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사람들] 꿈·돈·스트레스의 균형점 찾아라
[50+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사람들] 꿈·돈·스트레스의 균형점 찾아라
“막상 닥치면 멍해져요.” 퇴직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베이비부머의 은퇴가 갈수록 큰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이미 퇴직한 사람들의 고충을 다룬 기사나 이야기도 자주 나온다. 그래서 정부나 직장, 사회에서 은퇴자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은퇴 전에는 자신만만하게 마련이다. “나는 다를 거야”라며 허세도 부리지만 막상 은퇴하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한다.
멋진 인생 후반기를 연 사람들은 어떤 생각,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이들은 대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삶’을 목표로 사는 사람들이다. 대부분 “돈에 대한 욕심을 조금만 버리면 누구나 즐겁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내 재능이 사회를 멋지게 바꾸는 모습을 보면 돈으로 살 수 없는 만족감도 느낀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환경에서 다른 재능과 목표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꾸린다. 이들의 삶이 모든 50+ 세대의 해법이 될 순 없다. 하지만 ‘이런 삶도 멋지겠다’는 아이디어를 얻을 수는 있다. 서울 합정동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나종민(52) 바라봄사진관 대표의 공식직함은 ‘착한 사진가’다. 2011년 문을 연 나 대표의 사진관은 설립 배경부터 착하다. 은퇴 후 그는 봉사활동 삼아 장애인체육대회에서 사진촬영을 맡았다. 그때 만난 뇌병변 장애인의 어머니가 “장애인이 마음 놓고 갈 수 있는 사진관이 없어 아직까지 변변한 가족사진 한 장 없다”고 말한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외국계 IT기업에서 20여년간 근무했다. 한국 지사장까지 지낸 그가 회사를 나왔을 때 나이는 마흔 다섯. 은퇴하기엔 다소 이른 나이였지만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돈은 잘 벌었지만 하는 일에 보람을 못 느꼈어요. 실적에 목을 매는 삶에 회의를 느꼈죠. 이왕 회사를 나온 김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 마음 먹었어요.” 남들보다 좀 일찍 시작된 그의 인생 2막은 그러나 녹록하지 않았다. 당장 매달 들어오던 수입이 없어지자 눈앞이 캄캄했다. 회사 중역으로 누리던 혜택도 모두 사라졌다. 불안감이 엄습해오자 당초 결심도 흐려졌다. 그냥 재취업을 해야 하나 싶어 한번은 헤드헌터를 만나보기도 했다. 불안의 근원은 막막한 미래였다. 그동안 모은 금융자산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것을 시작으로 은퇴 후 삶을 계획했다. 90세를 기준으로 지금까지 모은 적금, 보험, 개인연금, 국민연금을 갖고 수입과 지출 내역을 정리해봤다. 매달 월급을 받던 때처럼 풍족하게 살 순 없어도, 지금 가진 돈이면 그럭저럭 먹고 살 만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러자 불안감 대신 자신과 가족을 위해 무엇을 하며 살지 기대감이 찾아왔다.
“저처럼 20여년간 회사에서 일한 은퇴자라면 어지간해선 먹고 사는데 충분한 돈은 이미 갖고 있어요. 다만 앞으로 벌진 못하고 쓸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니 불안한 거죠. 회사 다닐 때처럼 비싼 밥을 먹고, 골프 칠 생각을 한다면 돈이 부족할 거에요. 그렇다고 그 돈을 벌기 위해 은퇴 후에도 또다시 생계형 자영업에 뛰어드는 건 무모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있는 자금을 아껴서 가치 있게 쓰는 법을 고민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죠.”
그렇게 나 대표는 2007년부터 은퇴 설계를 위한 강좌를 열심히 찾아 다녔다. 그중 하나가 시민참여단체 ‘희망제작소’의 행복설계아카데미였다. 다른 은퇴자 교육 프로그램 대상이 대부분 50대 이상으로 한정됐던 반면 행복설계아카데미는 당시 40대였던 그도 참여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다른 은퇴자들과 함께 LETS(Life Experience Talent Share)라는 비영리 단체를 만들었다. 재능기부를 하는 봉사단체였다. 평소 사진에 관심이 많아 관련 강좌를 수강하기도 했던 나 대표는 자연스레 사진으로 재능기부를 해보자 마음 먹었다.
착한 사진가가 사진을 찍는 착한 사진관에는 자연스레 착한 사람들이 모여든다. 나 대표가 찍은 사진 속 사람들의 얼굴에 행복이 걸렸다. 바라봄사진관은 장애인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사진관이지만 일반 스튜디오처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평범한 사진관과 다른 점이 있다면 ‘1+1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고객이 돈을 내고 가족·인물사진을 찍으면 공짜로 한번 더 찍을 수 있다. 단 무료 촬영권은 장애인이나 노약자, 저소득 층 등 어려운 이웃에게 돌이킨다. “그냥 일반 사진관으로 알고 오신 분들도 자연스레 나눔에 동참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추후에 ‘당신의 도움으로 이런 가족이 사진을 찍고 갔습니다’라고 알려드리는데 그럴 때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고요. 도움을 준 쪽도, 받은 쪽도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큰 보람을 느껴요.”
사진 촬영으로 버는 돈은 모두 사진관 수입으로 잡힌다. 그가 교육·강연 등으로 버는 수입 역시 장비를 마련하거나 사진관을 운영하는 데 쓴다. 1년에 수십 차례 장애인을 위한 사진 봉사를 다니고, 최근 해외 빈민가로도 활동 범위를 넓혔다. 나 대표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수익을 낼 수 있다”며 “그 몫을 개인이 가져갈지 사회에 환원할지는 각자 선택하기 나름”이라고 설명했다.
“은퇴 후 수익을 올리면서도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건 마치 ‘양날의 검’과 같아요. 만약 현실적으로 은퇴 후에도 돈이 꼭 필요하다면 버는 데 초점을 둬야겠죠. 그렇지만 인생 1막에서 이미 돈을 벌기 위한 삶을 살았으니 2막, 3막에는 다른데 가치를 둘 여유가 있다고 하면 돈에 대한 철학을 바꿀 필요가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재능을 키우고, 이를 활용하면 자연스레 수입도 들어오게 마련이에요. 물론 그게 현역 때처럼 많은 순 없습니다. 은퇴 후 좋아하는 일을 하며 한 달에 100만~150만원 벌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나 대표는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은퇴자 교육이 주로 재취업과 일자리 창출 등 당장의 수입을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은퇴 후에도 젊은 시절만큼 돈을 벌기 위해 자영업에 뛰어들면 당장은 수입이 생길지 몰라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은퇴의 뜻이 ‘물러나서 숨어있다’는 말이잖아요. 과거에는 평균수명이 70세쯤 되니 50대에 은퇴해서 한 10년 숨어사는 게 가능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100세 시대잖아요. 아직도 반평생이 남았는데 길게 봐야죠. 최근에는 정부나 지자체에서 마련한 은퇴자 프로그램이 많아졌으니 뭐든 배우고, 도전해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해보고 아니면 딴 걸 또 하면 되고요. 그 시간이 절대 낭비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 왕년에 한 자리씩 했던 능력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하면 됩니다, 돼요!” “SNS를 활용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김승국(60) 신나는조합 전문위원이 서울 금호동 반찬가게 이씨에게 말을 건넸다. 이씨의 반찬가게는 최근 주변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주민이 줄어드는 바람에 매상이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김 위원은 “음식 솜씨가 좋고 의지도 있으니까, 사람들 돌아올 때까지만 버티면 괜찮아질 것”이라며 이씨를 격려했다. “대출자들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이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상황을 최대한 이해한다는 생각으로 일해요.”
김 위원은 사단법인 신나는조합의 사회적금융팀에서 대출 업체 사후관리를 맡고 있다. 신나는조합은 정책기금과 기업 후원금을 바탕으로 예비 창업자에게 소액 사업자금을 융자하는 기업이다. 김 위원은 여기서 대출심사와 사후관리를 한다. 현장에 나가 대출자의 현재 상황을 확인하고 보고서를 작성한다. 한 달에 한 번 대출자들을 만나 상담을 해주고 상환이 정상적으로 이뤄지도록 돕는다. 약 40여 업체를 그가 관리한다. 현장지도를 나가서는 상환금보다 먼저 자녀가 학교에 잘 다니는지, 가게는 잘되는지 등을 묻는다. “당장 대출금을 받는 것보다 사정을 이해하고 사업이 잘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가 신나는조합의 직원이 된 건 4년 전이다. 비슷한 일을 하는 비영리법인 희망도레미 소속으로 2009년부터 신나는조합의 일을 돕다가, 2011년 상근 제의를 받아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한 주에 2~3일 정도 일한다. 주 5일도 가능하지만, 여유가 없을 것 같아 2~3일만 출근하기로 했다. 다른 시니어 전문위원 2명은 주 5일 근무한다. 근무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정년은 없다. 다른 직원들과 달리 시니어 전문위원에게만 예외가 적용됐다. 수입은 최저임금 수준. 현역 시절에 비하면 쥐꼬리 수준이다. “처음부터 돈보다는 재능기부가 목적이었어요. 하지만 조금이라도 돈을 번다는 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게 없이 봉사한다고만 생각하면 일에 대한 집중력도 떨어지고, 조금씩 소홀해지게 되거든요.”
김 위원은 SK텔레콤 출신이다. 2000년 프로야구단 SK와이번즈 단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이후 이동통신 대리점과 학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적에 대한 압박과 직원 관리의 어려움은 현역 시절 못지 않았다. 평생 느낀 팽팽한 긴장감에서 벗어나고 싶어 찾게 된 것이 사회적기업이다. “월급쟁이나 자영업 시절의 스트레스가 80이라면 지금은 제로입니다. 사선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어 즐거워요. 놀이터에 가는 기분으로 출근합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시니어들이 일단 집 밖으로 나와야 한다고 조언한다. “사회공헌 할 수 있는 일감은 많고, 이들의 경험과 역량을 원하는 사회적 기업도 곳곳에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신나는조합이 시니어를 고용하기 시작한 것은 정책이나 명분 때문이 아니다. 필요에 의해서다. 박향희 신나는조합 사무국장의 설명은 이렇다. “대출자의 사후관리는 업무가 유동적이어서 고정 인력을 쓰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6년 전부터 은퇴한 시니어에게 이 업무를 맡겨보기로 했어요. 예상보다 효과가 좋았습니다. 대출자와의 관계를 쌓는 게 20~30대보다는 시니어가 노련하거든요. 시니어들도 사회공헌이라는 측면에서 높은 수당을 요구하지 않아 인건비 부담도 청년층보다 적었습니다. 이때부터 대출 사후관리 업무의 시니어 비중을 높였어요. 현재 약 25명이 각각 10~30개 업체를 관리합니다. 이들은 관리 업체 수에 따라 수당을 받아요. 아예 상근 직원도 뽑았습니다. 김 위원이 그 가운데 한 분이죠.”
지난해부터는 민간 기업과의 연계를 통해 시니어 일자리 창출에 나서고 있다. 한화생명과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의 후원으로 ‘시니어 인턴십’을 운영한다. 지난해에는 창업에 비중을 뒀지만, 올해에는 사회적기업 취업 연계를 병행했다. 만 60세 이상을 인턴으로 채용하면 비용의 50%를 최대 3개월까지 정부가 지원하기 때문에 비용도 절약된다. 올해 시니어 인턴십은 시니어 구직자 11명을 사회적기업에 인턴으로 연결해 줬다. 이들은 이후 모두 정규 직원으로 채용됐다. 박 국장은 “많은 사회적기업에서 행정·사무직 인력이 부족한데, 여기에 능숙한 시니어들이 많다”며 “사회적기업뿐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이들의 역량과 경험이 버리기에는 아까운 자원이란 걸 확인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어디선가 누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난다 최반장’.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동에 사는 최영식(61)씨. IBK기업은행에서 30년을 근무하다 2010년 지점장을 끝으로 퇴직했다. 하지만 직장 생활을 할 때보다 더 바쁜 삶을 산다. 그럼에도 얼굴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과거에는 학교나 직장이 정해주는 스케줄 대로 움직였는데, 지금은 내가 시간의 주인이잖아요. 하기 싫으면 그만하면 된다 생각하고 일을 하니까 스트레스가 없어서 좋습니다.”
퇴직 후 5년 동안 최씨는 10개도 넘는 직함과 명함이 있었다. 지금도 5개쯤의 직함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 비정규직이다. 예비 사회적기업 이사, 시민단체 감사, 협동조합 감사 등이다. 어느 한 곳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정직원’ ‘대표’ 등의 자리를 사양한다. 더러는 돈을 받기도 하고, 돈을 못 받더라도 즐거우면 그만이다. 자신의 텃밭인 문래동을 위한 재능기부를 한다. 누군가가 묻는다. “재능기부면 무조건 무료로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최씨가 답한다. “100만원을 주고 사람을 써야 할 수 있는 일을 20만원만 받고 일하면, 80만원은 재능기부를 한 거죠.”
직장인 최씨에게 20년을 넘게 살아온 문래동은 잠을 자는 곳에 불과했다. 그러다 남의 일처럼 여겼던 퇴직이 자신의 일이 됐다. ‘30년 동안 쉬지 않고 일했으니, 10년에 1년씩 안식년으로 쳐서 3년은 신나게 놀겠다’고 아내에게 허락을 얻었다. 버킷리스트를 만들었다. 등산도 가고, 자전거도 타고, 여행도 다녔다. 바쁘다는 핑계로 못 만났던 친구들과 동창들도 만났다. 3년은 놀거리라고 생각했던 일이 몇 달이 안돼 끝났다. 공허함과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러던 중 엘리베이터에서 한 전단지를 발견했다. ‘작가와 주민들이 함께하는 와인 강좌’. 용기를 내서 참석했다.
“문래동에 훌륭한 작가들이 많은 것을 그때 알았어요.” 지금은 높은 아파트가 많지만, 문래동은 과거 철공소들이 모인 공장촌이었다. 철공소는 대부분 2~3층 건물의 1층에 있었고, 2층과 3층은 주로 사무실이 자리를 잡았다. 시대가 바뀌며 철공소가 경영난을 겪었고 문을 닫는 업체가 많았다. 2층과 3층의 사무실은 모두 문래동을 떠났다. 그 빈 공간을 작업실 삼아 터를 잡은 예술가들이 많다. 이제는 ‘문래동 예술촌’이라는 어엿한 이름도 생겼다. 최씨에게는 최고의 놀이터였다. 시간이 자유로운 작가들과 오후 4시면 대부분 문을 닫는 철공소 사장들은 자주 어울렸다. 최씨도 그 틈에 끼었다. 작가들은 최씨를 철공소 사장으로, 철공소 사장은 최씨를 작가라 오해했다.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무리에 어울릴 수 있었다.
“예술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들의 삶의 방식과 문화가 흥미로웠어요. 우리 동네에서 놀면 적어도 교통비는 안 들잖아요. 집 근처에서 노니까 아내의 가사도 도울 수 있고요. 식사도 거의 해결이 돼요.” 그렇게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졌다. 자연스럽게 일자리도 생겼다. 이제는 필요 없는 능력이라 생각됐던 ‘은행원’의 경험이 곳곳에서 빛을 발했다.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제가 은행에 근무한 사실을 알게 됐어요. 철공소 사장들이 대출이나 재테크에 물으면 답해줬죠. 작가들은 많은 활동을 하고 지자체나 정부의 지원금을 받을 일이 많아요. 아이디어는 좋은데 서류 작업에 어려움을 겪어 몇 번 도와줬어요. 문래동을 기점으로 사회적 기업이 생기는데 회계나 재무 담당할 사람이 없다고 하면 또 도와줬죠. 얽매이기 싫어서 직함도 돈도 웬만하면 안 받아요.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직함이 생겨요. 차비나 식비 명목으로 돈도 조금 생기죠. 그렇게 한 달에 버는 돈이 100만~150만원 정도 되더군요. 적자는 안 내는 자립형 1인 경제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최씨가 마을에 더 큰 애정을 쏟게 된 계기된 사건이 있다. 한 작가가 사진 전시회를 여는데 최씨도 함께 하자고 권한 것. “예술의 ‘예’자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만류했어요. 그런데 필름 카메라 하나 덜렁 주더니 무조건 찍어보래요. 그래서 한 4주 정도 마을 곳곳을 돌아다녔어요. 20년 살면서 한 번도 안 다녀 본 골목과 공간을 마주하게 됐죠. 내가 모르는 마을의 매력에 흠뻑 빠졌어요. 내가 이 공간에서 해야 될 일들이 보이더군요.”
최근에는 새로운 직업도 하나 생겼다. 문래동 관광 가이드(최씨는 가이드보다는 도슨트라는 호칭을 좋아한다). 예술촌이 뜨면서 전국에서 이곳을 보겠다고 사람들이 몰렸다. 막상 와보면 철공소가 즐비한 낡은 골목일 뿐 특별한 걸 찾기는 힘들다. 최씨와 함께라면 다르다. “여기 이 식당은 폐가에 가까운 한옥을 개조해 만들었는데, 예술가가 운영해요. 식당 안에 장식도 직접 만들었죠. 이 건물 2층에는 디자인 공동작업실이 있어요. 저기 길에 보이는 조형물을 이곳에서 만들었어요.” 최씨의 블로그나 페이스북을 통해 일주일에 수십 건씩 요청이 들어온다. 가끔 가이드를 하다 보면 공방이나 작업실이 비어 문이 잠겼을 때가 있다. 하지만 웬만한 작업실 비밀번호와 열쇠는 최씨가 가지고 있다. 그가 작가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신뢰를 얻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최씨가 50+ 세대에게 말한다. “퇴직 후에는 전혀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해야 하죠. 내 지시를 듣고 움직이는 사원·대리는 이제 없어요. 소통하는 방법부터 바꿔야 해요. 내 역할을 강조하지 말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들의 공동체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즐겁게 지내다 보면 내 역할이 생기고 자존감도 생겨요. 말처럼 쉽진 않겠지만, 일단 내려놓고 최대한 가볍게 무슨 일이든 부딪혀 보기를 바랍니다.” 은퇴 하면 으레 부정적인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구직난, 막막함, 생활비 압박 등. 무엇이든 하고 싶은 의지는 있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서 고통 받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윤기숙(70·여) 전 삼성생명 송원영업소장에게 은퇴는 그동안 미뤄왔던 꿈을 찾아 떠날 기회였다. 70세인 윤씨는 50+ 세대는 아니다. 하지만 그가 인생 2막을 연건 55세, 퇴직 후였다. 50+ 세대에 충분한 메시지를 줄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고 그를 만났다.
젊은 시절 윤 전 소장에게 개인의 꿈을 갈고 닦을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결혼과 육아, 생활을 꾸려나가면서 동시에 보험 설계사로 일하는 동안 20여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55세 정년퇴직 후 남들이 그러하듯 집에서 주로 생활했다. 처음엔 재미있었지만, 평생 일하던 사람이 집에만 있으려니 견딜 수가 없었다. 은퇴 후 딱 두 달 만에 우울증이 찾아왔다. 우울증으로 고통을 겪을 때 힘을 준 게 윤 전 소장의 남편이다. 어느 날 남편은 나직한 목소리로 “여보, 미술 다시 해볼래?”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에 용기를 얻었다. 평소 동경하던 홍익대 미술대학에 전화했더니 고등학교 졸업장과 대학입학수학능력시험 점수가 필요하다는 조언을 들었다. 처음엔 “에이, 은퇴하고 수입도 없는데 어떻게 학교를 다닐 수 있겠어”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앞섰다. 윤 씨는 심장병 증상으로 고등학교 때 학업을 중도 포기했다. 미술 학도가 되려면 고등학교부터 다시 다녀야 하는 상황이라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때 보험설계사로 일하면서 체득한 도전정신을 떠올렸다. 고등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보험설계사로 성공하기 위해서 그는 시골 오지까지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 심지어 공동묘지까지 찾아가서 계약을 성사시킨 경험이 있을 정도로 억척스럽게 일에 매달린 결과 소장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소장 10년 근속을 기리며 삼성생명에서 윤씨에게 호주 여행 티켓을 선물한 적도 있었다.
일도 이렇게 했는데 평소 좋아하던 미술인이 되려면 고등학교를 못 갈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결국 윤씨는 전주여고에 재입학 해 손녀뻘 학생들과 함께 다시 학창생활을 시작했다. 이 결단이 윤씨의 은퇴 후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고교생 자격으로 출전한 전국학생미술실기대회에서 특선을 수상한 것이다. 남들보다 조금 늦었지만 꿈은 좇기로 결심하자 윤씨의 인생은 술술 풀려갔다. 실기 대회 수상이 계기가 되어 지난해 조선대 미술대학 회화과 한국화전공 새내기로 입학했다.
요즘은 대학생 겸 미술인으로 바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대학교 2학년 학생으로서 보고서나 과제물 제출에도 소홀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한국미술협회 회원으로서 작품 활동도 본격 시작했다. 은퇴 후 고정 수입이 없는데 대학생으로 살아가면서 들어가는 비용도 많을 터. 생활비는 어떻게 감당하고 있을까. 일단 학비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충당한다. 지난 학기 학점 4.0 만점에 3.78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학업에 매달렸다. 덕분에 OK저축은행에서 선발하는 배정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학비는 100% 해결했다.
가장 단위가 큰 학비가 해결되자 다른 비용은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미술작가로서 개인전이나 단체전을 열면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작품을 구입해주는 경우가 있고, 이곳저곳에서 만학 초대작가로 불러주는 경우도 있다. 물론 작품 재료비나 대회 접수 비용을 겨우 충당하는 수준이지만, 과거 삼성생명에서 일하면서 돈을 벌 때보다는 만족감이 훨씬 높다. 윤씨는 ‘은퇴’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공부, 미술, 봉사활동 등 평소 일하느라 못했던 경험을 모두 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윤씨는 “학비, 생활비 때문에 꿈을 포기하고 안주했더라면 아직도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라며 “내 꿈에 집중할 수 있는 은퇴 후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라고 활짝 웃었다.
- 박성민·문희철·허정연·함승민 기자 park.sungmin1@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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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인생 후반기를 연 사람들은 어떤 생각,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이들은 대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삶’을 목표로 사는 사람들이다. 대부분 “돈에 대한 욕심을 조금만 버리면 누구나 즐겁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내 재능이 사회를 멋지게 바꾸는 모습을 보면 돈으로 살 수 없는 만족감도 느낀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환경에서 다른 재능과 목표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꾸린다. 이들의 삶이 모든 50+ 세대의 해법이 될 순 없다. 하지만 ‘이런 삶도 멋지겠다’는 아이디어를 얻을 수는 있다.
나종민 바라봄사진관 대표 | “가진 돈 아끼며 하고 싶은 일 하세요”
“돈은 잘 벌었지만 하는 일에 보람을 못 느꼈어요. 실적에 목을 매는 삶에 회의를 느꼈죠. 이왕 회사를 나온 김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 마음 먹었어요.” 남들보다 좀 일찍 시작된 그의 인생 2막은 그러나 녹록하지 않았다. 당장 매달 들어오던 수입이 없어지자 눈앞이 캄캄했다. 회사 중역으로 누리던 혜택도 모두 사라졌다. 불안감이 엄습해오자 당초 결심도 흐려졌다. 그냥 재취업을 해야 하나 싶어 한번은 헤드헌터를 만나보기도 했다. 불안의 근원은 막막한 미래였다. 그동안 모은 금융자산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것을 시작으로 은퇴 후 삶을 계획했다. 90세를 기준으로 지금까지 모은 적금, 보험, 개인연금, 국민연금을 갖고 수입과 지출 내역을 정리해봤다. 매달 월급을 받던 때처럼 풍족하게 살 순 없어도, 지금 가진 돈이면 그럭저럭 먹고 살 만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러자 불안감 대신 자신과 가족을 위해 무엇을 하며 살지 기대감이 찾아왔다.
“저처럼 20여년간 회사에서 일한 은퇴자라면 어지간해선 먹고 사는데 충분한 돈은 이미 갖고 있어요. 다만 앞으로 벌진 못하고 쓸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니 불안한 거죠. 회사 다닐 때처럼 비싼 밥을 먹고, 골프 칠 생각을 한다면 돈이 부족할 거에요. 그렇다고 그 돈을 벌기 위해 은퇴 후에도 또다시 생계형 자영업에 뛰어드는 건 무모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있는 자금을 아껴서 가치 있게 쓰는 법을 고민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죠.”
그렇게 나 대표는 2007년부터 은퇴 설계를 위한 강좌를 열심히 찾아 다녔다. 그중 하나가 시민참여단체 ‘희망제작소’의 행복설계아카데미였다. 다른 은퇴자 교육 프로그램 대상이 대부분 50대 이상으로 한정됐던 반면 행복설계아카데미는 당시 40대였던 그도 참여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다른 은퇴자들과 함께 LETS(Life Experience Talent Share)라는 비영리 단체를 만들었다. 재능기부를 하는 봉사단체였다. 평소 사진에 관심이 많아 관련 강좌를 수강하기도 했던 나 대표는 자연스레 사진으로 재능기부를 해보자 마음 먹었다.
착한 사진가가 사진을 찍는 착한 사진관에는 자연스레 착한 사람들이 모여든다. 나 대표가 찍은 사진 속 사람들의 얼굴에 행복이 걸렸다. 바라봄사진관은 장애인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사진관이지만 일반 스튜디오처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평범한 사진관과 다른 점이 있다면 ‘1+1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고객이 돈을 내고 가족·인물사진을 찍으면 공짜로 한번 더 찍을 수 있다. 단 무료 촬영권은 장애인이나 노약자, 저소득 층 등 어려운 이웃에게 돌이킨다. “그냥 일반 사진관으로 알고 오신 분들도 자연스레 나눔에 동참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추후에 ‘당신의 도움으로 이런 가족이 사진을 찍고 갔습니다’라고 알려드리는데 그럴 때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고요. 도움을 준 쪽도, 받은 쪽도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큰 보람을 느껴요.”
사진 촬영으로 버는 돈은 모두 사진관 수입으로 잡힌다. 그가 교육·강연 등으로 버는 수입 역시 장비를 마련하거나 사진관을 운영하는 데 쓴다. 1년에 수십 차례 장애인을 위한 사진 봉사를 다니고, 최근 해외 빈민가로도 활동 범위를 넓혔다. 나 대표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수익을 낼 수 있다”며 “그 몫을 개인이 가져갈지 사회에 환원할지는 각자 선택하기 나름”이라고 설명했다.
“은퇴 후 수익을 올리면서도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건 마치 ‘양날의 검’과 같아요. 만약 현실적으로 은퇴 후에도 돈이 꼭 필요하다면 버는 데 초점을 둬야겠죠. 그렇지만 인생 1막에서 이미 돈을 벌기 위한 삶을 살았으니 2막, 3막에는 다른데 가치를 둘 여유가 있다고 하면 돈에 대한 철학을 바꿀 필요가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재능을 키우고, 이를 활용하면 자연스레 수입도 들어오게 마련이에요. 물론 그게 현역 때처럼 많은 순 없습니다. 은퇴 후 좋아하는 일을 하며 한 달에 100만~150만원 벌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나 대표는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은퇴자 교육이 주로 재취업과 일자리 창출 등 당장의 수입을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은퇴 후에도 젊은 시절만큼 돈을 벌기 위해 자영업에 뛰어들면 당장은 수입이 생길지 몰라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은퇴의 뜻이 ‘물러나서 숨어있다’는 말이잖아요. 과거에는 평균수명이 70세쯤 되니 50대에 은퇴해서 한 10년 숨어사는 게 가능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100세 시대잖아요. 아직도 반평생이 남았는데 길게 봐야죠. 최근에는 정부나 지자체에서 마련한 은퇴자 프로그램이 많아졌으니 뭐든 배우고, 도전해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해보고 아니면 딴 걸 또 하면 되고요. 그 시간이 절대 낭비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 왕년에 한 자리씩 했던 능력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하면 됩니다, 돼요!”
김승국 신나는조합 전문위원 | “줄어든 월급만큼 보람이 늘었죠”
김 위원은 사단법인 신나는조합의 사회적금융팀에서 대출 업체 사후관리를 맡고 있다. 신나는조합은 정책기금과 기업 후원금을 바탕으로 예비 창업자에게 소액 사업자금을 융자하는 기업이다. 김 위원은 여기서 대출심사와 사후관리를 한다. 현장에 나가 대출자의 현재 상황을 확인하고 보고서를 작성한다. 한 달에 한 번 대출자들을 만나 상담을 해주고 상환이 정상적으로 이뤄지도록 돕는다. 약 40여 업체를 그가 관리한다. 현장지도를 나가서는 상환금보다 먼저 자녀가 학교에 잘 다니는지, 가게는 잘되는지 등을 묻는다. “당장 대출금을 받는 것보다 사정을 이해하고 사업이 잘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가 신나는조합의 직원이 된 건 4년 전이다. 비슷한 일을 하는 비영리법인 희망도레미 소속으로 2009년부터 신나는조합의 일을 돕다가, 2011년 상근 제의를 받아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한 주에 2~3일 정도 일한다. 주 5일도 가능하지만, 여유가 없을 것 같아 2~3일만 출근하기로 했다. 다른 시니어 전문위원 2명은 주 5일 근무한다. 근무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정년은 없다. 다른 직원들과 달리 시니어 전문위원에게만 예외가 적용됐다. 수입은 최저임금 수준. 현역 시절에 비하면 쥐꼬리 수준이다. “처음부터 돈보다는 재능기부가 목적이었어요. 하지만 조금이라도 돈을 번다는 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게 없이 봉사한다고만 생각하면 일에 대한 집중력도 떨어지고, 조금씩 소홀해지게 되거든요.”
김 위원은 SK텔레콤 출신이다. 2000년 프로야구단 SK와이번즈 단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이후 이동통신 대리점과 학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적에 대한 압박과 직원 관리의 어려움은 현역 시절 못지 않았다. 평생 느낀 팽팽한 긴장감에서 벗어나고 싶어 찾게 된 것이 사회적기업이다. “월급쟁이나 자영업 시절의 스트레스가 80이라면 지금은 제로입니다. 사선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어 즐거워요. 놀이터에 가는 기분으로 출근합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시니어들이 일단 집 밖으로 나와야 한다고 조언한다. “사회공헌 할 수 있는 일감은 많고, 이들의 경험과 역량을 원하는 사회적 기업도 곳곳에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신나는조합이 시니어를 고용하기 시작한 것은 정책이나 명분 때문이 아니다. 필요에 의해서다. 박향희 신나는조합 사무국장의 설명은 이렇다. “대출자의 사후관리는 업무가 유동적이어서 고정 인력을 쓰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6년 전부터 은퇴한 시니어에게 이 업무를 맡겨보기로 했어요. 예상보다 효과가 좋았습니다. 대출자와의 관계를 쌓는 게 20~30대보다는 시니어가 노련하거든요. 시니어들도 사회공헌이라는 측면에서 높은 수당을 요구하지 않아 인건비 부담도 청년층보다 적었습니다. 이때부터 대출 사후관리 업무의 시니어 비중을 높였어요. 현재 약 25명이 각각 10~30개 업체를 관리합니다. 이들은 관리 업체 수에 따라 수당을 받아요. 아예 상근 직원도 뽑았습니다. 김 위원이 그 가운데 한 분이죠.”
지난해부터는 민간 기업과의 연계를 통해 시니어 일자리 창출에 나서고 있다. 한화생명과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의 후원으로 ‘시니어 인턴십’을 운영한다. 지난해에는 창업에 비중을 뒀지만, 올해에는 사회적기업 취업 연계를 병행했다. 만 60세 이상을 인턴으로 채용하면 비용의 50%를 최대 3개월까지 정부가 지원하기 때문에 비용도 절약된다. 올해 시니어 인턴십은 시니어 구직자 11명을 사회적기업에 인턴으로 연결해 줬다. 이들은 이후 모두 정규 직원으로 채용됐다. 박 국장은 “많은 사회적기업에서 행정·사무직 인력이 부족한데, 여기에 능숙한 시니어들이 많다”며 “사회적기업뿐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이들의 역량과 경험이 버리기에는 아까운 자원이란 걸 확인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문래동 공동체문화 지킴이 최영식씨 | “지금은 내가 시간의 주인입니다”
퇴직 후 5년 동안 최씨는 10개도 넘는 직함과 명함이 있었다. 지금도 5개쯤의 직함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 비정규직이다. 예비 사회적기업 이사, 시민단체 감사, 협동조합 감사 등이다. 어느 한 곳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정직원’ ‘대표’ 등의 자리를 사양한다. 더러는 돈을 받기도 하고, 돈을 못 받더라도 즐거우면 그만이다. 자신의 텃밭인 문래동을 위한 재능기부를 한다. 누군가가 묻는다. “재능기부면 무조건 무료로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최씨가 답한다. “100만원을 주고 사람을 써야 할 수 있는 일을 20만원만 받고 일하면, 80만원은 재능기부를 한 거죠.”
직장인 최씨에게 20년을 넘게 살아온 문래동은 잠을 자는 곳에 불과했다. 그러다 남의 일처럼 여겼던 퇴직이 자신의 일이 됐다. ‘30년 동안 쉬지 않고 일했으니, 10년에 1년씩 안식년으로 쳐서 3년은 신나게 놀겠다’고 아내에게 허락을 얻었다. 버킷리스트를 만들었다. 등산도 가고, 자전거도 타고, 여행도 다녔다. 바쁘다는 핑계로 못 만났던 친구들과 동창들도 만났다. 3년은 놀거리라고 생각했던 일이 몇 달이 안돼 끝났다. 공허함과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러던 중 엘리베이터에서 한 전단지를 발견했다. ‘작가와 주민들이 함께하는 와인 강좌’. 용기를 내서 참석했다.
“문래동에 훌륭한 작가들이 많은 것을 그때 알았어요.” 지금은 높은 아파트가 많지만, 문래동은 과거 철공소들이 모인 공장촌이었다. 철공소는 대부분 2~3층 건물의 1층에 있었고, 2층과 3층은 주로 사무실이 자리를 잡았다. 시대가 바뀌며 철공소가 경영난을 겪었고 문을 닫는 업체가 많았다. 2층과 3층의 사무실은 모두 문래동을 떠났다. 그 빈 공간을 작업실 삼아 터를 잡은 예술가들이 많다. 이제는 ‘문래동 예술촌’이라는 어엿한 이름도 생겼다. 최씨에게는 최고의 놀이터였다. 시간이 자유로운 작가들과 오후 4시면 대부분 문을 닫는 철공소 사장들은 자주 어울렸다. 최씨도 그 틈에 끼었다. 작가들은 최씨를 철공소 사장으로, 철공소 사장은 최씨를 작가라 오해했다.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무리에 어울릴 수 있었다.
“예술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들의 삶의 방식과 문화가 흥미로웠어요. 우리 동네에서 놀면 적어도 교통비는 안 들잖아요. 집 근처에서 노니까 아내의 가사도 도울 수 있고요. 식사도 거의 해결이 돼요.” 그렇게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졌다. 자연스럽게 일자리도 생겼다. 이제는 필요 없는 능력이라 생각됐던 ‘은행원’의 경험이 곳곳에서 빛을 발했다.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제가 은행에 근무한 사실을 알게 됐어요. 철공소 사장들이 대출이나 재테크에 물으면 답해줬죠. 작가들은 많은 활동을 하고 지자체나 정부의 지원금을 받을 일이 많아요. 아이디어는 좋은데 서류 작업에 어려움을 겪어 몇 번 도와줬어요. 문래동을 기점으로 사회적 기업이 생기는데 회계나 재무 담당할 사람이 없다고 하면 또 도와줬죠. 얽매이기 싫어서 직함도 돈도 웬만하면 안 받아요.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직함이 생겨요. 차비나 식비 명목으로 돈도 조금 생기죠. 그렇게 한 달에 버는 돈이 100만~150만원 정도 되더군요. 적자는 안 내는 자립형 1인 경제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최씨가 마을에 더 큰 애정을 쏟게 된 계기된 사건이 있다. 한 작가가 사진 전시회를 여는데 최씨도 함께 하자고 권한 것. “예술의 ‘예’자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만류했어요. 그런데 필름 카메라 하나 덜렁 주더니 무조건 찍어보래요. 그래서 한 4주 정도 마을 곳곳을 돌아다녔어요. 20년 살면서 한 번도 안 다녀 본 골목과 공간을 마주하게 됐죠. 내가 모르는 마을의 매력에 흠뻑 빠졌어요. 내가 이 공간에서 해야 될 일들이 보이더군요.”
최근에는 새로운 직업도 하나 생겼다. 문래동 관광 가이드(최씨는 가이드보다는 도슨트라는 호칭을 좋아한다). 예술촌이 뜨면서 전국에서 이곳을 보겠다고 사람들이 몰렸다. 막상 와보면 철공소가 즐비한 낡은 골목일 뿐 특별한 걸 찾기는 힘들다. 최씨와 함께라면 다르다. “여기 이 식당은 폐가에 가까운 한옥을 개조해 만들었는데, 예술가가 운영해요. 식당 안에 장식도 직접 만들었죠. 이 건물 2층에는 디자인 공동작업실이 있어요. 저기 길에 보이는 조형물을 이곳에서 만들었어요.” 최씨의 블로그나 페이스북을 통해 일주일에 수십 건씩 요청이 들어온다. 가끔 가이드를 하다 보면 공방이나 작업실이 비어 문이 잠겼을 때가 있다. 하지만 웬만한 작업실 비밀번호와 열쇠는 최씨가 가지고 있다. 그가 작가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신뢰를 얻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최씨가 50+ 세대에게 말한다. “퇴직 후에는 전혀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해야 하죠. 내 지시를 듣고 움직이는 사원·대리는 이제 없어요. 소통하는 방법부터 바꿔야 해요. 내 역할을 강조하지 말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들의 공동체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즐겁게 지내다 보면 내 역할이 생기고 자존감도 생겨요. 말처럼 쉽진 않겠지만, 일단 내려놓고 최대한 가볍게 무슨 일이든 부딪혀 보기를 바랍니다.”
만학도 미술가 윤기숙씨 | “은퇴는 미룬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
젊은 시절 윤 전 소장에게 개인의 꿈을 갈고 닦을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결혼과 육아, 생활을 꾸려나가면서 동시에 보험 설계사로 일하는 동안 20여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55세 정년퇴직 후 남들이 그러하듯 집에서 주로 생활했다. 처음엔 재미있었지만, 평생 일하던 사람이 집에만 있으려니 견딜 수가 없었다. 은퇴 후 딱 두 달 만에 우울증이 찾아왔다. 우울증으로 고통을 겪을 때 힘을 준 게 윤 전 소장의 남편이다. 어느 날 남편은 나직한 목소리로 “여보, 미술 다시 해볼래?”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에 용기를 얻었다. 평소 동경하던 홍익대 미술대학에 전화했더니 고등학교 졸업장과 대학입학수학능력시험 점수가 필요하다는 조언을 들었다. 처음엔 “에이, 은퇴하고 수입도 없는데 어떻게 학교를 다닐 수 있겠어”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앞섰다. 윤 씨는 심장병 증상으로 고등학교 때 학업을 중도 포기했다. 미술 학도가 되려면 고등학교부터 다시 다녀야 하는 상황이라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때 보험설계사로 일하면서 체득한 도전정신을 떠올렸다. 고등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보험설계사로 성공하기 위해서 그는 시골 오지까지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 심지어 공동묘지까지 찾아가서 계약을 성사시킨 경험이 있을 정도로 억척스럽게 일에 매달린 결과 소장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소장 10년 근속을 기리며 삼성생명에서 윤씨에게 호주 여행 티켓을 선물한 적도 있었다.
일도 이렇게 했는데 평소 좋아하던 미술인이 되려면 고등학교를 못 갈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결국 윤씨는 전주여고에 재입학 해 손녀뻘 학생들과 함께 다시 학창생활을 시작했다. 이 결단이 윤씨의 은퇴 후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고교생 자격으로 출전한 전국학생미술실기대회에서 특선을 수상한 것이다. 남들보다 조금 늦었지만 꿈은 좇기로 결심하자 윤씨의 인생은 술술 풀려갔다. 실기 대회 수상이 계기가 되어 지난해 조선대 미술대학 회화과 한국화전공 새내기로 입학했다.
요즘은 대학생 겸 미술인으로 바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대학교 2학년 학생으로서 보고서나 과제물 제출에도 소홀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한국미술협회 회원으로서 작품 활동도 본격 시작했다. 은퇴 후 고정 수입이 없는데 대학생으로 살아가면서 들어가는 비용도 많을 터. 생활비는 어떻게 감당하고 있을까. 일단 학비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충당한다. 지난 학기 학점 4.0 만점에 3.78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학업에 매달렸다. 덕분에 OK저축은행에서 선발하는 배정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학비는 100% 해결했다.
가장 단위가 큰 학비가 해결되자 다른 비용은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미술작가로서 개인전이나 단체전을 열면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작품을 구입해주는 경우가 있고, 이곳저곳에서 만학 초대작가로 불러주는 경우도 있다. 물론 작품 재료비나 대회 접수 비용을 겨우 충당하는 수준이지만, 과거 삼성생명에서 일하면서 돈을 벌 때보다는 만족감이 훨씬 높다. 윤씨는 ‘은퇴’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공부, 미술, 봉사활동 등 평소 일하느라 못했던 경험을 모두 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윤씨는 “학비, 생활비 때문에 꿈을 포기하고 안주했더라면 아직도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라며 “내 꿈에 집중할 수 있는 은퇴 후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라고 활짝 웃었다.
- 박성민·문희철·허정연·함승민 기자 park.sungmin1@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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