즈는 버그만을 기리는 데만 목표를 두진 않는다. 영화의 보존과 역사, 예술의 한 형태로서의 인식 등에 관한 대화를 활성화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단순히 우리 어머니를 기억하는 것을 뛰어넘어 (물론 사람들이 어머니를 기억해줘 기쁘다) 영화는 음악이나 문학, 미술과 마찬가지로 예술로서의 명성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고 로셀리니는 말했다. “영화 예술도 다른 예술을 대하듯 해야 한다. 박물관과 기록보관소에 자료를 축적하고 역사학자들이 참조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뛰어난 영화와 영화인들을 기려야 한다. 이 기념행사는 단순히 ‘우리 어머니를 잊지 말아달라’는 뜻으로만 마련된 게 아니다.”

일리 있는 말이다. 현재와 같은 형태의 영화는 역사가 100년 남짓밖에 안 돼 인류 문화에서 가장 새로운 예술 형태 중 하나다(인터넷 밈과 GIF 영상보다는 오래됐지만 말이다). 버그만이 태어났을 당시는 최초의 장편 유성영화[앨 졸슨의 ‘재즈 싱어’(1927)]가 나오기 훨씬 전이었다. “어머니가 어렸을 때는 무성영화밖에 없었고 어머니의 아버지가 어렸을 때는 영화가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로셀리니는 말했다. “어머니의 탄생 100주년은 영화의 부활과 보존, 영화를 위한 예술가들의 기여에 관해 논할 좋은 기회다. 또한 어머니를 100년의 역사를 지닌 영화 예술을 대표하는 인물로 조명하는 계기도 된다.”

로셀리니는 버그만의 생애를 기리는 많은 행사가 끝나는 대로 한동안 “일하지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로셀리니에게 다른 야심 찬 프로젝트에 매달리는 것은 ‘일’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녀는 몇 달 동안 일을 쉬면서 “새 독백극과 영화를 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혹시 그녀가 대본과 감독, 주연을 맡은 선댄스 TV 시리즈 ‘그린 포르노(Green Porno)’처럼 괴이한 교육 프로그램이 또 나오는 건 아닐까? (동물의 번식 세계를 조명하는 이 프로그램에서 그녀는 자주 동물 코스튬을 입고 나와 연기를 펼친다.) 로셀리니는 그저 동물의 지능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 될 것이라고만 말했다.

그녀는 동물에 관심이 많은 배우답게 최근 토론토 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인 캐나다 영화 ‘내 안의 숨겨진 몬스터(Closet Monster)’에서 말하는 햄스터 역을 맡았다. 그녀는 또 올 크리스마스에 (미국에서) 개봉할 데이비드 오 러셀 감독의 코미디 액션 영화 ‘조이(Joy)’에서 제니퍼 로렌스, 로버트 드니로와 호흡을 맞췄다. 여성 조직폭력배 조이 맹가노(제니퍼 로렌스)의 삶을 그린 영화다. 로셀리니는 최종 편집이 끝나면 자신의 작은 역할 비중이 “더욱 더 작아질 듯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에서 작품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그러니 그녀가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난 후 이사벨라 로셀리니를 기념하는 회고전에 반드시 포함시켜야 할 작품 중 하나가 될 듯하다.

- PAULA MEJIA NEWSWEEK 기자 / 번역 정경희
 [박스기사] 잉그리드 버그만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


1. 선인장 꽃’(1969)


월터 마사우가 치과의사로, 버그만이 간호사로 나오며 두 사람은 사정상 부부 행세를 한다. 1960년대를 대표하는 이미지의 골디 혼도 볼 수 있다. 치과의사를 짝사랑하는 역할의 골디 혼은 히피족 같은 분위기인데 반해 버그만은 정숙한 여인의 이미지를 풍긴다.



2. ‘우리 여자들’(1953)


이탈리아 최초의 마큐멘터리(픽션의 요소를 곁들인 다큐멘터리)로 버그만과 이사 미란다, 알리다 발리 등 4명의 유명한 유럽 출신 여배우가 할리우드 밖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다뤘다.



3. ‘사라토가 본선’(1945)


샘 우드 감독의 낭만적인 서부영화로 버그만이 게리 쿠퍼의 상대역으로 나온다. 버그만의 서투른 영어 억양이 미국인 관객을 당황스럽게 하기도 했지만 그녀가 맡은 크리올인(미국 남부에 정착한 프랑스나 스페인 정착민의 후예) 캐릭터에는 안성맞춤이다.



4. ‘클로디아의 비밀’(1973)


십대 소녀 클로디아와 동생 제이미가 가출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머무르면서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동명의 어린이 소설을 바탕으로 했다. 버그만이 괴짜 할머니 미세스 바실 E 프랭크웨일러로 나온다.



5. ‘지킬박사와 하이드씨’(1941)


이 영화에서 버그만은 원래 지킬박사(스펜서 트레이시)의 정숙한 약혼녀로, 라나 터너는 ‘음탕한 매춘부’로 캐스팅됐었다. 하지만 버그만은 자신의 ‘착한 여자’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서 빅터 플레밍 감독을 설득해 터너와 역할을 맞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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